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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천년에 생각해 보는 한국인의 성씨 (자료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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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미 작성일02-10-05 15:28 조회1,9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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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千年에 생각해 보는 韓國人의 姓氏
‘同音異姓’이 60%를 넘고, ‘歸化姓氏’가 많아진다



崔 德 敎
創造社 代表

우리 민족의 성은 고구려 때부터

우리 民族이 古代 部族社會 때부터 姓을 사용한 것처럼 기록은 되어 있으나, 그것은 後世의 사람들이 그처럼 꾸몄을 뿐이지 그 實相은 中國文化가 들어온 후부터의 일이다.

申奭鎬(신석호 1904∼1981, 국사학자)의 〈韓國姓氏의 槪說〉(《韓國姓氏大觀》, 1971 創造社)에 보면,

“新羅는 제23대 法興王(법흥왕 514∼540)에 해당하는 임금을, 《梁書(양서)》·《南史(남사)》·《通典(통전)》등에 ‘성은 募(모), 이름은 秦(진)’으로 기록하여 新羅王室의 성을 ‘募氏’로 나타냈다. 그리고 《北齊書(북제서)》에 眞興王(진흥왕)을 金眞興, 眞平王(진평왕)을 金眞平으로 기록했으니 비로소 ‘金氏’가 보이게 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高句麗는 長壽王(장수왕 413∼491) 때부터 중국에 보내는 國書(국서)에 ‘高氏’로 표시하고, 百濟는 近肖古王(근초고왕 346∼375) 때부터 ‘餘氏’로 표시하다가 武王(무왕 600∼641) 때부터 ‘扶餘氏’로 고친 듯 하며, 新羅는 眞興王(540∼576) 때부터 ‘金氏’를 사용한 듯하다.” (다만 高句麗는 3국 중에서 가장 먼저 나라를 세우고 중국과 왕래했으므로 長壽王 이전부터 성을 쓴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三國史記》에 있는 人名을 살펴보아도 百濟는 近肖古王, 新羅는 眞興王 이전에 姓을 쓴 사람은 없다. 또 서울의 北漢山(북한산, 경남의 昌寧(창녕), 함흥의 黃草嶺(황초령) 및 利原(이원)의 摩雲嶺(마운령)에 남아 있는 眞興王의 巡狩碑(순수비)와 眞平王 때에 세워진 경주의 南山新城(신성)비, 그리고 眞智王(진지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구의 戊戌塢作(무술오작)비 등, 신라통일 이전의 비문에서는 姓은 없고, 거주지를 나타내는 本(본 : 本貫본관)과 이름을 쓰고 그 밑에는 벼슬을 적었다. 이를테면, 북한산 비문에 있는 ‘沙喙(사훼) 屈丁次(굴정차) 奈末(내말)’을 보건대, 沙喙는 거주지, 屈丁次는 이름, 奈末은 벼슬을 나타낸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우리는 성보다 이름과 본을 먼저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新羅의 경우를 보면 金仁問(김인문 629∼694) 金志良(김지량) 등과 같이 使臣(사신)이 되어 唐(당)나라에 갔다 온 사람, 또 崔致遠(최치원 857∼?) 崔利貞(최이정) 朴啓業(박계업) 金淑貞(김숙정) 등과 같이 당나라에 유학한 사람, 또 張保皐(장보고, 寶高 ?∼846)와 같이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淸海鎭(청해진 : 지금의 莞島)大使가 되어, 동양의 制海權(제해권)을 잡고 당나라와 일본에 貿易(무역)을 한 사람들이 모두 성을 쓴 것이다.”

이대로 가면 ‘한글종씨’ 판이 된다

우리의 姓은 이처럼 천수백년 전부터 민족의 血脈과 함께 이어져오면서 漢字로만 表記되어 왔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 한글로만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한글宗氏(종씨)’가 걷잡을 수 없이 많아지고 우리의 姓氏文化는 본디의 모습을 잃으면서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宗氏란 同姓同本으로서 計寸하지 않는 겨레에 대한 呼稱인데, 이 ‘한글종씨’란 漢字는 다르지만 한글로는 소리값이 같은 同音異姓을 가리키는 말로서 근래의 유행어이다.)

