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박문수 묘,재실,영정 (천안시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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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11-07 04:20 조회1,742회 댓글0건본문
박문수 묘,재실,영정 (천안시청 홈페이지)
천안시청 홈페이지에서 퍼온 내용입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도 그림과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유관순열사유적(생가)
[사적 제230호]
[소재지]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외
[수 량] 생가-20평 봉화지-1식
[규 모]사적-2.449㎡ 봉화지1,600㎡
[개 요] 이곳은 ★유관순 열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1919년 3월1일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 학생들과 서울에서 시위에 참가하였고 일본인들이 휴교령을 내리자 같은 해 3월 13일 고향 병천으로 내려와 마을 사람들에게 서울의 3.1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함께 궐기 할 것을 설득 했으며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하여 만세운동의 횃불을 올렸던 곳으로 1972년 10월 14일 국가에서 사적지로 지정하였다.
●아우내3.1운동 독립사적지
[도기념물 제58호]
[소재지]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수 량] 1점
[개 요] 독립운동지역 : 유관순열사 기념사업회가 1946년 병천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구미산에 기미독립만세기념비를 세워 그의 행적을 새겼다. 4각의 기단석위에 계단을 만들고 위로 올라 갈수록 좁혀 가다가 오석으로 받침을 만들었다. 그 위에 사다리꼴의 비를 세웠는데 일중 ★김충원이 글을 썼다. 이 지역은 3.1운동이 일어났을때 만세를 불렀던 지역이다.
(추모각)-관련사진
유열사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그의 영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매봉산아래에 추모각을 지었다. 1969-1973년간 연차적으로 보수 정비하였으며 1986년에 경역을 확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추모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목조기와집이며 월전 ★장우성이 그린 영정이 봉안되었다.
※ 자가용 : 천안시내에서 진천가는 21번 국도를 따라 18Km정도 가면 아우내장터이고, 이곳에서 진천쪽으로 300m지점 위치에서 우측 약 200m지점에 자리하고 있슴
●흑성산(黑城山 : 519m)
목천면 남화리, 신계리, 교촌리, 지산리, 덕전리, 서리, 교천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산정에는 석축의 둘레 2,290척 높이 6척의 성터가 있으며 성내에는 지지(地址)가 있다.
산정에는 우리공군의 항로보안단의 지대(地隊)와 미극동공군의 통신대를 비롯하여 방송, TV의 중계소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남록의 목천면 남화리, 신계리는 독립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는 이 산을 중심으로 ★김시민, ★박문수, ★김좌진, ★이동녕, ★유관순, ★이범석, ★조병옥 등 많은 구국열사가 배출되었다.
흑성산의 본래 이름은 검은성(儉銀城)이다. 일제 때 검다는 뜻을 그대로 옮겨서 흑성산으로 바꾼 것이다. 본래 검(儉)은 단군 왕검의 검처럼, 임금을 나타내는 옛 말이며 과연 검은성이라는 이름대로 국가적 사업에 의한 독립기념관이 흑성산록에 들어서서 풍수지리상 명당 길지인 이 곳이 제 구실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광남군이광악선무공신교서
[보물 제952호]
[소재지] 천안시 목천읍 남화리 230
[수 량]1책
[규 모] 41x22.3,34x22.3cm
[개 요] 임진왜란때 큰공을 세운 이들에게 내려진 훈호는 선무, 호성 두가지로 나뉘고 있는데 선무공신은 원병과 양곡을 요청하러 명에 왕래한 사신이고 서울에서 의주까지 왕을 시종 수행하며 공을 세운 사람은 호성공신으로 책봉하였다. 이 교서는 선조37년(1604) 10월에 내린 것이다.
★이광악(1557-1608)은 선조17년(1584)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동 25년에 곤양군수가 되었다. 이때 왜란이 일어나자 선봉에 나서 왜군과 싸웠고, 진주성이 포위되자 목사 ★김시민을 도와 진주성을 방어하였고, 김시민이 전사한 뒤에는 여러 장수를 독려하여 진주대첩에 큰 공을 세웠다.
