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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사람 작성일02-11-01 23:30 조회1,7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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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공 휘 문기[派祖 忠毅公 諱 文起]1399∼1456



사육신, 충신인가 역적인가





KBS 사극 <왕과 비>는 조선시대 단종·세조 시대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간군상과 역사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이 드라마는 최근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왕위에서 밀려난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사육신의 거사를 다뤘다. 일반적으로 사육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충절의 대명사로 인식돼왔다. 그러나 그같은 평가에 대해 사육신을 비유교적이며 반시대적 인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사육신에 대한 두가지 시각에 대해 알아봤다.



사육신의 거사

1453년 10월, 수양대군은 무력으로 김종서 등을 제거한 뒤 조정의 실권을 차지하는 쿠데타(계유정란)를 감행했다. 그후 수양은 조선의 왕으로 등극하고 단종을 상왕으로 물러나게 했다.

세조 즉위 4개월만인 1455년 윤6월, 세종과 문종에게 특별한 신임을 받았던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 등의 문관들은 유응부·성승(성삼문의 아버지) 등의 무인들과 모의하여 상왕으로 물러앉은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은 본국으로 떠나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승과 유응부가 국왕 양쪽으로 칼을 들고 지켜서는 별운검에 임명되면서 구체화되었다. 당시 세조가 상왕 단종과 함께 창덕궁의 연회에 있을 때 유응부가 세조를 살해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무위로 끝나고 만다. 세조가 별운검을 동반하고 연회장을 나서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한명회가 창덕궁 연회장이 너무 협소하여 당일에 별운검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세조가 이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암살계획은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사에 참여하기로 한 김질(집현전 출신)이 장인 정창손에게 단종복위 계획의 전모를 알려 가담자 모두가 붙잡히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집현전 학사 출신 성삼문·박팽년 등과 이에 연루된 17인이 투옥되었다. 이들은 옥이 일어난 지 7일만인 6월9일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상왕 단종도 사육신 거사 계획에 연루되었다하여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폐되었다.



조선의 대표적 충신

조선의 11대왕 중종때 단종복위 계획에 가담했다 죽은 여러 신하 가운데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등이 사육신으로 기록되었다. 그후 사육신은 조선시대 절의를 지킨 충신의 대명사로 평가돼왔다.

사육신은 1691년(숙종 17년) 숙종에 의해 관직이 복구되고 민절(愍節)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짐에 따라 서울 노량진 동산의 묘소 아래 민절서원을 세워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782년(정조 6년)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으며, 서울시는 1955년 그 자리에 육각의 사육신 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조성하였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시가집 <청구영언>과 <가곡원류>에는 사육신 중 하위지를 제외한 다섯사람의 시조가 한편씩 수록돼 있어 사육신의 충정이 후세에도 높이 평가됐음을 알 수 있다.



비유교적·반시대적이란 평가

사육신이 충신이라는 평가에 대해 이를 부인하기 보다는 세조의 계유정난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사육신의 비유교적·반시대적 행위를 비판하는 시각이 있다.

이에 따르면 숙종이 해당 기관으로 하여금 사육신의 관직을 복원하고 국가가 관리하도록 한 것은 본래 세조의 성덕(聖德)을 빛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즉 여섯 신하를 처벌할 때 이들이 당세에는 난신(亂臣)이지만 후세에는 충신이라고 했던 세조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다는 것.

이러한 시각은 숙종 24년 9월 전현감(前縣監) 신규(申奎)의 상소문과 관련있다. 상소문은 당시 현실정세 속에서 단종의 양보는 불가피했고 선양(왕위를 물려줌)이 중국의 사례에 못지 않게 훌륭한 일이었음을 강조하였다. 이어서 여섯 신하의 변이 뜻밖에 발생하여 세조가 상왕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한 뜻을 끝내 이루지 못하게 하였으며, 사육신들의 음모가 결국 단종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음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단종복위와 관련, 사육신이 택한 방법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집현전 출신으로 유능한 지식과 교양을 습득한 사육신이 자신들의 계획을 현왕인 세조를 살해함으로써 실현하고자 한 것은 비유교적·반시대적이라고 지적한다. 즉, 연산군·광해군과 같은 소위 포악한 군주들도 폐위와 반정후 살해하지 않았다는 것.



