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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 김부와 태조왕건 ④ (경순왕과 왕건사이의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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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09-01 16:06 조회2,6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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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 김부와 태조왕건 ④ (경순왕과 왕건사이의 여인들)





경순왕은 왕위 재직시에 죽방부인(소원왕후 죽주박씨) 이 있었고,



935년 나라를 왕건에게 넘겨주면서 낙랑공주 (왕건의 셋째부인인 충주호족 유긍달의 딸 소생)를 둘째부인으로 맞이하였고, 이 사이에 낳은 딸은 5대경종의 첫 번째 부인 헌숙왕후 김씨입니다.



그리고 왕건으로부터 또한분 왕씨 (왕건의 후비인 평주 호족 박수경의 딸 소생)를 셋째부인으로 맞이하였습니다.



한편 큰아버지인 김억렴의 딸 (신성왕태후)을 왕건에게 시집보내 왕건의 5번째 부인이 되어 이 사이에 안종을 낳았고, 안종은 8대현종의 아버지이니 김억렴의 딸은 8대현종의 할머니가 됩니다.









참고로 경순왕, 고려의 1대에서 5대까지와 8대왕의 재위기간과 소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56대 경순왕 김부 ?-978, 재위 927-935, 부인 3명, 자녀 9남3녀

1대 태조 왕건 877-943, 재위 918.6-943.5 (25년) 부인 29명 자녀 25남9녀

2대 혜종 왕무 912-945, 재위 943.5-945.9 (2년4월) 부인 4명, 자녀 2남3녀

3대 정종 왕요 923-949, 재위 945.9-949.3 (3년6월) 부인 3명, 자녀 1남1녀

4대 광종 왕소 925-975 재위 949.3-975.5 (26년2월) 부인 2명, 자녀 2남3녀

5대 경종 왕주 975-981, 재위 975.5-981.7, (6년2월) 부인 5명, 자녀 1남

(현종 아버지) 안종 왕욱 (? - 997)

8대 현종 왕순 992-1031, 재위 1009.2-1031.2 (22년3월) 부인 13명, 자녀 5남8녀









1. 죽방부인

★경순왕의 첫째부인





<한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 2001년 6월, 박영규>



죽방부인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이 남아있지 않고, 왕건이 931년에 경주를 방문하고 돌아가면서 그녀에게 물품을 선물했다는 기록만 있다. 당시 신라 왕실의 관례로 봐서 그녀는 신라 왕족 출신일 것이다.







2.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

★충주호족 유긍달의 딸, 왕건의 셋째부인, 경순왕의 장모



1대 태조 왕건 877-943, 재위 918.6-943.5 (25년) 부인 29명 자녀 25남9녀

3대 정종 왕요 923-949, 재위 945.9-949.3 (3년6월) 부인 3명, 자녀 1남1녀

4대 광종 왕소 925-975 재위 949.3-975.5 (26년2월) 부인 2명, 자녀 2남3녀





<디지털한국학>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3비. 충주유씨(忠州劉氏). 태사 내사령(太師內史令)에 추증된 긍달(兢達)의 딸이다.



태조가 고려를 창건한 직후에 왕비로 맞아들였다. 비의 고향인 충주는 후백제 및 신라와 연결되는 교통상의 요충일 뿐만 아니라, 신라 5소경(小京)의 하나인 중원경(中原京)지역으로 신라 귀족이 많이 사는 곳이기도 하였다. 태조는 이러한 지역의 호족가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임으로써 주변의 호족세력을 포섭하는 데 좀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



태조와의 사이에 태자 태(泰)와 정종·광종·문원대왕 정(文元大王貞)·증통국사(證通國師)의 다섯 왕자와 낙랑(樂浪)·흥방(興芳) 두 공주를 두었다. 그 중 정종은 고려 제3대 왕이 되었고, 광종은 제4대 왕이 되었다.



그리고 장녀 낙랑공주는 귀순해온 신라의 경순왕에게 출가하였다. 사후에 신명순성왕태후로 추봉되었다. 광종은 즉위 2년(951)에 모후의 원당(願堂)으로 불일사(佛日寺)를 세웠고, 954년에는 숭선사(崇善寺)를 세워 명복을 빌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惠宗朝 王位繼承亂의 新解釋(姜喜雄, 韓國學報 7, 1977). 〈鄭容淑〉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박영규>



신명순성왕후 유씨는 충주 사람으로 내사령 유긍달의 딸이다. 그녀는 태자 태, 정종, 광종, 문원대왕 정, 증통국사 등의 여섯 아들과 낙랑과 흥방 두 공주를 낳았다.



유씨는 다른 어떤 왕후보다도 많은 자식을 낳았고, 그녀 소생 중에 두 명이 왕이 되었으나 [고려사]는 그녀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기지 않고 있다. 또 유씨 소생 낙랑공주는 신라의 마지막 왕 김부 (제56대 경순왕) 와 혼인하여 왕건이 신라 세력을 포용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한다.