1960년 인구조사에서 集計(집계)된 258姓 중에는 60퍼센트가 넘는 159姓이 同音異姓(동음이성)으로 되어 있으니,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 159姓을 가나다 순대로 음을 적고 괄호 안에 漢字로 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강(姜 康 强 彊 剛)씨, 견(堅 甄)씨, 경(慶 景)씨, 공(孔 公)씨, 구(具 丘 邱)씨, 국(鞠 國 菊)씨, 기(奇 箕)씨, 내(乃 奈)씨, 노(盧 魯 路)씨, 뇌(雷 賴)씨, 단(段 單 端)씨, 도(都 道 陶)씨, 돈(頓 敦)씨, 마(馬 麻)씨, 모(牟 毛)씨, 반(潘 班)씨, 방(方 房 龐 邦 旁)씨, 범(范 凡)씨, 변(卞 邊)씨, 봉(奉 鳳)씨, 빈(賓 彬)씨, 사(史 謝 舍)씨, 서(徐 西)씨, 석(石 昔 碩)씨, 선(宣 先)씨, 설(薛 显)씨, 성(成 星)씨, 소(蘇 邵)씨, 수(洙 水)씨, 순(荀 舜 順 淳)씨, 승(承 昇)씨, 시(施 柴)씨, 신(申 辛 愼)씨, 양(梁 楊 襄 樑)씨, 여(呂 余 汝)씨, 연(延 連 燕)씨, 염(廉 濂 閻)씨, 옹(邕 雍)씨, 우(禹 于)씨, 운(雲 芸)씨, 원(元 袁)씨, 위(魏 韋)씨, 유(柳 劉 兪 庾)씨, 은(殷 恩)씨, 이(李 伊 異)씨, 임(林 任)씨, 장(張 蔣 章 莊)씨, 전(全 田 錢)씨, 정(鄭 丁 程)씨, 조(趙 曺)씨, 종(鍾 宗)씨, 주(朱 周)씨, 지(池 智)씨, 진(陳 秦 晋 眞)씨, 창(昌 倉)씨, 채(蔡 采 菜)씨, 천(千 天)씨, 초(楚 肖)씨, 추(秋 鄒)씨, 편(片 扁)씨, 포(包 鮑)씨, 하(河 夏)씨, 한(韓 漢)씨, 호(扈 胡)씨 등인데 한글로 적어서는 분간을 할 수 없다. 이 경우 漢字는 밝히지 않고 한글로만 쓰도록 내버려두면, 머지 않아 뿌리를 잃어버린〈한글종씨〉판이 되고 만다.

또 複姓(복성)인 경우도 한글로만 쓰면 남궁(南宮)씨는 남(南)씨와, 동방(東方)씨는 동(董)씨와, 사공(司空)씨는 사(史) 사(謝) 사(舍)씨와, 서문(西門)씨는 서(徐) 서(西)씨와, 선우(鮮于)씨는 선(宣) 선(先)씨와, 제갈(諸葛)씨는 제(諸)씨와, 황보(皇甫)씨는 황(黃)씨와 헷갈리기 쉬운 성씨이다.

이를테면 皇甫氏의 경우, TV드라마 《王과 妃》에 황보인 대감이 등장했을 때, 일부 시청자들에게 그의 성씨를 물어보았더니, 거의가 성은 황씨로 이름은 보인줄 알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의 성은 황보(皇甫)요 이름은 인(仁)이고 보면, 이는 漢字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넌센스라 하겠다. 그러나 그저 웃어버리기에는 우리 문화의 큰 부분이 없어지는 것 같아 서글프고 안타깝다.

