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祖의 墨香을 찾아서] 22(김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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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10-03 04:28 조회1,731회 댓글0건본문
[先祖의 墨香을 찾아서] 22(김시양)
22.충익공 荷潭 金時讓1581(선조 14)∼1643(인조 21)
디지털한국학
김시양(金時讓)
1581(선조 14)∼1643(인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仲), 호는 하담(荷潭). 아버지는 비안현감 ★인갑(仁甲)이다.
1605년(선조 3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1607년 주서(注書)가 되고 1609년(광해군 1)에 예조좌랑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으며, 1610년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에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가 되었는데, 향시에 출제한 시제가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한 것이라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 영해(寧海)로 이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예조정랑·병조정랑·수찬·교리를 역임,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625년(인조 3) 응교가 되어 문학을 겸하였고, 이듬해에는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산릉역(山陵役)에 공로가 많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날 징후가 보이자 평안도관찰사 겸 체찰부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묘의(廟議)에 따라 도원수와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그러나 왕의 뜻을 어기고 척화를 주장하여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34년 지중추부사에 서용(敍用)되고 한성판윤을 거쳐 호조판서 겸 동지춘추·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이 되었다가 9월에 재차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였고, 1636년 청백리에 뽑혀 숭록계(崇祿階)에 올랐으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으나 눈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인 충주로 내려갔다.
1641년 《선조실록》을 개수할 때 대제학 ★이식(李植)과 총재관(摠裁官) ★홍서봉(洪瑞鳳) 등의 추천으로 다시 판중추부사 겸 춘추관사를 제수받았으나 지병인 안질로 실록개수역(實錄改修役)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전적(典籍)과 경사(經史)에 밝았다.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하담파적록 荷潭破寂錄》·《하담집》·《부계기문 #부33溪記聞》 등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李章熙
*김시양 필적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시양필적
1581(선조 14)-1643(인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청백리에 뽑혀 숭록대부에 올랐으며, 전적과 경사에 밝았다. 저서로는 ≪하담파적록≫ 등이 있다. 글씨는 ≪근묵≫에서.
하담공(김시양) 친필 서찰 번역 정리
<하담공(金時讓) 친필 해석문>
인터넷 <디지털 한국학>에 있는 하담공 친필 서찰을 아래와 같이 번역, 정리하였기에 공개합니다.
삼가 보냅니다.
박대관 학사가 함평(咸平)에 부임토록 임용했는데, 진퇴에 서로 다투므로 신(臣)은 가만히 좌우의 눈치를 보면서 상감께 상주하였던 것입니다.
상감께서는 백성을 걱정하시어 반열이 하는 대로 하지 않음을 어찌 짐작이나 하였습니까.
밝은 시절의 언로에는 옛날에는 관(官)에 망령되이 간언하면 오직 죄가 됨을 알 뿐 입니다.
길은 차현(車峴)령 지나 집은 어디 있는가
성은 넓은 바다를 베개 삼고 머리는 반백이 되어
푸른 하늘이 약물(藥物)을 전한다는 말 들으니
남 다른 은혜 오히려 스스로 평안하기를 바랄 뿐이오.
천계 을축 (인조3년. 1625)
하담(荷潭) 낙망자(樂忘子) 씀
김항용
국사편찬위원회 홈
新安世寶(02) s2003-18古書 集部 尺牘類
사자 2003
20(40), 초서, 한문
諸賢手簡 2
소장:全北 全州府 玄俊鎬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賢儒로 일컬어지던 白振南(1564∼1618), 玄德升(1564∼?), 成輅(1550∼1616), 姜沆(1567∼1618), 梁山璹(1561∼1593), 朴東亮(1569∼1635), 金尙憲, 鄭蘊, 尹煌, 安邦俊, 洪, 金時讓, 李植, 金地粹의 서간과 明文 등 필적.
충익공(김시양) 친필 서찰(2) 번역문 소개
*지난 4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견한 충익공(휘 時讓. 제학공파) 선조님의 친필 서찰을 우리 문중의 한학자이신 김익수(제학공파. 제주도 문화재위원) 선생님께 번역 의뢰, 정리하였기에 이제 소개해 올립니다.
