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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金在益 박사의 부인 李淳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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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10-14 04:56 조회1,6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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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金在益 박사의 부인 李淳子 교수



10월 10일자 조선일보에 고 김재익 박사 (안렴사공파) 부인 이순자 숙명여대 명예교수의 칼럼이 실려 있어 소개합니다.







(조선일보/사설칼럼)

[시론] ‘대한민국’과 ‘DPRK‘ ...... 李淳子 (2002.10.09)



21세기 현재 지구상에는 수많은 나라가 존재하고, 또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종족이 살고 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같은 민족이 갈라져 다른 나라를 세우고 살기도 하고, 여러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살기도 한다. 바람직한 일이건 아니건 현대사회의 국가란 민족집단과는 별개의 인공적인 사회 인프라의 가장 기본적인 틀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남한과 북한은 엄연히 독립된 두 개의 국가이다. 국시가 다르고 정치, 경제, 사회 체제가 다르고 따라서 국가의 우선순위나 국민의 생활방식, 사고방식이 다 다르다. 나라 이름도 다르고 국가의 상징인 국기도 다르다. 따라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분명히 두 개의 나라이다.



더구나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과 휴전 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시도 때도 없는 북측의 도발행위 때문에 북한은 우리에게 ‘주적 개념’을 한시도 늦출 수 없는 긴장관계를 유지해온 ‘외국’ 중에서도 가장 멀고 이해할 수 없는 ‘남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북한과의 회담이나 협상은 제대로 된 국제관례의 절차와 의전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식구들끼리 서로 죽일 듯이 싸우다가도 술 한잔 마시고 서로 어깨 두드리며 없던 일로 할 수 있는 것과는 달라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 이후 대북정책은 처음부터 ‘하나의 민족’만을 내세우고 대한민국의 국가로서의 권위를 훼손하고 국기를 흔드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책 없이 서두르는 무장해제는 국가의 안전마저 위협하고 있다.



김 대통령은 지난번 최초의 평양정상회담에서 공식수교의 선수작업을 무시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주권을 땅에 떨어뜨렸다. 반세기 동안 적대시하고 살아온 두 나라가 국교를 맺을 때 우선 지나온 일과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냉정하게 임해야 한다. 남북간에 그동안 쌓이고 쌓인 문제와 마음의 응어리를 국민이 납득할 수준으로나마 우선 정리했어야 한다. 적어도 납북된 국민의 현황파악, KAL기 폭파사건, 미얀마에서 일어난 고위공직자 테러사건, 최근의 서해교전 등의 대한민국을 위협한 큰 사건들에 대해서만이라도 김정일의 시인과 사죄는 물론, 앞으로의 약속 이행을 위한 계획 같은 것을 형식적으로라도 다짐받았어야 한다.



지난 달에 있었던 일·북 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총리의 당당하고 담담한 태도를 본 우리는 너무도 부러운 한편 우리나라가 창피스럽다는 생각을 금치 못했다. 우리가 북한에 당한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일을 가지고도 고이즈미 총리는 수교의 전제조건으로 따질 것은 따져서 주권 국가의 위신을 세우고 자국민의 이익을 보호하고 있지 않은가.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개막식부터 개최국인 대한민국은 아예 실종되었다.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 사용을 포기한 것은 현 정권이 우리나라의 독립된 주권을 포기한 사건이다. 공정한 경쟁을 해야 하는 공식 국제경기에서 두 개의 다른 국가 대표선수들이 어떻게 하나로 뒤엉켜서 입장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아무렇게나 급조된 것 같이 미적 감각이나 상징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한반도기를 공동으로 들고 흔들어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연히 우리는 태극기, 북한은 인공기를 각각 사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두 개의 국가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미 통일이 다 된 것으로 들떠서 “한 민족, 한 나라”를 외치기만 하면 진짜로 한 나라가 되는 것인가?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와 지불해야 하는 어마어마한 비용계산은 제쳐놓고 우선 잔치판을 벌여 놓고, 서로 끌어안고 춤춘다고 통일이 오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냉철하게 보지 못하는 것은 모든 비극의 시작이다. 남북의 두 정상은 동상(同床)도 아닌 데서 이몽(異夢)을 꾸고 있다. 한 쪽은 꿈속에서도 영악하고 뻔뻔하게 실리를 챙기고 있고 또 한쪽은 정신없이 끌려다니며 꿈속을 헤매고 있다. 김 대통령이 꿈을 깨고 김정일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는 한 통일의 날은 요원하기만 하다.



(이순자/ 숙명여대 명예교수·도서관학)











<시대의 선각자 김재익---이순자, 1998>

2. 김재익의 프로필



1938년 11월 26일 서울에서 부친 ★金應默과 모친 姜炳周 사이에서 9남매의 막내로 출생



그는 충남 연기군 전의읍 소정리 소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6.25는 그의 가정에 치명타를 입힌다. 아버지를 잃게 되고 형제들은 풍지박산된다.



서울대에서 강의를 하던 형과 당시에 대학에 다녔던 두 형들 모두 행방불명이 된다. 6.25는 모든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김재익의 가정에 유달리 가혹한 시련을 안겨 주었다.



김재익은 1938년 11월 26일 충남 연기군 전의면에서 부친 안동김씨 ★金應默과 모친 姜炳周와의 사이에 6남 3녀중 막내로 출생한다. 부친은 김재익의 어린 시절에 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서울로 이사온 김재익 형제들은 홀어머니의 양육을 받으며 어렵게 살았다. 가난 속에서도 김재익은 구김살 없이 밝은 웃음을 잃지 않으며 성장했다. 서울 삼청국민학교와 경기중고를 다닐 때 늘상 모범생이었다.



서울로 이사와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산다. 그래도 그는 밝고 명랑하고 구김살 없이 소년시절을 보낸다.



종교적으로는 독실한 가톨릭 가정이었다. 그의 누님 두 분이 수녀였다. 큰 누님 ★김재순은 수녀로서 성심여대 총장을 지냈고, 둘째 누님 ★김재숙은 성심수녀원 원장을 지냈다. 독실한 천주교인어어서 그랬는지 그는 성직자의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김재익은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60년 봄 당시 취직시험으론 가장 어렵다던 한국은행 공채시험에 당당 수석합격한다.



김재익은 한국은행에 재직중인 62년 봄 혜화동 성당에서 ★李淳子씨와 결혼, 그뒤 ★韓會(63년생), ★承會(71년생) 등 두 아들을 두었다.



이에 따라 김재익은 스탠포드로 ?겨가 본격적인 학구생활에 들어갔다. 부인 이순자도 하와이대에서 취득한 도서관학 석사학위를 인정받아 스탠포드대 도서관에 취직했다.



전 대통령은 김재익의 사람됨이나 경제이론 면에서 나라의 보배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문상차 미망인 李淳子 여사를 만났을 때 국보적 존재를 잃었다고 하면서 애도의 정을 표시하였다.



그가 얼마나 뛰어났으면 스탠포드대학에서 후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세미나 룸 하나를 김재익 룸으로 명명하였겠는가.











▣ 김항용 -

▣ 김발용 -

▣ 김태서 -

▣ 솔내영환 -

▣ 김재원 -

▣ 태영/문 -

▣ 김윤만 - 아웅산 테러사건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우리 가문과 국가적 대들보를 읺었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너무 큽니다.

▣ 김계응 -

▣ 김재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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