전체 258姓 중 음으로 헷갈리지 않는 성은, 賈(가) 簡(간) 葛(갈) 甘(감) 介(개) 桂(계) 高(고) 曲(곡) 郭(곽) 君(군) 弓(궁) 塧(궉) 權(권) 斤(근) 琴(금) 吉(길) 金(김) 羅(나) 南(남) 浪(낭) 唐(당) 大(대) 董(동) 杜(두) 萬(만) 梅(매) 孟(맹) 明(명) 睦(목) 墨(묵) 文(문) 米(미) 閔(민) 朴(박) 裵(배) 白(백) 卜(복) 夫(부) 丕(비) 撚(빙) 森(삼) 尙(상) 葉(섭) 孫(손) 宋(송) 沈(심), 阿(아) 安(안) 艾(애) 夜(야) 魚(어) 嚴(엄) 永(영) 芮(예) 吳(오) 玉(옥) 溫(온) 王(왕) 姚(요) 龍(용) 陸(육) 尹(윤) 陰(음) 應(응) 印(인) 慈(자) 占(점) 諸(제) 左(좌) 俊(준) 車(차) 崔(최) 卓(탁) 彈(탄) 太(태) 判(판) 彭(팽) 平(평) 表(표) 馮(풍) 皮(피) 弼(필) 咸(함) 海(해) 許(허) 玄(현) 邢(형) 洪(홍) 化(화) 黃(황) 后(후) 獨孤(독고)氏 등 92姓이다.

지금 세계적으로 볼 때 先進國에서는 모두 ‘성과 이름’을 쓰고 있다. 그런데 미얀마나 인도네시아같은 나라에서는 성은 없고 이름만 쓴다. 이를테면, 미얀마인으로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우·탄트’의 ‘우’는 성이 아니고 지위가 높은 이에게 붙이는 敬稱(경칭)이다. 또 인도네시아의 전 대통령 ‘스카르노’와 ‘수하르토’는 성이 없는 이름일 뿐이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新生國에서는 근자에 성을 갖는 創姓(창성)운동이 일고 있다는 이야기들이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 성씨’는 저마다의 淵源(연원)과 來歷(내력)을 가지고 오랜 세월 連綿(연면)히 이어져 왔고, 그 수효와 인구가 정확하게 드러나 있다. 현재 漢字로 姓을 쓰는 나라는 韓國·中國·日本 등인데, 중국인의 성씨는 5,600여개(《中國姓氏大全》, 1987 北京出版社)이고, 일본인의 성씨는 그 독특한 제도 때문에 정확한 통계는 낼 수 없고, “약 8만개에서 10만개, 또는 약 6만개로 推算(추산)하는 학자도 있다”(丹羽基二 著《姓氏》, 1970 秋田書店)고 한다. 여기서 생각할 일은 이 두 나라는 성씨를 漢字로 쓰는데 우리만 한글로 쓰면 어떻게 될까? 한글종씨는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마이너스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닐 터이고, 세계에서 가장 잘 정돈되어 있는 우리 姓氏文化는 뒤죽박죽이 되고 말 것이다.

수시로 생기는 ‘귀화성씨’의 추세

韓國人의 姓氏는 258姓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1975년 인구 조사에서는 影(영)氏와 松(송)氏가 새로 나타났고,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960년에 있었던 濂(염) 碩(석) 先(선) 閻(염) 恩(은) 應(응) 鮑(포) 旁(방)氏 등 8姓은 없어지고, 苗(묘) 秏(학) 橋(교) 傅(부) 潭(담) 榮(영) 齊(제) 欒(난) 候(후) 梒(집) 鎬(호) 桓(환) 頭(두) 樓(누) 邸(저) 初(초) 椿(춘) 興(흥)氏 등과, 複姓으로 魚金(어금) 網切(망절) 岡田(강전) 長谷(장곡) 小峰(소봉)氏 등 23姓이 새로 생겨나서 275姓으로 기록되었다. (여기서 ‘없어지고’라고 한 것은 실제로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조사 때에 빠진 것인지? 함부로 ‘없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또 梒은 본디 일본글자인데 ‘네거리 십’으로 읽지만, 성명일 경우에는 ‘성 집’으로 읽는다.)