왕건이 유씨와 결혼한 시기는 920년 이전으로 추측된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태자 태의 출생연대가 정종과 광종이 두 살 터울임을 감안할 때 920년 경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씨는 900년을 전후해서 태어났을 것으로 짐작되며, 왕건이 왕이 된 이후에 처음 맞이한 왕비였던 만큼 당시의 세력 판도와 관련된 정략결혼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왕건의 후비 중에 충주 출신은 그녀 하나뿐이었는데, 이것은 곧 그녀의 아버지 유긍달이 충주를 대표하는 유력한 호족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녀의 사망연대와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그녀 소생 광종이 965년 봄에 숭선사를 창건하여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3. 낙랑공주(樂浪公主)

★ 태조왕건과 신명순성왕태후(유긍달의 녀)사이의 딸, 3대정종 4대광종의 여동생, 경순왕의 두 번째 부인



1대 태조 왕건 877-943, 재위 918.6-943.5 (25년) 부인 29명 자녀 25남9녀

3대 정종 왕요 923-949, 재위 945.9-949.3 (3년6월) 부인 3명, 자녀 1남1녀

4대 광종 왕소 925-975 재위 949.3-975.5 (26년2월) 부인 2명, 자녀 2남3녀







<한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 2001년 6월, 박영규>



낙랑공주는 고려 태조 왕건의 맏딸이며, 셋째 왕비 신명순성왕후 소생이다. 신명순성왕후는 충주의 호족 유긍달의 딸이다. 그녀 소생 왕자 중에 제3대 정종, 제4대 광종 등 두 명의 왕이 나왔다.



낙랑은 혼인 전에는 안정숙의공주로 불리었으며, 혼인한 뒤로 낙랑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또 신란궁 부인으로도 불리었다.







<디지털한국학>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맏딸. 본관은 개성(開城). 신라 경순왕의 처이다.

일명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이라고도 하며, 혼인 전에는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라 불렸다.

어머니는 충주지방의 호족 긍달(兢達)의 딸인 신명태후 유씨(神明太后劉氏)이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의하면 935년(태조 18) 11월에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金傅)가 백관을 이끌고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는 자신의 맏딸인 낙랑공주를 경순왕의 아내로 삼게 했다고 한다.



태조에게는 9인의 공주가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낙랑공주와 성무부인 박씨(聖茂夫人朴氏)소생의 공주를 김부와 혼인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종실과 혼인시켰다.



고려왕실에서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주가 타성(他姓)과 혼인한 예는 극히 드물었는데, 김부에게만은 낙랑공주 등 2인의 공주를 혼인시켰다.



이는 신라를 들어 귀부(歸附)한 김부에 대한 감사의 뜻과 태조 자신이 신라왕실에서 신성태후(神成太后)를 맞아들임으로써, 이중의 혼인관계를 통하여 고려왕실의 신분을 신라왕실과 대등하게 상승시켜 통일된 한반도를 용이하게 지배할 수 있는 권위를 보장받기 위한 의도가 들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高麗史, 高麗初期의 王室婚姻에 對하여(河炫綱, 梨大史苑 7, 1968)

高麗前期婚姻政策의 추이와 族內婚의 성립(鄭容淑, 韓國學報 37, 1984). 〈權悳永〉









4. 헌숙왕후 김씨

★경순왕과 낙랑공주 사이의 딸, 5대경종의 첫 번째 부인



1대 태조 왕건 877-943, 재위 918.6-943.5 (25년) 부인 29명 자녀 25남9녀

5대 경종 왕주 955-981, 재위 975.5-981.7, (6년2월) 부인 5명, 자녀 1남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박영규>



헌숙왕후 김씨는 신라 경순왕 김부의 딸이다. 935년 태조가 자신의 딸 낙랑공주를 경순왕에게 시집보낸 바 있는데, 헌숙왕후는 이들 사이에서 출생한 듯하다.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975년 10월에 경순왕 김부의 관작을 높이고 공신 칭호를 준다. 또한 식읍은 종래의 것과 합쳐서 1만호로 늘려준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배려인데, 이때에 헌숙왕후를 왕비로 받아들인 때문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비록 헌숙왕후가 경종의 제1비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와 가장 먼저 혼인한 부인은 아니다. 다만 늦게 혼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제1비로 삼은 것은 신라왕족과 고모인 낙랑공주에 대한 특별한 배려로 보인다.



신라왕족에게 이같은 특별한 배려를 한 것은 아마 정치적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신라왕족을 비롯한 경상도쪽 호족들은 광종의 공포정치에 희생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종 즉위 이후에 상대적으로 세력이 강했고, 경종은 이러한 신라계 호족들의 힘을 이용하여 충주 및 평산 호족들을 견제하려 했다.