사육신 거사 정당하다

사육신에 대해 절의(節義)를 지킨 충신이라는 기존의 평가와 이에 상반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전자(前者)의 평가가 지배적이다.

숙종이 사육신의 관직을 복원하고 서원까지 내린 것은 세조의 영명함과 성덕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지만 이는 당대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조선은 침체된 사회분위기와 국정을 일대 쇄신하기 위해 여러 시책들을 단행한다. 그 가운데 정신적·사상적으로 절의와 명분이 강조됐는데 사육신은 그 대표적 인물로 부각되었다. 이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사육신이 조선 민중들 마음속에 충신으로 평가돼 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조선의 선비들에게 유교적 질서는 그들의 실존을 가늠하는 가장 분명한 기준이었다. 그런 점에서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은 왕권을 탐한 명백한 쿠데타였고, 선비들의 저항은 당연한 것이었다.

역사평론가 이덕일씨는 “사육신은 장래가 보장된 관료였다. 그들은 편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조선의 기본 질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유교적 질서가 무너지면 나라도 무너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수양대군은 그러한 질서를 무너뜨리고 왕이 됐다. 더욱이 쿠데타 추종세력의 전횡은 조정을 무질서하게 만들고 이들은 권력을 유지하는데만 급급해 나중에 훈구파로 사색당파의 뿌리가 됐다"고 말했다. 즉 사육신의 거사는 당시 선비로서 당연한 결단이었다는 평가다. http://ns.ilyosisa.co.kr/ILYO/166/culture/46-1.html 일요시사문화 중에서

박종진 기자





▣ 김재원 - 자료를 올리시는것, 감사하고 고마운 일입니다만, 실명으로 올려 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 김주회 -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 같습니다.

▣ 김윤만 - 자연과 사회의 모든 현상과 이치를 2분법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김태서 - 그시대의 역사를 판단하기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는 사이버상에서 토론을 가진 좋은만남을 기뻐하여야 되지않을까요? 성함이라도 남겨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 태영/문 -

▣ 김영윤 - 귀하가 던진 화두가 본홈의 활력과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긍정적 효과를 나타냄에 감사드리며 괞찬으시면 실명를 밝혀주시길 정중히 요청합니다

▣ 김부회 - 사육신은 역적도 아니며 충신도 아니다. 적어도 충신이라면 세조의 등극 이전에 관직을 떠나 정선땅으로 들어 갔으면 좋았을텐데 새로운 제왕 세조의 녹을 먹고 살다 구테타를 일으키다니 혹시 기회주의자들 아닌가

▣ 김부회 - 따라서 집현전 사육신도 목숨을 내놀만큼 올곧은 선비라 평가할 수 없으며 이덕일씨의 세조와 사육신에 대한 평론은 두서가 뒤바뀐 그릇된 평론이다

▣ 김부회 -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따른 구테타성공으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려말의 선비들은 높은 관직을 가진자들 중에는 향리로 낙향하거나 깊은 산 두문동을 향하여 큰 고초를 겪으며 역사의 현장에서 잊혀지기를 원했고 행동에 옮겼다 그러나 사육신은 두임금을 섬기며 쿠테다를 시도하다 처형당한 것 뿐이다.

▣ 김부회 - 당시의 신숙주는 집현전 학자들과 달리 깊은 학식과 덕망을 갇고 있으면서도 역사의 흐름의 맥을 짚었고 스신이 뚜렸했다.

▣ 김부회 - 강물이 흘러 내려가듯 역사는 흐르는 것이며 강물을 역류할 수 는 없다는 것이다.

▣ 김부회 - 세조의 등극을 등극으로 인정한 것이다

▣ 김부회 - 구테타한 임금의 녹을 멱으면서 역구테타를 일으키려고 했던것은 선비의 정신도 아니며 결단도 아니다.유교의 성리학이 이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검증없는 글을 썻을 뿐이군요

▣ 김부회 - 따라서 이글은 일말의 가치도 없는 글이다

▣ 김재이 -

▣ 솔내영환 - 누구나 자기의 의견이나 논지를 펼 수있게 문은 개방되어 있습니다.

▣ 聚善堂,在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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