이 새로 등장한 성씨들은 近年에 주로 일본인 중국인들이 우리나라에 歸化(귀화)하면서 얻은 것으로 보면 된다. 이러한 귀화성씨의 증가 趨勢(추세)는 1975년 이전보다 그 이후, 말하자면 國際交流(국제교류)가 성해지면서 顯著(현저)하게 많아지고, 장차 우리 성씨의 수효에 큰 변화를 豫測(예측)하게 한다.

우리의 귀화성씨는 근년에 생긴 것이 아니고 먼 옛날부터 있어 왔다. 몇몇집 族譜를 보면 중국 고대국가인 夏(하)·殷(은)·漢(한)代에서 귀화한 것으로 된 성씨도 있다. 하지만 좀더 史實的인 것은 唐나라 때부터 많이 왔고, 고려시대에는 宋(송)·元(원)을 비롯하여 여진(女眞 : 滿洲)·거란(契丹)·베트남(安南)·몽골(蒙古)·위구르(回噦)·아랍(回回)사람들까지 들어왔으며, 조선시대에는 明(명)·淸(청)사람과 일본인이 귀화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李勝羽(이승우) 著(저)《韓國人의 姓氏》(1977, 創造社)에 보면, 각종 文獻(문헌)과 족보에 나타나 있는 귀화성씨를 網羅(망라)하여 여덟 系統으로 大別하고 각 성씨의 내력까지를 기술했는데, 여기서는 그 계통과 성씨만 옮겨본다.

1) 중국계 : 文化柳氏, 延安車氏, 淸州韓氏, 幸州奇氏, 太原鮮于氏, 咸悅南宮氏, 泰仁景氏, 平海·長水·昌原·懷德黃氏, 平海丘氏, 南陽洪氏(唐洪), 延安李氏, 豊基秦氏, 沃川陸氏, 江陵咸氏, 江陵·居昌劉氏, 溫陽·尙州方氏, 昌原·羅州丁氏, 光州·交河·豊川 등 盧氏, 英陽·宜寧·固城南氏, 咸陽·星州呂氏, 南陽房氏, 南陽·礪山·恩津·瑞山宋氏, 平澤林氏, 廣州·順興·竹山安氏, 草溪周氏, 幸州殷氏, 寧越嚴氏, 靈山·寧越辛氏, 宜寧玉氏, 金浦公氏, 沔川卜氏, 南原獨孤氏, 南陽諸葛氏, 孝靈司空氏, 永川皇甫氏, 白川·林川·平壤趙氏, 瑞山鄭氏, 固城李氏, 居昌愼氏, 咸從魚氏, 玄風郭氏, 潭陽鞠氏, 居昌章氏, 咸平牟氏, 達城夏氏, 達城賓氏, 公村葉氏, 杜陵杜氏, 牙山胡氏, 新安朱氏, 忠州池氏, 海州吳氏, 驪陽·興德·廣東陳氏, 宜寧余氏, 長淵·黃州·原州邊氏, 密陽唐氏, 淸州楊氏, 豊川任氏, 曲阜孔氏, 開城·太原龐氏, 開城路氏, 濟州左氏, 谷山延氏, 洪川皮氏, 聞慶錢氏, 商山李氏, 牙山蔣氏, 安陰西門氏, 遂安桂氏, 寶城宣氏, 西蜀明氏, 昌平昇氏, 靑州史氏, 潁陽千氏, 浙江片氏, 忠州梅氏, 江華萬氏, 蘇州賈氏, 廣川董氏, 浙江彭氏, 星州施氏, 陜川麻氏, 淮陽李氏, 巴陵胡氏, 星州楚氏, 揚州浪氏, 臨埇馮氏, 龍宮曲氏, 河南程氏, 禮山連氏, 金海海氏, 廣州毛氏, 太原伊氏, 大邱彬氏, 安康邵氏, 淮陽后氏, 徽州姚氏, 晉州謝氏, 谷城撚氏 (이상의 배열은 대체로 귀화한 시대순이다.)

