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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祖의 墨香을 찾아서] 16(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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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9-22 21:27 조회2,0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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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祖의 墨香을 찾아서] 16(김수)





16.소의공 夢村 金  1547(명종 2)∼1615(광해군 7)



디지털한국학

김수(金#수51){4}

1547(명종 2)∼1615(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앙(子昻), 호는 몽촌(夢村). 아버지는 사재감정(司宰監正) ★홍도(弘度), 어머니는 ★이계백(李繼伯)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73년(선조 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거쳐 홍문관교리 때 왕명으로 《십구사략 十九史略》을 개수(改修)하였다.

1583년 번호(藩胡)가 침입하여 경원부(慶源府)가 함락되자 이조정랑으로서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종사관이 되었다. 유학(幼學) ★신급(申$급01)이 올린 상소 속에 조정에서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인물의 하나로 지적되기도 하였다.

직제학·승지를 거쳐 1587년에 평안도관찰사에서 면직되었으나, 나라에서 왜(倭)를 매우 걱정하여 변방의 일을 아는 재신(宰臣)을 뽑아 삼도(三道)로 나누어 파견하여 군무(軍務)를 순찰하고 대비하도록 할 때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591년 ★정철(鄭澈)의 건저문제(建儲問題)에 대해 옥당에서 탄핵하는 차자(箚子)를 올리려고 할 때 부제학으로서 사성 ★우성전(禹性傳)의 집으로 의논하러 가서 시간이 지연되어 올리지 못하였으므로 대사간 ★홍여순(洪汝諄)이 우성전을 탄핵하면서 남·북 두파로 갈리게 되자 남인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로서 진주에 있다가 동래가 함락되자 밀양과 가야를 거쳐 거창으로 도망을 가면서 다만 각 고을에 격문을 돌려 백성들에게 적을 피하라고 통고하니 도내가 텅 비어 왜적을 방어할 수 없었다.

전라감사 ★이광(李洸)과 충청감사 ★윤국형(尹國馨)이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켰을 때 겨우 1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가하였으나, 근왕병이 용인(龍仁)에서 왜군에게 패하자 경상우도로 되돌아가던 중 영남초유사(嶺南招諭使) ★김성일(金誠一)로부터 패전에 대한 질책을 받았다.

당시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곽재우(郭再祐)와 불화가 심하여 김성일의 중재로 무마되기는 하였지만, 지방사람들로부터 처사가 조급하고 각박할 뿐만 아니라 왜란의 초기에 계책을 세워 왜적과 대처하지 못하고 적병을 피하여 전라도로 도망갔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1592년 8월에 한성판윤이 되었고, 지중추부사·우참찬 등을 거쳐, 1596년(선조 29) 호조판서로서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명군(明軍)의 군량을 충당하기 위하여 군량징수에 힘썼다.

그뒤 영중추부사에 이르렀으나 1613년(광해군 5) 손자인 ★비(#비58)가 옥사할 때 탄핵을 받고 삭직당하였다. 시호는 소의(昭懿)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夢村集,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選考, 大東野乘. 〈朱雄英〉

*김수 필적 400×272





서운관정공파 유연재 김희수 - 동고 김로 - 남봉 김홍도 - 1김첨 (2김수) - 김성립 - 김진 으로 이어지는 家系는 6대 연속 문과급제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6대 모두 시서화를 일가를 이루었고,

또한 김성립의 처 허난설헌은 시와 그림으로 이름을 날리어 신사임당과 더불어 조선시대 여류시인을 대표하는 분입니다.





몽촌공 김수의 필적은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에 1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1점

근묵(인)에 1점

명가보묵(평산신씨)에 1점

안동김씨 화수록에 1점이 소개되어 있으며





국역 석릉세적에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槿域書彙]에 휘★瞻과 휘★수의 필적이 전하고 있으며

성균관대 박물관에는 [槿墨]에 휘★수의 필적이 전하여 지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역대명현필보]와 [조선사료집 진합편]에 휘★수의 시문이 필적과 더불어 각각 전하여지고 있으며,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우리 홈페이지 역사적 인물난에

2000년 5월 18일,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도당동 도당근린 공원내에 <부천 향토 역사관>이 개관되었는데 이곳에 공(=★김수)의 인물 내역과 필적이 전시되고 있다.(서운관정공파. 서울 양천구 목동아파트 거주, 규태씨 자료 제공)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국역 석릉세적 (1996)

김수 필적

임진난후 선조40년 (1607) 정월, 일본에 부사로 가는 교리 경?(청주인)을 보내는 자리에서 호조판서 ★김수가 읊은 시이다.

참고문헌 : 조선사료집 사진합편



선조23년 (1590)에 늙은 사람을 예우하는 뜻으로 나이 많은 임금과 정2품 70세 이상의 문관이 입참하여 기명하던 기로소(기사)에서 수연에 참석한 병조판서 ★김수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적어 놓은 시문이다.

참고문헌 : 대한민국역대명현필보



몽촌공 휘수 유묵 : 민족문화대백과 제4권 소재



④ 荷堂공(휘瞻) 및 夢村공(휘수)의 기록과 필적

[癸甲日錄]에 의하면

선조16년 (1583) 교리 휘★瞻이 庶 ?의 허통문제에 있어 이율곡을 탄핵하려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지례현감으로 특지되었다는 기록이 전하며, 유학 ★신급?(신립의 형)이 김응남, 우성전, 홍흔, ★김첨, ★김수 등이 조정에서 너무 권세를 부린다고 상소한 기록도 전한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槿域書彙]에 휘★瞻과 휘★수의 필적이 전하고 있으며

성균관대 박물관에는 [槿墨]에 휘★수의 필적이 전하여 지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역대명현필보]와 [조선사료집 진합편]에 휘★수의 시문이 필적과 더불어 각각 전하여지고 있으며,

