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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김주 --- 퇴계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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郡/김태영 작성일02-10-24 07:40 조회1,5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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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書堂): 호당 이라고도 하며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던 장소. 곧 독서당을 말함. 사가독서는 세종때 신숙주, 성삼문 등 장래가 촉망되는 유망한 학자들을 독서하게한 상사독서(上寺讀書)에서 비롯되어 세조와 연산군때는 일시 폐지 되었다가 중종때 다시 부활 되었다. 1507년 지금의 동대문 숭인동에 있는 정서원을 독서당으로 많들었다가 1517년에 두모포(豆毛浦)의 정자를 고쳐 동호독서당 이라고 하였다. 이로 부터 몇차례 옮기기는 하였으나 명칭 자체는 바뀌지 않고 임진왜란때까지 계속 독서의 장소및 도서관의 기능을 수행 하였다."옛날 용산사(龍山寺)를 성종조에 이르러 서당이라 고치어 글을 읽게 하였으며, 뒤에 두모포 남쪽으로 옮겼고 중종때에 다시금 동호(東湖) 송암(松菴) 서녁기슭에 터를 잡아서 호당(湖堂)이라고 일렀다." 퇴계는 이호당의 남쪽 다락 왼편에 조그만 집을 지어 회문당(會文堂)이라 이름 하였는데 이서당에서 김주,하서 김인후,민기,임형수등과 글을 읽으며 시작(詩作)을 주고 받았다".한다.



김응림(金應霖)은 김주(金澍: 1512 ~ 1563)의 자, 호는 우암(寓菴), 본관은 안동으로 안원군(安原君) 공량(公亮)의 아들임. 중종26년(1531)에 진사, 동34년(1539)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히었으며,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명종18년(1563)에 종계변무(宗系辨誣) 사건때문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북경 관사에서 병으로 죽었다. 선조때 광국공신(光國功臣)으로 추대되고 화산군(花山君)에 추봉 되어짐, 퇴계및 하서 김인후와 친분이 두터웠으며 문집으로는 <우암유고(寓菴遺稿)>7권이 있는데,김주가 죽은지 200여년 뒤에 편집된 목판본으로 호당에서 독서할때 지은 시는 한수도 수록 되어있지 않다. 아마 임진난을 겪는 사이에 당시의 많은 시 작품들이 유실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讀堂次金應霖秋懷 / 독당차김응림추회

독서당에서 김응림의 "가을에 느낌" 이라는 시를 보고서 그시의 각운(脚韻)자에 맞추어 짓다.



秋入梧棟憾一年 / 추입오동감일년

가을이 와서 오동나무가 한 해를 흔들어 놓으니,



반思宿債負山川 / 반사숙채부산천

오랬동안 빚지고 있다는 생각 되솟아 나네 산천을 등지고 있으니,



病中猶憶聖呼酒 / 병중유억성호주

병고 속에서도 오히려 생각나네 맑은 술을 성인이라고 불렀다는 말이,



貧裏寧甘兄事錢 / 빈리녕감형사전

가난 속에서도 어찌 달게 여기겠는가? 돈을 형님 같이 여긴다는 것을,



紫氣仙人函谷外 / 자기선인함곡외

자주빛 기운띤 신선은 함곡관 밖으로 나갔고,



黃冠道士鑑湖邊 / 황관도사감호변

누른 관 쓴 도사는 거울 못 곁에서 놀았다네,



平生謬厠金閨彦 / 평생류측금규언

평소에 잘못 끼어 들었네. 금마문(金馬門)안을 드나드는 선비들 틈에,



不及渠家養寸田 / 불급거가양촌전

미치지 못하네, 제집에서 한 마디의 마음 밭을 잘 가꾸기만은.



추회(秋懷): "가을이 되면 느끼게 되는 회포를 적는다." 는 뜻으로 중국이나 우리나라 문인들의 한시(漢詩)의 제목으로 많이 사용하였으며 <퇴계집>에도 이시 외에 똑같은 제목의 시가 또있다.

이 밖에도 퇴계선생과 김주(金澍)선조님과의 관계된 시문이 여러편 수록 돼있음.



출전:퇴계시 풀이1권

중문출판사 발행인:장억동

발행일:1969년2월10일





▣ 김태완 -

▣ 김항용 - 귀중한 자료 감사합니다.

▣ 김주회 - 귀중한 자료 감사합니다. 이 책은 어디에서 구해 볼 수 있나요?

▣ 솔내영환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태서 - 시 감상 잘 하였습니다.감사합니다.

▣ 김발용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자료 감사합니다.

▣ 김성회 - 화산군의 약전

▣ 김성회 -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용주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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