2) 渤海(발해)계 : 永順太氏,

3) 몽골계 : 延安印氏, 濟州肖氏,

4) 위구르계 : 慶州显氏,

5) 아라비아계 : 德水張氏,

6) 만주계 : 靑海李氏, 遼陽慈氏, 遼東墨氏,

7) 베트남계 : 花山李氏,

8) 일본계 : 賜姓(사성) 金海金氏 등,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중국계는 100가지 성인데, 나머지는 손꼽을 정도이다.

이들 歸化人들은 대개 그 世譜(세보)에 始祖로 기록되었고, 후손 중에는 王妃(왕비)·國舅(국구)·政丞(정승)·判書(판서)·功臣(공신)을 비롯하여 學者(학자)·文士(문사)·武人(무인)으로 이름을 떨친 이가 적지 않다. 지금도 그 후손들은 귀화시조를 자랑스럽게 받들며 繁盛(번성)하는 집안이 많다.

우리는 흔히 單一民族이라고 내세우지마는, 알고보면 이처럼 오랜 세월을 두고 여러 갈래에서 異(이)민족의 피가 들어와 同化(동화)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앞으로의 세상은 世界化시대이니만큼, 온 世界人들이 한국을 드나들게 되고 귀화하는 사람도 많아지고, 그렇게 되면 우리 성씨는 숫적으로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1976년에서 1985년, 10년 사이에 23성이 증가되었다는 추세로만 보아도, 지금은 300성이 넘을 것이고 100년 후에는 500성이 아닌 1,000성을 뛰어 넘을지도 모른다.

우리 성씨는 옛부터 조사 집계되었다

우리 성씨를 집계한 문헌은 여러가지가 있지마는, 그중 조선 成宗(성종 1457∼1494) 때 王命에 따라 盧思愼(노사신) 등이 엮은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에는 277성, 英祖(영조 1694∼1776) 때 李宜顯(이의현)이 지은 《陶谷叢說(도곡총설)》에는 298성, 또 1908년에 나온 《增補文獻備考(증보문헌비고)》에는 496성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옛문헌에 있는 것을 모조리 넣었기 때문이다.

근년에 와서 우리 성씨를 조사 통계한 것은 1930년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가 실시한 國勢(국세)조사에서 250성을 집계했고, 1960년에 258성, 1975년에 260성, 1985년에 275성 등 네차례로 인구센서스 때마다 했을 뿐 그후에는 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1930년에는 ‘姓과 本貫, 同族部落’까지 아울러 조사 통계했는데, 이를테면 咸鏡南道 咸州郡 興南邑 天機里 全州李氏 61戶, 慶州金氏 32戶, 全州金氏 23戶, 金海金氏 16戶, 淸州韓氏 36戶, 密陽朴氏 30戶 등으로 되어있으며, 이는 모두 漢字로 표기했다. 그리고 1960년·1975년에는 ‘姓’만 조사하여 漢字로 표기했고, 1985년에는 ‘성과 본관’을 조사하여 성은 漢字로, 본관은 한글로 표기했다.

1985년의 ‘인구 및 주택 센서스’ 조사자료를 모아 발행한 《한국인의 성씨 및 본관 조사보고》(1988,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에서 보면, 275姓은 漢字로 나타냈고 3,349개의 본관은 한글로 되어 있으니, 고성(固城)과 고성(高城), 광주(光州)와 광주(廣州), 순천(順天)과 순천(順川) 등의 지명은 구별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 본관은 성씨의 발상지인 중국에서도 쓰지 않은 것으로, 本·貫·本貫·貫鄕(관향)·鄕貫(향관)·貫籍(관적)·氏貫(씨관)·族本(족본) 등 여러 가지로 불리면서, 고향과 血族을 더 분명히 하고 싶어서 우리만이 써온 固有한 것인데, 이 본관을 漢字로 표기하지 않았으니 이제 ‘우리 본관’은 무너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무렵부터 필자는 안타까운 나머지, 관계부처의 담당하는 이에게 “왜 본관을 漢字로 쓰지 않았느냐?”고, 그리고 그후의 인구조사에서 “왜 성씨 통계를 하지 않느냐?”고 몇차례 물어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대답하는 이도 안타까운 듯, “漢字를 쓸 수 있는 조사요원이 없기 때문에 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우리 성씨의 수효라도 통계하는 기관이 없는가 하고 알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주민등록증’을 보면 성명을 漢字로 병기해 놓았으니, 이것만 집계하면 우리 성씨의 수효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성씨별 인구 현황과 앞으로의 추세

앞의 책 《한국인의 성씨 및 본관 조사보고》에는 1985년 11월 1일 총인구 4,041만9,652명으로 집계되었다. 그중 인구 100만명 이상의 성은 金 李 朴 崔 鄭씨 등 ‘5大姓’인데 그 내역은 이렇다.