●노은정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355호]
[소재지] 천안시 병천면 도원리 산19번지
[구 조] 목조기와
[규 모] 사각형(4mx4m)1동
[개 요] 노은정은 1689년 조선조 숙종때 학자 ★김상기(본관이 안동이며 자는 정보, 호는 노은)가 건립한 우리시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이다. 노은정은 주위경관이 수려하고 아름다움이 뛰어난 곳으로 정자를 건립한 김상기가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위해 힘쓰며 영조의 스승 ★경한재, 군수 ★김광수 함께 도학으로 벗을 하며 지내던 곳으로 1853년 중수이후 몇차례 중수하였다.
노은정은 300년전의 우리나라 전통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건물로써 기둥은 둥근형이며 재질은 괴목 혹은 싸리나무라고도 한다. 마루는 우물 마루를 깔았으며 정자의 각 기둥에는 수침을 막는 돌기 등을 사용해 안전을 도모했고, 정자 주변은 수령 300년의 고목 등이 정자를 에워싸고 있으며 정자의 아래는 화강암이 지반으로 받들고 있으며 그 아래에 있는 도영암삭성대에는 ★송우암선생의 친필이 각명되었다.
●박문수 묘
[문화재자료 제261호]
[소재지] 천안시 북면 은지리 산1
[규 모] 180평
[개 요] 조선 역대의 어사중 유일한 일화를 남긴 ★박문수는 본관이 고령으로 1691년(숙종 17)에 낳아서 1756년(영조 32)에 56세로 졸했다. 자는 성보이고 호는 기은이다. 1723년 22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와 사관을 거쳐 병조정랑이 되고 1728년 (영조4)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때는 ★오명항의 종사관으로 활약하고 난을 평정한 공으로 영성군에 봉군이 되었다. 1929년(영조5) 영남절도사로 있을때 관북(함경도지방)지방의 수재가 있을 것을 미리 예상하고 영남 제민창에 있었던 조3천석을 미리 관북지방으로 발송하여 10여 고을의 수재민을 미리 구했으므로 함흥으로 만세교옆에 북민비, 송덕비가 세워졌다. 묘는 북면 은석산의 정상부에 있고 묘비와 상석 그리고 장군석이 현존하고 있다. 묘의 높이는 2.3m이고 둘레는 12m이며 묘역은 사방 60보이다.
※ 자가용 : 천안시내에서 독립기념관 가는 21번 국도, 또는 경부고속 국도 독립기념관 IC로 나감. 독립기념관 앞 4거리 지나 상동리 연춘교까지는 약 2Km이며, 연춘교 건너 약 5백 미터지점 좌측에 안내판이 보임
●고령박씨종중재실
[문화재자료 제289호]
[소재지] 천안시 북면 은지리 44
[수 량] 3동
[개 요] 북면 은지리 은석산 아래에 있다. 암행어사로 일화를 남겼던 ★박문수공의 재실로 1932년에 건축하여 옛모습을 찾을 수 없다. 안채는 팔작지붕에 목조로 ㄱ자 집이며 7칸이 있고 사랑체는 5칸으로 일자집이다. 재실내에는 박문수공의 영정과 그가 사용하던 유품이 보관되어 있으며, 특히 박문수공의 손인 ★박영보가 평안도 벽동군의 어사로 나갔을 때 쓴 수부정기와 박문수 일대기 등의 많은 전적이 보관되어 있다. 90년에 원래에 있었던 재실자리에 새로 재실을 신축하였다.