가. 荷潭公 諱 時讓 親筆 書札(2)-수신자 미상
1)발견일 : 2002. 4. 2)발견자 : 金恒鏞
3)소장처 : 국사편찬위원회 4)번역인 : 金益洙
5)潤文人 : 金恒鏞
나. 한문 원문
前奉一書未知得達否. 三嶺把守 乃是都檢察傳令意是. 朝廷指揮一意奉行而重爲, 體府所責惶恐犯罪. 至於夫馬整然, 差員差令亦承體府傳令, 及從事文移屬之. 而似蒼黃失措被責, 卽爲停罷耳. 絡遠地絶不得信體. 體府意旨事事失宜動, 被讓責亦極問竭. 凡干分朝處盈幸. 詳覽告便得周旋如何之非. 兄相愛之至老, 安聽如是 . 謹拜上狀.
丁卯二月十一日 時讓
다. 번역문
전에 보낸 한 통의 편지는 잘 도착했는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삼령(三嶺)을 파수한다는 것은 바로 모든 것을 샅샅히 살펴 전령대로 한다는 뜻이옵니다. 조정에서 지휘한 모든 뜻대로 봉행하고 또한 거듭 하였습니다마는 체찰부의 책임에 있어 죄를 범하지나 않았나 황공하기만 합니다.
부역마(夫役馬)에 이르기까지 질서정연하였으며, 관원을 임명하고 사령을 임명하는 것 역시 체찰부의 전령대로 따랐으며, 종사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문서에 있는 대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마 바쁜 나머지 잘못 처리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책임을 지게 되면 즉시 정직(停職)되거나 파면될 뿐입니다. 먼 곳이라 연락이 끊겨 체찰부의 소식을 들을 수 없습니다. 체찰부에서 왕지(王旨)를 받드는 뜻이 일마다 잘못되면 의당 소동이 날 것이고, 시양(時讓)에게 책임을 지우면 또한 엄한 문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조정의 조처에 간여하여 분별해주시면 큰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만…….
아뢰는 말씀을 자세히 살피시어 어떠한 것이 잘못되었는지 주선해 주시기 바랍니다.
형과 늙도록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이와 같이 걱정스러운 말씀을 들려 드리게 되었는지 야속하옵니다.
삼가 글월을 올리나이다.
정묘 (丁卯. 인조5년. 1627. 공 47세). 2월 21일 시양(時讓)
*주 : 1627년은 공이 경상도 관찰사에 부임한 지 2년 째 되는 해임..
<하담공 김시양 선조님 낙관(칼러판) 소개>
1, 출전 : <槿域印藪>(국회도서관 간. 1968. 313P)
2. 조사일 : 2002. 7. 19
▣ 김항용 -
▣ 김태서 -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
22.충익공 荷潭 金時讓1581(선조 14)∼1643(인조 21)
디지털한국학
김시양(金時讓)
1581(선조 14)∼1643(인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仲), 호는 하담(荷潭). 아버지는 비안현감 ★인갑(仁甲)이다.
1605년(선조 3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1607년 주서(注書)가 되고 1609년(광해군 1)에 예조좌랑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으며, 1610년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에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가 되었는데, 향시에 출제한 시제가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한 것이라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 영해(寧海)로 이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예조정랑·병조정랑·수찬·교리를 역임,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625년(인조 3) 응교가 되어 문학을 겸하였고, 이듬해에는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산릉역(山陵役)에 공로가 많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날 징후가 보이자 평안도관찰사 겸 체찰부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묘의(廟議)에 따라 도원수와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그러나 왕의 뜻을 어기고 척화를 주장하여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34년 지중추부사에 서용(敍用)되고 한성판윤을 거쳐 호조판서 겸 동지춘추·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이 되었다가 9월에 재차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였고, 1636년 청백리에 뽑혀 숭록계(崇祿階)에 올랐으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으나 눈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인 충주로 내려갔다.
1641년 《선조실록》을 개수할 때 대제학 ★이식(李植)과 총재관(摠裁官) ★홍서봉(洪瑞鳳) 등의 추천으로 다시 판중추부사 겸 춘추관사를 제수받았으나 지병인 안질로 실록개수역(實錄改修役)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전적(典籍)과 경사(經史)에 밝았다.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하담파적록 荷潭破寂錄》·《하담집》·《부계기문 #부33溪記聞》 등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李章熙
*김시양 필적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시양필적
1581(선조 14)-1643(인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청백리에 뽑혀 숭록대부에 올랐으며, 전적과 경사에 밝았다. 저서로는 ≪하담파적록≫ 등이 있다. 글씨는 ≪근묵≫에서.
하담공(김시양) 친필 서찰 번역 정리
<하담공(金時讓) 친필 해석문>
인터넷 <디지털 한국학>에 있는 하담공 친필 서찰을 아래와 같이 번역, 정리하였기에 공개합니다.
삼가 보냅니다.