1) 金氏는 878만5,341명으로, 그중 金海金氏① 3,767,065명·金海金氏② 125,277명, 慶州金氏 1,523,469명, 光山金氏 750,702명, 金寧金氏 424,336명, 安東金氏(구) 398,245명·安東金氏(신) 21,554명, ……〈하략〉 2) 李氏는 598만5,056명으로, 그중 全州李氏 2,379,537명, 慶州李氏 1,217,280명, 星州李氏 153,146명, 廣州李氏 141,831명, 延安李氏 126,565명, ……〈하략〉 3) 朴氏는 343만5,858명으로, 그중 密陽朴氏 2,704,819명, 潘南朴氏 118,847명, 咸陽朴氏 103,220명, 順天朴氏 75,888명, 務安朴氏 64,698명, ……〈하략〉 4) 崔氏는 191만3,329명으로 그중 慶州崔氏 876,732명, 全州崔氏 342,849명, 海州崔氏 161,782명, 江陵崔氏 132,300명, 耽津崔氏 61,841명, ……〈하략〉 5) 鄭氏는 178만734명으로, 그중 東萊鄭氏 414,785명, 慶州鄭氏 300,808명, 延日鄭氏 237,219명, 晋陽(晋州)鄭氏 231,289명, 河東鄭氏 142,418명, ……〈하략〉 등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보건대, 金氏는 878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21%(강), 李氏는 598만명으로 15%(약)을 차지하여 金氏와 李氏가 전국민의 36%, 3명에 1명꼴이 넘는다. 그야말로 “남산에서 돌 던지면 김씨 아니면 이씨가 맞는다”는 옛말은 그대로 실감이 난다. 거기에다 朴氏 343만명, 崔氏 191만명, 鄭氏 178만명을 합치면 5대성이 2,190만명으로 54%를 차지한다.

또 1960년 12월 1일 현재의 金氏 544만명, 李氏 371만명, 朴氏 211만명, 崔氏 119만명, 鄭氏 109만명이었던 것과 1985년 11월 1일 현재와 비교해 보면, 25년간에 김씨는 334만명, 李氏는 227만명, 朴氏는 132만명, 崔氏는 72만명, 鄭氏는 69만명 등으로 증가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추세라면 金氏는 2000년 현재에 이미 1,000만명을 넘어섰고, 金海金氏는 500만명이 다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증가 현상이 지속된다면, 장차 金氏와 李氏가 전국민의 3명중의 1명이 아닌 2명중의 1명이 안된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그렇게 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면 同名異人은 엄청나게 많아질 것이고, 지금으로서는 얼른 가늠할 수도 없는 일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앞에서 본 ‘5대성의 내역’ 중에 金海金氏①은 누구나 다 아는 首露(수로)왕계이고, ②는 賜姓(사성) 金海金氏, 즉 壬辰倭亂(임진왜란, 1592)때 귀화한 일본인 沙也可(사야가)의 후손이다. 그는 가또(加藤淸正)의 先鋒將(선봉장)으로 군사 3천을 거느리고 내침했으나, 경상도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 朴晋(박진)에게 귀순하여 귀화했다. 그때 국왕(宣祖)으로부터 金忠善이란 성명을 하사받고 金海로 賜籍(사적)되었다. 그는 丁酉再亂(정유재란 1597)·丁卯胡亂(정묘호란 1627)에도 공을 세워 말년에 벼슬이 正憲大夫(정헌대부) 知中樞府事(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대구 근방인 友鹿(우록)동에서 살다가 72세에 죽었다. 그래서 이 金海金氏를 友鹿金氏라고도 한다. 그는 晋州(진주)목사 張春點의 딸과 혼인하여 5남1녀를 두었는데, 그 자손이 번성하여 12만명이 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 安東金氏 (구)·(신)은 舊安東·新安東을 나타내는 표시이다.

