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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祖의 墨香을 찾아서] 35(김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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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11-01 02:08 조회2,1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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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祖의 墨香을 찾아서] 35(김동호)





35. 荷一 金東浩 1860∼1921



괴산군지 (1992)

(19) 김동호(金東浩) 1860∼1921

字는 振宗, 號는 荷一. 進士 ★金友甲의 11世孫 ★金永年의 아들이다.

蔭仕로 벼슬이 秘書院 秘書監丞에 이르렀다.

書狀官으로 正使 ★閔丙奭 判書를 따라 청나라 북경에 들어가 高名한 서예가 ★翁方綱體를 배운바 있어 당대 名筆家로 名聲을 떨쳤고 현재 그의 遺品이 많이 남아 있다.





☞ 김동호 선조가 누구인지? 어디에 사셨는지? 많이 남아 있다는 유품은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아시는 분 소개 바랍니다. 혹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옹방강 翁方綱 [1733~1818]

김정희 金正喜 [1786~1856]

민병석 閔丙奭 [1858~1940]

김동호(金東浩) 1860∼1921







★민병석 閔丙奭 [1858~1940]

문신 ·서예가.

본관 : 여흥(驪興)

호 : 시남(詩南) ·의재(毅齋)

별칭 : 자 경소(景召)

활동분야 : 예술

주요작품 : 《덕행교범(德行敎範)》

본관 여흥(驪興). 자 경소(景召). 호 시남(詩南) ·의재(毅齋). 대법원장을 지낸 ★민복기(閔復基)의 부친이다. 1879년(고종1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1884년 승지(承旨)로 있을 때, 수구파(守舊派)로서 갑신정변에 실패한 ★김옥균(金玉均)이 일본으로 망명하자 ★장은규(張殷奎)를 자객으로 보내어 암살하게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대사성(大司成)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 ·제도국총재(制度局總裁) ·헌병대사령관 등을 지냈다. 1910년 국권피탈 뒤 일본 정부의 자작(子爵)과 은사금을 받았고, 이왕직장관을 역임하였다. 서화에 뛰어났으며 행서(行書)에 능하여 서울 광화문에 ‘고종황제 보령육순 어극 사십년 칭경기념비(高宗皇帝寶齡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를 썼고, 편서(編書)로 《덕행교범(德行敎範)》을 남겼다.







★김정희 金正喜 [1786~1856]

조선 후기의 서화가 ·문신 ·문인 ·금석학자.

본관 : 경주

호 : 완당 ·추사 ·예당 ·시암 ·과파 ·노과

별칭 : 자 원춘

활동분야 : 정치, 예술

출생지 : 충남 예산

주요저서 : 《실사구시설》《완당집》《금석과안록》 《완당척독》

주요작품 : 《묵죽도》《묵란도》

본관 경주. 자 원춘(元春). 호 완당(阮堂) ·추사(秋史)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노과(老果). 충남 예산 출생. 1809년(순조9) 생원이 되고, 1819년(순조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 ·충청우도암행어사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24세 때 연경(燕京)에 가서 당대의 거유(巨儒) ★완원(阮元) ·★옹방강(翁方綱) ·★조강(曹江) 등과 교유, 경학(經學) ·금석학(金石學) ·서화(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예술은 시 ·서 ·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淸)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1840년(헌종6)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풀려나왔고, 1851년(철종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 ·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는 함흥 황초령(黃草嶺)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를 고석(考釋)하고, 1816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조선 건국시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이며, ‘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임을 밝혔다. 또한 《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됨을 주장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베이징[北京]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져와서 마곡사(麻谷寺)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광주(廣州) 봉은사(奉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세상을 떴다. 문집에 《완당집(阮堂集)》, 저서에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완당척독(阮堂尺牘)》 등이 있고, 작품에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 등이 있다.







★옹방강 翁方綱 [1733~1818]

금석학(金石學), 비판(碑版), 법첩학(法帖學)에 통달한 중국 청나라의 학자, 서예가.

호 : 담계(覃溪)

국적 : 중국 청나라

활동분야 : 서예, 문학, 금석학

출생지 : 중국 다싱〔大興 : 지금의 北京〕



1752년 진사가 된 뒤 광둥〔廣東〕, 후베이〔湖北〕, 산둥〔山東〕 등의 학정(學政)을 거쳐 베이징〔北京〕으로 돌아왔다.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찬수관(纂修官)을 지내고 내각학사(內閣學士)가 되었다. 서예는 당인(唐人)의 해행(楷行)과 한비(漢碑)의 예법(隸法)을 배워 ★유용(劉墉), ★왕문치(王文治), ★양동서(梁同書) 등과 함께 청나라 법첩학의 4대가로 꼽힌다.  

경학(經學), 사학,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탁월한 감식력으로 많은 제발(題跋)과 비첩(碑帖)을 고증하였고, 시론(詩論)에서는 의리와 문사(文詞)의 결합을 주장한 기리설(肌理說)을 내세웠다. 주요저서에 《양한금석기(兩漢金石記)》《한석경잔자고(漢石經殘字考)》 《초산정명고(焦山鼎銘考)》《소미재난정고(蘇米齋蘭亭考)》《복초재문집(復初齋文集)》《석주시화(石洲詩話)》 등이 있다.





사고전서 四庫全書

중국 청(淸)나라 때 편집된 총서.

구분 : 총서

시대 : 중국 청(淸)

중국에서는 유서(類書)의 편집이 성행하였는데, 청나라 때에도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이 있으나, 유서는 원문을 모두 싣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에 미흡한 느낌을 가졌던 ★건륭제(乾隆帝)가 1741년에 천하의 서(書)를 수집한다는 소(詔)를 내려 1772년에 편찬소(編纂所)인 사고전서관이 개설되었고, 1781년에는 《사고전서》의 첫 한 벌이 완성되었다. 그 후 궁정에 4벌(熱河의 文津閣, 北京圓明園에 文源閣, 紫禁城 안에 文淵閣, 奉天의 文溯閣), 민간에 열람시키는 3벌 등 7벌이 만들어졌다. 수록된 책은 3,458종, 7만 9582권(각 벌의 서적 수는 동일하지 않음)에 이르렀으며,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의 4부로 분류 편집되었다.

수집된 서적 중에는 청왕조(淸王朝)로서 못마땅하여 소각하거나 판목(版木)을 부수는 등, 이른바 금서(禁書)가 된 것도 많았으며, 수록된 책 중에서도 부분적으로 고쳐진 것도 있다. 수록된 서적은 모두 8행 22자로 고쳐 썼으며, 분류와 제요(提要)를 붙였다. 편집의 중심인물은 총찬관(總纂官)인 ★기윤(紀臍)을 비롯하여 ★대진(戴震) ·★소진함(邵晉涵) ·★주영년(周永年) 등이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재이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郡/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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