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행어사 박문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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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2-11-06 23:50 조회1,746회 댓글0건본문
암행어사 박문수! 이는 소설, 영화제목으로도 많이 알려진 말입니다.
이번 병천지역 답사순례시 박문수 묘도 가기로 되어 있어 박문수에 대한 자료를 모아 보았습니다.
박문수(朴文秀, 1691∼1756)는 본관이 고령(高靈)이고, 자(字)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이다.
33세에 증광시 병과(丙科)에 급제한 후 예문관 검열(檢閱)에 기용되었고, 이듬해에는 훗날 영조가 된
세제를 가르치는 시강원의 설서(說書)가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병조 정랑 재직시엔 세제인 영조를
보호하는 일은 물론 온갖 우서운 이야기로 불안한 영조의 마음을 달랬다.
당시 조정의 정세를 보면 숙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영조는 어머니가 미천한 천민 출신이어서
왕으로 등극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숙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경종(景宗)이 몸이 허약하여
국정을 보기 어렵게 되자 그는 경종을 대신하여 대리로 국정을 보게 되었다(代理聽政). 이 때 강경파
소론이 신임사화를 이르켜 많은 선비를 죽이고, 나아가 세제인 영조까지 해치려 하였다. 박어사는
명석하고 민첩한 처신으로 세제의 보호와 등극에 힘써 마침내 왕위에 오르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1723년 영조가 즉위하자 그를 모셨던 노론이 조정에 들어섰고, 온건파 소론에 속했던 박어사는
오히려 벼슬이 삭직되었다.
이에 박어사는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마침내 영조는 사사건건 임금의 비위를
거스리며 정권을 종횡하는 노론을 몰아내고, 1724년 소론인 이광좌(李光佐)를 영의정으로 기용하였다.
온건파 소론이 집권하자 이광좌는 곧 박어사를 불러 사서(司書)에 등용되었다.
이를 정미환국(丁未換局)이라 한다.
영조는 왕세제(王世弟) 당시 가까이 지냈던 일로 박어사를 극진히 신임하였고, 이어 영남 지방
암행어사로 파견하였다. 청렴하고 강직한 박어사의 성품은 나라의 정책을 거역하고, 혼란기를
이용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부정한 관리들을 빠짐 없이 적발하고 응징하였다. 약 1년간의 암행
직무를 마친 박어사는 그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있자,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이 되어
전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됨은 물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1730년에 도승지를 역임하면서 충청도 지방에 암행어사로 나아가 굶주림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제하였고, 1734년에는 예조 참판으로 진주사(陣奏使)의 부사(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 오기도
하였다. 병조 판서에 기용된 박어사는 병조 내 자체 인신(印信)을 만들어 중간에서 군인들이 농간
부리는 것을 방지하여 군무를 신속하게 처리하였다.
1745년는 어영대장에 기용되고, 이어 호조 판서를 거쳐 한 차례의 제주도에 귀양을 갔다가 풀려나
우참판에 올랐다. 사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헌(忠憲)이 내려졌다.
▣ 김윤만 - 대부님 이번 병천 시제에 참석하시나요? 언급이 없으셔서 궁금합니다.
▣ 김재원 -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영윤 - 잘읽었습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참석할 예정입니다.
이번 병천지역 답사순례시 박문수 묘도 가기로 되어 있어 박문수에 대한 자료를 모아 보았습니다.
박문수(朴文秀, 1691∼1756)는 본관이 고령(高靈)이고, 자(字)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이다.
33세에 증광시 병과(丙科)에 급제한 후 예문관 검열(檢閱)에 기용되었고, 이듬해에는 훗날 영조가 된
세제를 가르치는 시강원의 설서(說書)가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병조 정랑 재직시엔 세제인 영조를
보호하는 일은 물론 온갖 우서운 이야기로 불안한 영조의 마음을 달랬다.
당시 조정의 정세를 보면 숙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영조는 어머니가 미천한 천민 출신이어서
왕으로 등극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숙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경종(景宗)이 몸이 허약하여
국정을 보기 어렵게 되자 그는 경종을 대신하여 대리로 국정을 보게 되었다(代理聽政). 이 때 강경파
소론이 신임사화를 이르켜 많은 선비를 죽이고, 나아가 세제인 영조까지 해치려 하였다. 박어사는
명석하고 민첩한 처신으로 세제의 보호와 등극에 힘써 마침내 왕위에 오르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1723년 영조가 즉위하자 그를 모셨던 노론이 조정에 들어섰고, 온건파 소론에 속했던 박어사는
오히려 벼슬이 삭직되었다.
이에 박어사는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마침내 영조는 사사건건 임금의 비위를
거스리며 정권을 종횡하는 노론을 몰아내고, 1724년 소론인 이광좌(李光佐)를 영의정으로 기용하였다.
온건파 소론이 집권하자 이광좌는 곧 박어사를 불러 사서(司書)에 등용되었다.
이를 정미환국(丁未換局)이라 한다.
영조는 왕세제(王世弟) 당시 가까이 지냈던 일로 박어사를 극진히 신임하였고, 이어 영남 지방
암행어사로 파견하였다. 청렴하고 강직한 박어사의 성품은 나라의 정책을 거역하고, 혼란기를
이용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부정한 관리들을 빠짐 없이 적발하고 응징하였다. 약 1년간의 암행
직무를 마친 박어사는 그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있자,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이 되어
전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됨은 물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1730년에 도승지를 역임하면서 충청도 지방에 암행어사로 나아가 굶주림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제하였고, 1734년에는 예조 참판으로 진주사(陣奏使)의 부사(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 오기도
하였다. 병조 판서에 기용된 박어사는 병조 내 자체 인신(印信)을 만들어 중간에서 군인들이 농간
부리는 것을 방지하여 군무를 신속하게 처리하였다.
1745년는 어영대장에 기용되고, 이어 호조 판서를 거쳐 한 차례의 제주도에 귀양을 갔다가 풀려나
우참판에 올랐다. 사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헌(忠憲)이 내려졌다.
▣ 김윤만 - 대부님 이번 병천 시제에 참석하시나요? 언급이 없으셔서 궁금합니다.
▣ 김재원 -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영윤 - 잘읽었습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참석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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