다음에는 각 姓氏의 인구 현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성씨의 배열은 인구순이며, 구분은 편의하게 임의로 했다.)

△ 100만명 이하 10만명까지는 46성인데 인구는 1,647만1,165명으로 그 내역은,

姜(958,181) 趙(877,058) 尹(834,121) 張(810,235) 林(672,782) 韓(628,396) 申(620,983) 吳(619,774) 徐(611,206) 權(567,990) 黃(564,292) 宋(557,193) 安(556,429) 柳(509,127) 洪(457,583) 全(430,059) 高(384,061) 文(375,866) 孫(368,744) 梁(344,209) 裵(323,031) 白(309,578) 曺(304,837) 許(264,238) 南(222,269) 沈(219,741) 劉(218,449) 盧(196,285) 河(184,651) 兪(168,082) 丁(165,382) 成(163,565) 郭(163,433) 車(159,680) 具(157,683) 禹(155,471) 朱(153,508) 羅(150,012) 任(147,700) 田(146,664) 閔(141,429) 辛(137,874) 池(125,648) 陳(123,092) 嚴(116,039) 元(104,535)씨 등이다.

△ 10만명 이하 1만명까지는 53성인데, 인구는 180만8,825명으로 그 내역은,

蔡(97,650) 千(97,419) 楊(81,589) 方(81,469) 孔(72,388) 玄(72,164) 康(69,820) 咸(65,193) 卞(64,147) 廉(54,533) 魯(54,477) 邊(50,380) 呂(48,965) 秋(48,643) 都(46,528) 愼(40,772) 石(40,390) 蘇(39,728) 薛(34,264) 宣(33,718) 周(33,222) 吉(30,932) 馬(30,865) 延(27,940) 表(24,570) 魏(24,259) 明(23,380) 奇(22,706) 房(22,539) 潘(21,553) 王(20,378) 琴(20,361) 玉(20,196) 陸(18,841) 印(18,281) 孟(17,648) 諸(17,394) 卓(16,943) 秦(16,445) 南宮(16, 228) 蔣(16,107) 牟(16,046) 鞠(15,562) 魚(15,351) 余(14,763) 殷(13,693) 片(13,306) 龍(12,323) 芮(10,969) 丘(10,890) 奉(10,547) 庾(10,281) 慶(10,069)씨 등이다.

△ 1만명 이하 1천명까지는 53성인데 인구는 20만9,741명으로 그 내역은,

程(9,244) 晋(8,696) 史(8,666) 夫(8,565) 皇甫(8,541) 昔(7,964) 賈(7,894) 太(7,406) 卜(7,377) 睦(7,089) 桂(5,946) 皮(5,440) 邢(5,430) 菜(5,250) 杜(5,077) 智(5,029) 甘(5,020) 董(4,645) 陰(4,532) 溫(4,396) 章(4,329) 景(3,691) 司空(3,656) 諸葛(3,652) 扈(3,531) 左(3,046) 鮮于(3,036) 葛(3,024) 范(3,018) 夏(2,866) 錢(2,748) 賓(2,649) 彭(2,471) 西門(2,338) 邵(2,305) 承(2,298) 施(2,204) 尙(2,117) 簡(2,076) 化(1,990) 显(1,957) 公(1,884) 疆(1,863) 彬(1,857) 柴(1,538) 韋(1,528) 眞(1,511) 胡(1,490) 路(1,486) 于(1,381) 班(1,364) 天(1,351) 段(1,279)씨 등이다.

