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隱 金相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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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2-11-08 18:33 조회1,642회 댓글0건본문
老隱 金相器
1.김상기공의 병천 선계
산 높고 물 맑은 목천(지금의 병천)은 선인들의 얼과 숨결이 살아 숨쉬는 역사와 충절의
고장으로 충신과 명현을 많이 배출했다.
이 고장에 안동김씨 안렴사공의 후손들이 삶의 터전을 이룬것은 참봉(參奉) 공언(公彦)공으로
부터이다. 공은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고려조에서 문무겸전의 찬란한 발자취를 남긴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장군을 중시조로 하여,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위지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킨 안렴사(按廉使)오은(梧隱) 김사렴(金士廉)의 6대손이다.
기개가 당당하고 문사가 풍부한 안렴사 오은공은 공민왕 초에 급제했으며,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함께 바른 말 잘 하기로 유명했다. 조선이 선 뒤 이태조가 수차례 좌사간(左司諫_에 임명하여 하였으나
끝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청주에 은거했다.
임종하면서 자손에게 유언하기를 고려에서 벼슬한 사람은 조선에 나가지 말라하니 아들 손자 삼대가
모두 벼슬을 하지 않아 세상에서는 절의대가라 칭송하였다.
김공언 공은 조선 성종조에 문의(文義) 현령(縣令)이던 아버지 지( )와 어머니 진주유씨 사이에서
4남 1녀의 3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릇이 크고 총명하고 생각이 깊었으며,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과 함께 학문을 닦으며 벼슬이 동부참봉이 올랐다.
그러나 중종 14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어진 선비들이 숨고 핍박을 당하자 조정의 어지러움을
한탄하며 출생지인 청주를 떠나 병천으로 옮겼다. 김공언공은 병천에서 선산유씨를 부인으로
맞아 희(熹),도(燾),훈(勳),후(煦)를 낳으셨다.
장남 희와 3남 군자감정(軍資監正)훈은 이곳 병천에ㅐ, 차남 도는 부사직(副司直)으로 삼척에,
4남 후는 영동에 삶의 터전을 딲아 지금까지 후손들이 그 곳에 살고 있다.
3남인 훈의 아들 효길(孝吉)은 1563년 예빈시첨정(禮賓寺僉正)에 올랐고, 옥( )과 색( ) 두 아들을
낳았다. 옥은 1618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도총부 도사로 훈련원정을 거쳐 1636년에 병자호란때
큰 공을 세웠다. 색은 학자로서 성품이 곧고 어질며 효심 또한 지극하였다. 호는 가정(柯亭)이다.
옥의 아들 세후(世厚)는 벼슬이 우승지에 올랐고, 손자 정화(鼎和),정필(鼎弼), 정좌(鼎 )는 당대의
문장가였다. 정화는 과거를 일삼지 않고 경서에 힘써 행의를 닦고 자제에게 효우를 먼저 가르쳤다.
손자 명연(命淵)과 명함(命涵)은 예학에 밝았으며, 영(영)의 아들 지수(芝秀)는 문장에 뛰어나
군수 조국인(趙國仁)과 함께 대록지(大麓誌)를 편찬하였다.
정필은 어릴적부터 학문에 부지런하여 문장과 글씨가 특출했으며 손자 명집도 문사가 풍부했다.
정좌는 종형 정화와 함께 한수재 권상하에게 성리학을 배우고, 판서 권상유가 벼슬할 것은
권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시인 이병연과 함께 금강산에 올랐는데 정좌가 [금강산석양영리승귀시
유수성중마도교(金剛山夕陽影裡僧歸寺流水聲中馬渡橋)]라고 시를 읊으니 이병연이 "나는 자네의
시를 도저히 따를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색의 아들 지석(志奭)은 봉직랑이며, 그 아들 상기(相器)는 호를 노은(老隱)이라 하고 글로써
세상를 울렸다. 그는 일찍이 경한재 곽시징, 군수 김광수와 벗하며 지냈다.
숙종의 사액서원인 도동서원(道東書院)의 상량문을 쓰기도 하고, 말년에는 노은정을 지었으며
또한 후진 양성에 힘을 바쳤다.
공의 손자 석태(錫泰), 석범(錫範), 석겸(錫謙)과 증손 종수(宗洙)도 글씨와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5대손 달성(達成)의 부인 광산김씨는 남편이 병들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나오는 피를 남편에게
멱여 3일니아 더 살게 했으며, 남편이 죽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따라가니 세상사람들이 열녀로
추증했다. (이 내용은 대록지에 수록되어 있음)
김상기공의 가계도
공언(안렴사공 김사렴의 6대손--후, [훈}, 도, 희.--효길(첨정공)--[색(가정공)],옥(도사공)--지석(봉직랑공)--상기(노은공)--봉조,봉지,봉구
이상 내고장 문화기행 [노은정],김성회 편 에서 옮겼읍
▣ 김윤만 - 이 글을 읽으면서 형님(안렴사공)은 불사이군 두문동으로, 아우(익원공)는 개국일등공신으로, 그러나 두 형제분이 약주 한잔하시면서 많은 고민과 갈등과 대화 끝에 내린 결론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 김주회 - 감사합니다.