그녀는 언제 죽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죽은 후 경종의 영릉에 합장되었다.









5. 셋째 부인 왕씨 (박수경의 딸)

★ 태조왕건과 성무부인 박씨 (박수경의 딸) 사이의 딸, 경순왕의 세째 부인





<한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 2001년 6월, 박영규>



경순왕의 셋째 부인 왕씨는 왕건의 후비 성무부인 박씨 소생이다. 성무부인은 평주의 호족 박수경의 딸이다. 박수경은 딸 셋을 왕건에게 시집 보냈는데 성무부인은 둘째 딸이다. 성무부인은 아들 넷과 딸을 하나 낳았는데 그 딸이 바로 경순왕의 세 번째 부인이다. 그녀의 시호는 기록되지 않아 알 수 없다.









6.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

★ 경순왕 큰아버지 김억렴의 딸, 태조왕건의 5번째 부인, 8대현종의 할머니



1대 태조 왕건 877-943, 재위 918.6-943.5 (25년) 부인 29명 자녀 25남9녀

안종 郁(욱) (? - 997)

8대 현종 왕순 992-1031, 재위 1009.2-1031.2 (22년3월) 부인 13명, 자녀 5남8녀





<디지털한국학>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5비. 경주김씨(慶州金氏). 잡간(#잡01干)이었던 억렴(億廉)의 딸이다.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기를 청하자, 태조는 이를 환영하면서 한편으로 신라왕실과의 결혼을 청하였다. 이에 신라의 경순왕은 큰아버지 억렴의 딸이 인품과 용모가 뛰어나 태조의 배필됨에 부족함이 없다고 추천하니 왕비로 삼았다.



태조는 이러한 결혼을 통하여 양 왕실이 결합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신분혈통적 고귀성을 보장받고, 또 한편으로는 친신라계 호족을 포섭하는 데 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성왕후에 대하여는 신라왕족이 아니고 합주(陜州:지금의 합천)의 이씨(李氏)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태조와의 사이에 안종(安宗) 욱(郁)을 낳았고, 안종은 경종의 비 헌정왕후(獻貞王后)와 사통하여 현종을 낳았다.



현종이 왕위에 오른 뒤 신성왕태후로 추봉하였으며, 능은 정릉(貞陵)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前期의 王室婚姻에 對하여(河炫綱, 梨大史苑 7, 1968). 〈鄭容淑〉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박영규>



신성왕후 김씨는 신라 왕족이며 경순왕의 큰 아버지 김억렴의 딸이다. 김씨가 왕건의 제5비가 된 것은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 935년 직후이므로 936년 초가 될 것이다.



935년 11월 신라 56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뜻을 표시하자 왕건은 이에 대한 답례로 사신을 보냈다. 고려 사신은 경순왕에게 왕건이 신라 종실과의 혼사를 원한다는 사실을 전했고, 이에 경순왕은 자신의 사촌누이 김씨를 고려로 시집보낸다.



김씨 소생으로는 안종이 있는데, 그는 제5대왕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와 결혼하여 제8대왕 현종을 낳았다.



그녀의 사망연대와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 안종 郁(욱) (? - 997)

★백부 억렴의 외손자, 태조왕건과 백부 억렴의 딸 신성왕후 김씨 사이의 아들, 8대현종의 부



1대 태조 왕건 877-943, 재위 918.6-943.5 (25년) 부인 29명 자녀 25남9녀

8대 현종 왕순 992-1031, 재위 1009.2-1031.2 (22년3월) 부인 13명, 자녀 5남8녀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박영규>



안종 왕욱은 신성왕후 김씨 소생이며, 제8대왕 현종의 아버지이다. 981년에 경종이 죽자 그의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가 사가로 나와 거쳐하였는데, 왕욱은 그녀와 정을 통하여 임신케 했다. 이 일이 발각되자 성종은 왕욱을 귀양보냈으며, 그가 귀양가던 날에 헌정왕후는 아이를 낳고 죽었다.



성종은 헌정왕후가 죽은 후 왕욱의 아이를 보모에게 맡겼는데, 아이가 두 살이 되자 아버지를 찾으므로 왕욱에게 보냈다. 왕욱은 귀양지에서 아이를 기르다가 죽음이 임박해오자 아들에게 금 한 주머니를 주면서 이렇게 유언했다. "내가 죽거든 이 금을 지관에게 주고 나를 이 고을 성황당 남쪽 귀룡동에 매장하되, 시체를 엎어 묻어달라"



유언을 남긴 왕욱은 성종 15년 (997년)에 세상을 떴다. 그리고 그의 아들 현종이 1010년에 왕위에 오르자 효목대왕에 추존되고, 묘호를 안종이라 하였다.



현종은 1018년에 그의 능을 건릉에 옮겼으며, 1028년에 능호를 무릉으로 개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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