△ 1천명 이하 1백명까지는 66성인데 인구는 2만6,516명으로 그 내역은,

甄(990) 國(984) 荀(972) 陶(946) 唐(933) 强(901) 毛(875) 邦(829) 龐(794) 昌(792) 邕(698) 獨孤(695) 平(648) 昇(645) 鍾(621) 葉(604) 墨(567) 麻(527) 弓(521) 大(499) 撚(464) 道(459) 堅(452) 斤(450) 馮(449) 箕(427) 袁(424) 連(400) 永(359) 異(359) 浪(328) 漢(326) 乃(311) 莊(310) 阿(302) 萬(282) 采(275) 海(270) 倉(258) 伊(249) 塧(244) 判(238) 包(238) 楚(232) 梅(230) 姚(229) 舜(215) 弼(209) 占(198) 鳳(179) 東方(176) 介(165) 米(156) 凡(154) 俊(154) 邱(139) 夜(137) 慈(136) 宗(133) 松(116) 水(113) 雲(112) 菊(107) 雷(106) 燕(105) 樑(100)씨 등이다.

△ 1백명 이하 1명까지는 52성인데 인구는 1,061명으로 그 내역은,

頓(79) 彈(78) 雍(69) 西(68) 肖(68) 君(62) 曲(61) 汝(47) 洙(44) 淳(35) 舍(34) 森(33) 艾(30) 奈(26) 芸(23) 星(20) 扁(20) 后(18) 謝(17) 單(16) 襄(16) 剛(15) 苗(15) 丕(15) 順(14) 魚金(14) 秏(14) 橋(12) 傅(10) 鄒(10) 端(9) 譚(8) 榮(8) 敦(6) 齊(6) 欒(5) 網切(5) 影(5) 候(5) 梒(4) 鎬(3) 桓(3) 頭(2) 岡田(1) 賴(1) 樓(1) 長谷(1) 邸(1) 小峰(1) 初(1) 椿(1) 興(1)씨 등이다. (앞의 각항 숫자에다 ‘기타 1,842명과 미상 184명’을 더하면 총인구 4,041만9,652명이 된다. 여기까지의 숫자는 모두 南韓에 국한된 것이고, 北韓의 자료가 드러나면 여러 가지 변수가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인구 1만명까지의 104성이 4,018만308명으로 총인구의 99.4%를 차지하고, 1만 이하의 171성이 23만7,318만명으로 0.6%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100명 이하의 52성은 겨우 1,061명이다. 앞으로 귀화성씨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이 100명 이하의 성에 몰리게 되어 있다. 반면에 ‘5대성’의 증가 추세는 엄청날 것임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104대 171의 비율은 장차 더 심화되는 양상을 보일 것이다. 가령 성씨의 수효가 500이 되었을 때는 약 100대 400, 또 1,000이 되었을 때는 약 100대 900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게 상상되는 일이다.

이상에서 제시한 우리 성씨의 현실문제를 1) 漢字 표기를 지키는 일, 2) 1천만명이 넘는 金氏를 비롯한 ‘5대성’의 인구 膨脹(팽창), 3) 예상외로 많아질 歸化姓氏의 수효 등으로 꼽는다면, ―― 여기에서 다시 千年으로 이어지는 우리 姓氏文化의 앞날을 위하여 21세기다운 새로운 지혜가 나와야겠다. 社會學的인 觀點에서, 民族傳統의 次元에서, 行政實務의 立場에서 논의되고 연구되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崔 德 敎 (최 덕 교)

1952년 중·고등학생잡지《學園》편집, 이후 編輯長·主幹, 大入受驗誌《向學》主幹, 1957년 學園社版《大百科事典》(전6권) 編纂主幹, 1959년 學園社 副社長, 1960년《새나라신문》主幹, 이후《農園》·《主婦生活》編輯顧問, 《出版文化》 創刊 編輯委員, 《讀書新聞》 創刊 運營委員, 1963년 創造社 設立, 編著書《韓國姓氏大觀》, 《詩의 고향》 등, 현재 《잡지뉴스》에 〈한국잡지100년〉 連載 중.

           <출처: www.hanja-edu.com >




▣ 김재원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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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내영환 - 좋은 자료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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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wang10 -
▣ 김주회 - 정보미님! 대단한 정보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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