▣ 김재원 -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郡/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1.김상기공의 병천 선계
산 높고 물 맑은 목천(지금의 병천)은 선인들의 얼과 숨결이 살아 숨쉬는 역사와 충절의
고장으로 충신과 명현을 많이 배출했다.
이 고장에 안동김씨 안렴사공의 후손들이 삶의 터전을 이룬것은 참봉(參奉) 공언(公彦)공으로
부터이다. 공은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고려조에서 문무겸전의 찬란한 발자취를 남긴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장군을 중시조로 하여,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위지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킨 안렴사(按廉使)오은(梧隱) 김사렴(金士廉)의 6대손이다.
기개가 당당하고 문사가 풍부한 안렴사 오은공은 공민왕 초에 급제했으며,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함께 바른 말 잘 하기로 유명했다. 조선이 선 뒤 이태조가 수차례 좌사간(左司諫_에 임명하여 하였으나
끝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청주에 은거했다.
임종하면서 자손에게 유언하기를 고려에서 벼슬한 사람은 조선에 나가지 말라하니 아들 손자 삼대가
모두 벼슬을 하지 않아 세상에서는 절의대가라 칭송하였다.
김공언 공은 조선 성종조에 문의(文義) 현령(縣令)이던 아버지 지( )와 어머니 진주유씨 사이에서
4남 1녀의 3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릇이 크고 총명하고 생각이 깊었으며,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과 함께 학문을 닦으며 벼슬이 동부참봉이 올랐다.
그러나 중종 14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어진 선비들이 숨고 핍박을 당하자 조정의 어지러움을
한탄하며 출생지인 청주를 떠나 병천으로 옮겼다. 김공언공은 병천에서 선산유씨를 부인으로
맞아 희(熹),도(燾),훈(勳),후(煦)를 낳으셨다.
장남 희와 3남 군자감정(軍資監正)훈은 이곳 병천에ㅐ, 차남 도는 부사직(副司直)으로 삼척에,
4남 후는 영동에 삶의 터전을 딲아 지금까지 후손들이 그 곳에 살고 있다.
3남인 훈의 아들 효길(孝吉)은 1563년 예빈시첨정(禮賓寺僉正)에 올랐고, 옥( )과 색( ) 두 아들을
낳았다. 옥은 1618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도총부 도사로 훈련원정을 거쳐 1636년에 병자호란때
큰 공을 세웠다. 색은 학자로서 성품이 곧고 어질며 효심 또한 지극하였다. 호는 가정(柯亭)이다.
옥의 아들 세후(世厚)는 벼슬이 우승지에 올랐고, 손자 정화(鼎和),정필(鼎弼), 정좌(鼎 )는 당대의
문장가였다. 정화는 과거를 일삼지 않고 경서에 힘써 행의를 닦고 자제에게 효우를 먼저 가르쳤다.
손자 명연(命淵)과 명함(命涵)은 예학에 밝았으며, 영(영)의 아들 지수(芝秀)는 문장에 뛰어나
군수 조국인(趙國仁)과 함께 대록지(大麓誌)를 편찬하였다.
정필은 어릴적부터 학문에 부지런하여 문장과 글씨가 특출했으며 손자 명집도 문사가 풍부했다.
정좌는 종형 정화와 함께 한수재 권상하에게 성리학을 배우고, 판서 권상유가 벼슬할 것은
권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시인 이병연과 함께 금강산에 올랐는데 정좌가 [금강산석양영리승귀시
유수성중마도교(金剛山夕陽影裡僧歸寺流水聲中馬渡橋)]라고 시를 읊으니 이병연이 "나는 자네의
시를 도저히 따를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색의 아들 지석(志奭)은 봉직랑이며, 그 아들 상기(相器)는 호를 노은(老隱)이라 하고 글로써
세상를 울렸다. 그는 일찍이 경한재 곽시징, 군수 김광수와 벗하며 지냈다.
숙종의 사액서원인 도동서원(道東書院)의 상량문을 쓰기도 하고, 말년에는 노은정을 지었으며
또한 후진 양성에 힘을 바쳤다.
공의 손자 석태(錫泰), 석범(錫範), 석겸(錫謙)과 증손 종수(宗洙)도 글씨와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5대손 달성(達成)의 부인 광산김씨는 남편이 병들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나오는 피를 남편에게
멱여 3일니아 더 살게 했으며, 남편이 죽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따라가니 세상사람들이 열녀로
추증했다. (이 내용은 대록지에 수록되어 있음)
김상기공의 가계도
공언(안렴사공 김사렴의 6대손--후, [훈}, 도, 희.--효길(첨정공)--[색(가정공)],옥(도사공)--지석(봉직랑공)--상기(노은공)--봉조,봉지,봉구
이상 내고장 문화기행 [노은정],김성회 편 에서 옮겼읍
▣ 김윤만 - 이 글을 읽으면서 형님(안렴사공)은 불사이군 두문동으로, 아우(익원공)는 개국일등공신으로, 그러나 두 형제분이 약주 한잔하시면서 많은 고민과 갈등과 대화 끝에 내린 결론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 김주회 - 감사합니다.
▣ 김재원 -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郡/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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