●박문수영정
[보물 제1189호]
[소재지] 천안시 북면 은지리 44
[수 량] 2첩
[규 모] 100x165.3cm 15.3x59.9cm
[개 요] ★박문수어사 40세때의 초상으로서 비단 바탕에 가로102cm, 세로166cm이며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머리에 사모를 썼는데 사모뿔은 비교적 넓고 큰 편이다. 홍배는 대단히 큰편이고 쌍학을 수놓았으며, 흉배상하와 세로의 가에는 운문을 청색과 백색으로 수놓았고 허리에는 각대를 둘렀으며 흉상의 아랫 부분은 파문을 수놓았다. 호피를 깔은 낮은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 김영윤 -
▣ 김재원 -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천안시청 홈페이지에서 퍼온 내용입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도 그림과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유관순열사유적(생가)
[사적 제230호]
[소재지]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외
[수 량] 생가-20평 봉화지-1식
[규 모]사적-2.449㎡ 봉화지1,600㎡
[개 요] 이곳은 ★유관순 열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1919년 3월1일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 학생들과 서울에서 시위에 참가하였고 일본인들이 휴교령을 내리자 같은 해 3월 13일 고향 병천으로 내려와 마을 사람들에게 서울의 3.1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함께 궐기 할 것을 설득 했으며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하여 만세운동의 횃불을 올렸던 곳으로 1972년 10월 14일 국가에서 사적지로 지정하였다.
●아우내3.1운동 독립사적지
[도기념물 제58호]
[소재지]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수 량] 1점
[개 요] 독립운동지역 : 유관순열사 기념사업회가 1946년 병천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구미산에 기미독립만세기념비를 세워 그의 행적을 새겼다. 4각의 기단석위에 계단을 만들고 위로 올라 갈수록 좁혀 가다가 오석으로 받침을 만들었다. 그 위에 사다리꼴의 비를 세웠는데 일중 ★김충원이 글을 썼다. 이 지역은 3.1운동이 일어났을때 만세를 불렀던 지역이다.
(추모각)-관련사진
유열사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그의 영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매봉산아래에 추모각을 지었다. 1969-1973년간 연차적으로 보수 정비하였으며 1986년에 경역을 확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추모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목조기와집이며 월전 ★장우성이 그린 영정이 봉안되었다.
※ 자가용 : 천안시내에서 진천가는 21번 국도를 따라 18Km정도 가면 아우내장터이고, 이곳에서 진천쪽으로 300m지점 위치에서 우측 약 200m지점에 자리하고 있슴
●흑성산(黑城山 : 519m)
목천면 남화리, 신계리, 교촌리, 지산리, 덕전리, 서리, 교천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산정에는 석축의 둘레 2,290척 높이 6척의 성터가 있으며 성내에는 지지(地址)가 있다.
산정에는 우리공군의 항로보안단의 지대(地隊)와 미극동공군의 통신대를 비롯하여 방송, TV의 중계소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남록의 목천면 남화리, 신계리는 독립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는 이 산을 중심으로 ★김시민, ★박문수, ★김좌진, ★이동녕, ★유관순, ★이범석, ★조병옥 등 많은 구국열사가 배출되었다.
흑성산의 본래 이름은 검은성(儉銀城)이다. 일제 때 검다는 뜻을 그대로 옮겨서 흑성산으로 바꾼 것이다. 본래 검(儉)은 단군 왕검의 검처럼, 임금을 나타내는 옛 말이며 과연 검은성이라는 이름대로 국가적 사업에 의한 독립기념관이 흑성산록에 들어서서 풍수지리상 명당 길지인 이 곳이 제 구실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광남군이광악선무공신교서
[보물 제952호]
[소재지] 천안시 목천읍 남화리 230
[수 량]1책
[규 모] 41x22.3,34x22.3cm
[개 요] 임진왜란때 큰공을 세운 이들에게 내려진 훈호는 선무, 호성 두가지로 나뉘고 있는데 선무공신은 원병과 양곡을 요청하러 명에 왕래한 사신이고 서울에서 의주까지 왕을 시종 수행하며 공을 세운 사람은 호성공신으로 책봉하였다. 이 교서는 선조37년(1604) 10월에 내린 것이다.
★이광악(1557-1608)은 선조17년(1584)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동 25년에 곤양군수가 되었다. 이때 왜란이 일어나자 선봉에 나서 왜군과 싸웠고, 진주성이 포위되자 목사 ★김시민을 도와 진주성을 방어하였고, 김시민이 전사한 뒤에는 여러 장수를 독려하여 진주대첩에 큰 공을 세웠다.
