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김진태 익원공 김사형 후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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郡/김태영 작성일02-10-27 00:58 조회1,568회 댓글0건본문
효자 김진태
김진태는 가세가 구차 하여도 정성껏 부모를 봉양하면서 반찬이나 음식 까지도 그 자신이 쓰고, 짜고, 매운맛을 점검 하면서 부모님의 식성에 정성껏 맞추었다고 한다.
여름과 겨울에는 시원하고 따듯한것을 때맞추어 조절하여 봉양 하는등, 지성을 다하여 게을리 하는일이 없었다. 그리고 부모님 곁에서는 소리를 높여 남을 꾸짖거나 짜증내는 일이없이 언제나 한결 같았다.
효자 김공의 부친이 연세가 높아 노환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는데 한시도 그옆을 떠나지 않고 간호 하면서 심하면 손가락을 단지 수혈을 하는등 정성을 다했으나 효성의 보람도 없이 운명하니 정성을 다해 장사지내고 삼년상을 모셨으며 묘막살이 삼년에 묘앞에 풀이 나지 않았다 한다.
고종4년(1867년)7월 폭우가 쏟아지고 산사태가 나며 큰나무가 뽑히고 돌이 구르며 집을 덮치는등,온 마을이 물에 잠겨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런데 김진태 효자의 집만은 감쪽같이 수난을 면하니 이것은 분명 신이 효성을 도운것이라 칭송이 자자 하였다. 고종24년(1887년)에 나라에서 효행을 표창하고 마을에 효자정문(孝子旌門)을 세웠다.(경기도 동두천시 광암동 옥금산) 효자 김진태의 본관은 안동이며 조선조 개국공신 좌의정 익원공(翼元公) 김사형(金士衡)의 후손으로 헌종때 동두천시 탑동 장승마을에서 김장년(金長年)의 아들로 태어 났다.
특히 김진태의 집안은 4대가 계속 효자를 배출한 명문가의 집안으로 조상의 효행을 태어나면서 부터 보고,듣고,말하면서 자랐으니 착한 심성은 4대가 효자로 추앙받는 정문이 있는 집안.....-- 이하중략--
김창종: 수필가로 국제PEN 한국본부 회원이며 한국예절교육학회 부회장역임.
京畿人 10월호 (京畿道民會 발행)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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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회 - 항상 귀한 자료를 소개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태서 - 귀한 자료 소개 감사합니다.
▣ 김재원 -
▣ 김영환 -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 태영/문 -
김진태는 가세가 구차 하여도 정성껏 부모를 봉양하면서 반찬이나 음식 까지도 그 자신이 쓰고, 짜고, 매운맛을 점검 하면서 부모님의 식성에 정성껏 맞추었다고 한다.
여름과 겨울에는 시원하고 따듯한것을 때맞추어 조절하여 봉양 하는등, 지성을 다하여 게을리 하는일이 없었다. 그리고 부모님 곁에서는 소리를 높여 남을 꾸짖거나 짜증내는 일이없이 언제나 한결 같았다.
효자 김공의 부친이 연세가 높아 노환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는데 한시도 그옆을 떠나지 않고 간호 하면서 심하면 손가락을 단지 수혈을 하는등 정성을 다했으나 효성의 보람도 없이 운명하니 정성을 다해 장사지내고 삼년상을 모셨으며 묘막살이 삼년에 묘앞에 풀이 나지 않았다 한다.
고종4년(1867년)7월 폭우가 쏟아지고 산사태가 나며 큰나무가 뽑히고 돌이 구르며 집을 덮치는등,온 마을이 물에 잠겨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런데 김진태 효자의 집만은 감쪽같이 수난을 면하니 이것은 분명 신이 효성을 도운것이라 칭송이 자자 하였다. 고종24년(1887년)에 나라에서 효행을 표창하고 마을에 효자정문(孝子旌門)을 세웠다.(경기도 동두천시 광암동 옥금산) 효자 김진태의 본관은 안동이며 조선조 개국공신 좌의정 익원공(翼元公) 김사형(金士衡)의 후손으로 헌종때 동두천시 탑동 장승마을에서 김장년(金長年)의 아들로 태어 났다.
특히 김진태의 집안은 4대가 계속 효자를 배출한 명문가의 집안으로 조상의 효행을 태어나면서 부터 보고,듣고,말하면서 자랐으니 착한 심성은 4대가 효자로 추앙받는 정문이 있는 집안.....-- 이하중략--
김창종: 수필가로 국제PEN 한국본부 회원이며 한국예절교육학회 부회장역임.
京畿人 10월호 (京畿道民會 발행)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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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회 - 항상 귀한 자료를 소개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태서 - 귀한 자료 소개 감사합니다.
▣ 김재원 -
▣ 김영환 -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 태영/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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