박대관 학사가 함평(咸平)에 부임토록 임용했는데, 진퇴에 서로 다투므로 신(臣)은 가만히 좌우의 눈치를 보면서 상감께 상주하였던 것입니다.
상감께서는 백성을 걱정하시어 반열이 하는 대로 하지 않음을 어찌 짐작이나 하였습니까.
밝은 시절의 언로에는 옛날에는 관(官)에 망령되이 간언하면 오직 죄가 됨을 알 뿐 입니다.
길은 차현(車峴)령 지나 집은 어디 있는가
성은 넓은 바다를 베개 삼고 머리는 반백이 되어
푸른 하늘이 약물(藥物)을 전한다는 말 들으니
남 다른 은혜 오히려 스스로 평안하기를 바랄 뿐이오.
천계 을축 (인조3년. 1625)
하담(荷潭) 낙망자(樂忘子) 씀
김항용
국사편찬위원회 홈
新安世寶(02) s2003-18古書 集部 尺牘類
사자 2003
20(40), 초서, 한문
諸賢手簡 2
소장:全北 全州府 玄俊鎬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賢儒로 일컬어지던 白振南(1564∼1618), 玄德升(1564∼?), 成輅(1550∼1616), 姜沆(1567∼1618), 梁山璹(1561∼1593), 朴東亮(1569∼1635), 金尙憲, 鄭蘊, 尹煌, 安邦俊, 洪, 金時讓, 李植, 金地粹의 서간과 明文 등 필적.
충익공(김시양) 친필 서찰(2) 번역문 소개
*지난 4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견한 충익공(휘 時讓. 제학공파) 선조님의 친필 서찰을 우리 문중의 한학자이신 김익수(제학공파. 제주도 문화재위원) 선생님께 번역 의뢰, 정리하였기에 이제 소개해 올립니다.
가. 荷潭公 諱 時讓 親筆 書札(2)-수신자 미상
1)발견일 : 2002. 4. 2)발견자 : 金恒鏞
3)소장처 : 국사편찬위원회 4)번역인 : 金益洙
5)潤文人 : 金恒鏞
나. 한문 원문
前奉一書未知得達否. 三嶺把守 乃是都檢察傳令意是. 朝廷指揮一意奉行而重爲, 體府所責惶恐犯罪. 至於夫馬整然, 差員差令亦承體府傳令, 及從事文移屬之. 而似蒼黃失措被責, 卽爲停罷耳. 絡遠地絶不得信體. 體府意旨事事失宜動, 被讓責亦極問竭. 凡干分朝處盈幸. 詳覽告便得周旋如何之非. 兄相愛之至老, 安聽如是 . 謹拜上狀.
丁卯二月十一日 時讓
다. 번역문
전에 보낸 한 통의 편지는 잘 도착했는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삼령(三嶺)을 파수한다는 것은 바로 모든 것을 샅샅히 살펴 전령대로 한다는 뜻이옵니다. 조정에서 지휘한 모든 뜻대로 봉행하고 또한 거듭 하였습니다마는 체찰부의 책임에 있어 죄를 범하지나 않았나 황공하기만 합니다.
부역마(夫役馬)에 이르기까지 질서정연하였으며, 관원을 임명하고 사령을 임명하는 것 역시 체찰부의 전령대로 따랐으며, 종사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문서에 있는 대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마 바쁜 나머지 잘못 처리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책임을 지게 되면 즉시 정직(停職)되거나 파면될 뿐입니다. 먼 곳이라 연락이 끊겨 체찰부의 소식을 들을 수 없습니다. 체찰부에서 왕지(王旨)를 받드는 뜻이 일마다 잘못되면 의당 소동이 날 것이고, 시양(時讓)에게 책임을 지우면 또한 엄한 문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조정의 조처에 간여하여 분별해주시면 큰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만…….
아뢰는 말씀을 자세히 살피시어 어떠한 것이 잘못되었는지 주선해 주시기 바랍니다.
형과 늙도록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이와 같이 걱정스러운 말씀을 들려 드리게 되었는지 야속하옵니다.
삼가 글월을 올리나이다.
정묘 (丁卯. 인조5년. 1627. 공 47세). 2월 21일 시양(時讓)
*주 : 1627년은 공이 경상도 관찰사에 부임한 지 2년 째 되는 해임..
<하담공 김시양 선조님 낙관(칼러판) 소개>
1, 출전 : <槿域印藪>(국회도서관 간. 1968. 313P)
2. 조사일 : 2002. 7. 19
▣ 김항용 -
▣ 김태서 -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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