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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천안시지(1987)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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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11-06 18:25 조회1,7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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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시지, 1987>





★金忠甲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龜巖(귀암)이다.

1543(중종38) 년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1545년에 일어났던 을사사화때 정암 조광조를 구하려다가 잡혀서 옥에 갇히어 고생하였다. 뒷날 풀려서 괴산에 살았는데 ★김충갑은 조광조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성리학에 뛰어났다.

인종의 뒤를 이어 명종이 즉위하면서 나이어려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억불정책으로 나오던 국책을 바꾸어 고려조에 실시하였던 승과를 다시 실시하고 승 보우를 입궐시켜 정치에 참여케 하였다.

그래서 유생들과 관리들은 모두 보우를 배척하자는 소리가 높아졌는데 이때 ★김충갑이 많은 관리들과 더불어 보우를 배척하는 데 앞장서서 성리학자들 간에 이름이 높아졌다.

홍문관에서 수찬 벼슬을 하던 충갑의 매서 李(불화변)渾이 을사사화때 왕에게 직간을 하다가 화를 입어 죽음을 당하였다. 충갑은 이때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장송가를 한 수 지어 시체 옆에 놓았다

代之耳 伐之耳

落落長松 伐之耳

小焉(사람인빼고)傾置之 棟材成之耳

大廈將傾式于 何以柱之

1546(병종1)년에 별시에 급제하여 사간원과 사헌부에 재직하면서 을사사화때의 간신들을 탄핵하다가 청주땅에 귀양가게 되어 오랜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선조초에 유배로부터 풀리는 은전을 입어 다시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간원의 헌납(정5품직)에 이르렀으며

뒷날 보조공신 좌찬성 상락군에 봉하여졌다. 또 충청도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서원을 세워 ★김충갑의 곧은 영혼을 제향하였다고 한다.

★김충갑이 처가로 인연이 있어 목천땅에 머물러 산 것이 안동★김씨의 집단 거주지인 병천면의 가전리 잣밭 부락이다.





★金時進

자는 勇吾요 충갑의 다섯째 아들이다.

아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모부인을 효로서 모셨다. 항상 소학을 읽어 스스로 마음을 닦고 행동에는 법도가 있었다.

교관벼슬을 하다가 늙어 벼슬을 버리고 말았다.

그후 시와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백곡 ★김득신은 종조인 시진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비석에 글을 썼다.

赫赫我門 世?于仁 旣種而穫 憲憲公身 世不公收 非公道貧 公亦有後 永世必伸





★金緬(★김면)

자는 士?요 호는 栢隱이며 시진의 아들이다.

과거를 보지않고 전심으로 학문을 닦았다. 당시 목천의 명사인 황종해, ★김만중과 아울려 학문을 토론하였고 역학과 예학에 정도하였던 인조때의 학자 조상우는 항상 면에게 학문을 물었으며 예를 갖추어 섬겼다.

지은 책이 남아 있고 時菴集에도 면의 시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衆草生庭 久未除  溪幽趣 在吾居 (중초생정 구미제 염계유취 재오거)

一朝掃去 諸兒手 孤負草心 恨有余 (일조소거 제아수 고부초심 한유여)







★金緻(★김치)

자는 士精이고 호는 南峰이며 임진왜란때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김시민 장군의 아들이다.

1597년 문과에 알성급제하고 삼사의 요직을 거쳐 이조정랑 부제학 이조참의을 지냈으며

1623년에 동래부사로 부임하였으며 아울러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동래의 부민들이 ★김치의 청백을 오래 기리기 위하여 선정비를 세우고 다음과 같이 글을 썼다.

莫淸者水 莫白者玉 我候之德 如水如玉

막청자수 막백자옥 아후지덕 여수여옥

얼마나 청렴결백 하였으면 여수여옥이라 하였을까. 한 몸을 던져 조국을 구했던 아버지의 정신을 본받아 결백으로 나라에 보답했다.

조정에서는 백성을 잘 다스림에 ★김치의 벼슬을 높여 경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그후 안동의 행영에서 49세를 일기로 별세하시어 안타깝기 이를데 없다.

고루하고 우둔한 사람도 70을 넘겨 사는데 문무를 겸비하고 청렴결백한 정치인이 더구나 성리학과 역학에 모르는 것이 없었다는 ★김공은 지천명인 50을 다 채우지 못하고 타계하였으니 하늘의 이치가 박함을 한탄할 뿐이다. ★김공의 죽음을 세상 사람들은 몹시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는 문집 1권을 남겼고 나라에서는 안흥군에 봉하였다.







★金  (★김호)

자는 晦甫(회보)요 호는 克齊(극제)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임진왜란의 훈신이며 군수로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던 金繼宗의 아들이다.

1610 (광해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간원 정언에 이르렀다.

서궁에 유폐되었던 인목대비에게 숙배하였다가 시론을 어겼다고 함경도 은성부에 전출되어 외지로 나갔다.

문장을 잘 하였고 그의 시집이 남아 있다.