[慶壽宴] 시문은 숙경이전의 유일한 시문으로서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고,

[送慶判事日本之行]인 시문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40년 일본과 강화하기 위해 떠나는 부사 ★경 ?을 위한 송별연에서 호조판서 휘★수의 착잡한 심경을 읊으신 시문으로

소장자는 왜정시 조선사편수회의 회장인 일본인 ★도엽암길씨가 소장하고 있다 하는데 이 어찌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日本訪書志]에 실린 [新增類合]은 훈몽자회와 더불어 조선조 시대의 아동 필독서로서 휘★수께서 교정을 하셨으며,

[增補文獻備考]에는 몽촌공의 저서인 몽촌집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아직까지도 발견할 수 없어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퇴계집 언행록]에 의하면

스승인 퇴계와 제자인 휘★수의 질의 응답이 기록되어 있는데 원문은 도산서원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퇴계시]에는 휘★수께서 보내신 편지에 답장으로 쓴 퇴계선생의 시문이 오늘날까지 전하여지고 있으며, [퇴계집]의 휘★수께서 쓰신 祭文은 문인중 최고 걸작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백사집]에도 김 접반사 ★수의 韻에 次韻한 ★이항복의 시문이 다수 전하여지고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에 임진왜란시 경상순찰사 金★수와 의병장 ★곽재우와의 불화내용이 전하여지고 있고,

[대동야승]에는 쌍방간에 오간 檄文 내용이 전하여지고 있는데, 당시의 전란에 따른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 이루어진 것으로서

후일 ★몽촌공이 오위도총관이고 ★곽재우가 오위부총관일 때 운검을 상사인 몽촌공께서 메겠다고 자청하는 사이좋은 일화가 [청장관전서]에 전하여지고 있다.

또한 [율곡집]에 의하면

암행어사 순행문제에 대해 ★이율곡과 ★몽촌공이 의견을 달리하  글이 엿보이는데 몽촌공은 암행어사 순행시 사전예고제를 주장한 것으로서 다소 융통성있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으로서 조선에 귀화한 ★김충선(사야가)의 [모하당전]에도 몽촌공의 기록이 전하여지고 있고

[성소부부고]에는 몽촌공이 선조의 명에 의하여 십구사략을 개수하고 발문을 쓴 기록이 엿보이며

[연행록 선집]에는 연경에 사신으로 떠나는 ★허봉을 몽촌공께서 만나는 장면과 허봉이 길을 가다 꿈속에서 휘★수와 시사를 얘기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리고 [선조실록] 권180에는 선조37년10월에 경기감사 ★金수가 북로에 서장의 지가 없다고 하여 철원에 산성의 축성을 청한 기록이 보이는데, 병자호란을 예견하고 북방에 대비하여 철원에 성을 쌓아야 할 것을 강력히 건의한 듯하다.







국사편찬위원회 홈

● 金筆蹟 s2237

書畵 筆蹟

사자 2237



1, 한문, 30×42cm, 印記:4.5×3.0cm(金子昻)

촬영:1935. 2.

소장:京城府 ★稻葉岩吉

조선 전기의 문신 夢村 金(1486∼1521)가 모 判事의 日本使行에 대하여 경하하며 보낸 시문.



● 慶壽圖帖(06) s0420-01 s0420-02 s0420-03

書畵 繪圖

사자 0420

金, 崔鐵堅, 壬寅 (1602)

3(6), 한문

소장:忠北 淸州郡 琅城面 官井里 申天浩

申撥(1523∼1616)의 77세 慶壽圖帖 가운데 49∼51頁. 金(1537∼1615) 및 崔鐵堅(1548∼1618)이 申同知慶壽圖에 붙여 쓴 글.





<안동김씨 화수록>

送慶判事日本之行

경부사를 일본으로 보내며



바닷물결이 잔잔한 날에

그대는 사신(통신사)이 되어 가네

영남에서는 백설을 바라보고

일본에서는 꾀꼬리 소리를 들으리



인사는 비록 힘으로는 어렵지만

천심은 평화를 바라시네

한잔 술로 서로 이별한 후에

변방의 달은 몇 번이나 기울고 차리



정미 신춘 몽촌



김수필적

임진왜란후 선조40년(1607) 정월

일본과 강화하기 위해 부사로 가는 교리 慶(日+進)(청주인)을 보내는 자리에서

호조판서 김수가 읊은 시문이다

---참고문헌 : 조선사료집眞합편, 조선사료총람(상)





<김수 선조님 친필 소개>

1. 출전 : <槿墨(仁)>(성균관대 간. 1995. 87p)

2. 크기 : 세로-26cm, 가로-37cm

3. 원본 소장처 :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4. 조사일 : 2002. 8. 13









▣ 김은회 - 주회 아우님 명절 잘 보내고 계십니까.

▣ 김재익 -

▣ 김재원 - 감사합니다. 한가위 잘 보내셨습니까?

▣ 김항용 - 몽촌공에 대한 방대하며 완벽한 자료 정리에 놀랬습니다, 그동안 발견된 몽촌공의 친필 번역문을 곧 알리겠습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한가위 잘 지내셨는지요?

▣ 김발용 - 귀한자료 감사합니다.

▣ 김정중 - 뜻 깊은 중추가절 잘 지내셨는지요? 주회 대부님!!!!!!

▣ 솔내영환 - 추석 잘 보내셨지료. 주회씨. 많은 자료 놀랍습니다.

▣ 김태서 - 추석 연휴 주회아저씨 덕분에 잘 보냈습니다.

▣ 김영윤 -

▣ 김윤만 - 수많은 자료 수지언제나 감사하고

▣ 김윤만 - 많은 자료 수집과 제공에 언제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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