●노은정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355호]
[소재지] 천안시 병천면 도원리 산19번지
[구 조] 목조기와
[규 모] 사각형(4mx4m)1동
[개 요] 노은정은 1689년 조선조 숙종때 학자 ★김상기(본관이 안동이며 자는 정보, 호는 노은)가 건립한 우리시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이다. 노은정은 주위경관이 수려하고 아름다움이 뛰어난 곳으로 정자를 건립한 김상기가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위해 힘쓰며 영조의 스승 ★경한재, 군수 ★김광수 함께 도학으로 벗을 하며 지내던 곳으로 1853년 중수이후 몇차례 중수하였다.
노은정은 300년전의 우리나라 전통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건물로써 기둥은 둥근형이며 재질은 괴목 혹은 싸리나무라고도 한다. 마루는 우물 마루를 깔았으며 정자의 각 기둥에는 수침을 막는 돌기 등을 사용해 안전을 도모했고, 정자 주변은 수령 300년의 고목 등이 정자를 에워싸고 있으며 정자의 아래는 화강암이 지반으로 받들고 있으며 그 아래에 있는 도영암삭성대에는 ★송우암선생의 친필이 각명되었다.
●박문수 묘
[문화재자료 제261호]
[소재지] 천안시 북면 은지리 산1
[규 모] 180평
[개 요] 조선 역대의 어사중 유일한 일화를 남긴 ★박문수는 본관이 고령으로 1691년(숙종 17)에 낳아서 1756년(영조 32)에 56세로 졸했다. 자는 성보이고 호는 기은이다. 1723년 22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와 사관을 거쳐 병조정랑이 되고 1728년 (영조4)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때는 ★오명항의 종사관으로 활약하고 난을 평정한 공으로 영성군에 봉군이 되었다. 1929년(영조5) 영남절도사로 있을때 관북(함경도지방)지방의 수재가 있을 것을 미리 예상하고 영남 제민창에 있었던 조3천석을 미리 관북지방으로 발송하여 10여 고을의 수재민을 미리 구했으므로 함흥으로 만세교옆에 북민비, 송덕비가 세워졌다. 묘는 북면 은석산의 정상부에 있고 묘비와 상석 그리고 장군석이 현존하고 있다. 묘의 높이는 2.3m이고 둘레는 12m이며 묘역은 사방 60보이다.
※ 자가용 : 천안시내에서 독립기념관 가는 21번 국도, 또는 경부고속 국도 독립기념관 IC로 나감. 독립기념관 앞 4거리 지나 상동리 연춘교까지는 약 2Km이며, 연춘교 건너 약 5백 미터지점 좌측에 안내판이 보임
●고령박씨종중재실
[문화재자료 제289호]
[소재지] 천안시 북면 은지리 44
[수 량] 3동
[개 요] 북면 은지리 은석산 아래에 있다. 암행어사로 일화를 남겼던 ★박문수공의 재실로 1932년에 건축하여 옛모습을 찾을 수 없다. 안채는 팔작지붕에 목조로 ㄱ자 집이며 7칸이 있고 사랑체는 5칸으로 일자집이다. 재실내에는 박문수공의 영정과 그가 사용하던 유품이 보관되어 있으며, 특히 박문수공의 손인 ★박영보가 평안도 벽동군의 어사로 나갔을 때 쓴 수부정기와 박문수 일대기 등의 많은 전적이 보관되어 있다. 90년에 원래에 있었던 재실자리에 새로 재실을 신축하였다.
●박문수영정
[보물 제1189호]
[소재지] 천안시 북면 은지리 44
[수 량] 2첩
[규 모] 100x165.3cm 15.3x59.9cm
[개 요] ★박문수어사 40세때의 초상으로서 비단 바탕에 가로102cm, 세로166cm이며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머리에 사모를 썼는데 사모뿔은 비교적 넓고 큰 편이다. 홍배는 대단히 큰편이고 쌍학을 수놓았으며, 흉배상하와 세로의 가에는 운문을 청색과 백색으로 수놓았고 허리에는 각대를 둘렀으며 흉상의 아랫 부분은 파문을 수놓았다. 호피를 깔은 낮은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 김영윤 -
▣ 김재원 -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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