★金時晦 (★김시회)

문과에 급제하였다.

본군 군수직을 떠난 후는 알 수 없다.







★金昉 (★김방)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본군 재임시에 方舍를 새로 지었다.







★金時敏 (★김시민, 1544-1592)

자는 면오요 시호는 충무공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지평 충갑의 아들이다.

(중략)

뒷날 진주의 백성들이 거적비를 세우고 서문중이 경상관찰사로 부임하여 정문을 세우고 충단을 모으고 비석을 세웠다.

조정에서는 왜란 끝난 뒤에 선무공신에 책훈되었고 상락군에 피봉되었다. 그뒤 영의정 상락부원군에 추증되었고 사당을 세워 충렬사의 액자를 내리고 ★김시민을 으뜸으로 하여 전쟁에 희생된 여러 사람을 모셨다.

★김시민의 아들 치는 경상감사를 지낸 문사이고 그 후손들이 군내에 크게 번창하였다. 특히 천원군 병천면의 잿밭 부락에 많이 살고 있다.

1593년 왜군이 명과 화의가 계속되어 일본으로 철수하는 길에 진주성을 크게 공격하여 ★김천일 장군을 필두로 군관민 수만명을 참살한 것은 1592년에 있었던 ★김시민에게 대패한 분풀이였던 것이다.









★金維 (★김유)

시민의 姪로 벼슬이 판관에 이르렀다.

병자호란때 순절하여 훈록에 실렸고 묘에는 의관만을 묻었다.









★金可行 (★김가행)

자는 敬父(경부)요 백곡 ★김득신의 손자로 이인좌의 난을 당하여 조정의 명으로 종군하였다.

일등녹훈하여 연천군수에 나가니 정치를 청빈하고 부지런히 하여 백성들을 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가행은 억지로 자기의 초상화를 뺏어가지고 와서 감추어 두었다.

아들 漢(王奇)는 효행이 있고 음률을 잘하여 과연 명가의 후예라 다른 데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 金泰謙 (★김태겸)

안동인으로 별장으로 재직하였는데 이인좌의 난때 소사진에서 전사하였다. 그로 인하여 한성좌윤에 증직되었고 아들 得命에게는 동추를 제수하였다.







★金天揆 (★김천규)

★김천규는 ★김득신의 셋째아들이다.

도적들이 들어와 아버지를 해치려 하니 천규가 몸으로 아버지를 감싸고 대신 칼을 받았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화를 면하니 가히 효자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을 세우게 하여 그 효성을 포상하였다. 선비 ★김홍재가 시를 지어 찬양하니 다음과 같았다.

國危忠可仗 親在孝爲先 贈諡聲名在 旌閭雨露偏

從父知有烈 事?亦云賢 世?三綱富 天留栢谷篇

국위충가장 친재효위원 증시성명재 정려우로편

종부지유열 사?역운현 세?삼강부 천류백곡편









★金重器 (★김중기)

★김충갑의 현손으로

효행이 지극하여 지평에 증직하였다.

아들 可人도 어버이 섬기기를 효성이 지극하였고 언행이 아름다웠으며

손자 漢成의 문장이 능하고 성품이 고결하여 선비중에 으뜸이었다.









★金得礪 (★김득려)

★김충갑의 증손이다.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드려 회생케 하였으며 아버지 상에 여막을 짓고 시묘를 하였는데 중이 와서 묘를 지켰고 새벽과 저녁이면 수십개의 불이 밝혀져 길을 인도하여 곡을 하며 묘에까지 갈 수 있었다. 상복을 벗은 뒤에는 묘하에 재실을 짓고 그곳에 살면서 묘를 살피었다.

또 문장이 세상에 울리었으나 과거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시니 어버이에게 영화를 드리지 못함을 서운하게 생각하였다.

許유가 시를 지어 보내니 다음과 같다.

至孝會聞?指歲 深誠又見結盧年

지효회문?지세 심성우견결노년

柳光天이 지은 제문에는 다음과 같은 시구로 그의 출중한 효성을 칭찬하였다.

鬼火暮導 釋者夜直

귀화모도 석자야직

훗날 승지 權孚(권부)가 효행시를 지어 그의 행적을 전했다.









★金重鼎 (★김중정)

안동★김씨로 목천의 석촌에 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는 효성이 있었고 연명함을 얻었다.

黃宗海가 그의 상에 만시를 지었다.

斷指血痕留 斯父有斯兒

단지혈흔류 사부유사아

중정의 아버지도 휴년에 가난한 사람에게 받은 채권증서를 불살라 버리고 오히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니 시에 사부사아라 하였다 한다.









★金繼宗 (★김계종) ---★金 (1610 문과)의 부

본관은 안동사람으로 임진왜란때 세차례나 임금께서 파천하신 익주에 가서 문안하고 호종한 공으로 안악군수로 나갔다.













▣ 솔내영환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상기 장송가는 원문 시조를 한역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김윤만 - 천안시지를 여기서 대하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재원 -

▣ 태영/문 -

▣ 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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