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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70)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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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2-11-13 19:36 조회1,8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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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선생님은 64세 되시었습니다.



이해4월 어머니 곽낙원여사는 조국 독립을 못보시고 81세로 중경에서 咽喉炎으로 작고하시었습니다.



이 어머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백범선생님은 어머니를 여윈 설움에 몸둘 바를 몰랐다고



회고하셨습니다. 이곳에서도 동지들이 생신상을 차려 드린다 했더니 돈으로 달라고 하시고,



그돈으로 총을 사서 내려주시며 왜놈 죽이는데 쓰라고 말씀하시는 그런 어머니이셨습니다.



5월에는 임시정부를 유주에서 사천성  기江으로 옮기게 됩니다.



여기에서 김원봉과 공동명의로 [동지·동포 제군들에게 보내는 公開信]을 발표하시고



8월에는 기강에서 7당통일회의 개최하시었으며



11월에 曺成煥을 단장으로 군사특파단을 구성하여 섬서성 서안으로 파견하게 됩니다.



한편 유럽에서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본격적인 2차 대전이 시작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백범일지에 씌어 있는 당시의 어머니에 대한 글을 옮겨 보겠습니다.





이 기회에 나는 어머님이 내가 상처 후에 본국으로 가셨다가 다시 상해로 오시던 일을 기록하련다.



어머님이 신이를 데리고 인천에 상륙하셨을 대에는 노자가 다 떨어졌었다. 그때에는 우리가 상해에서 조석이 어려워서 어머님이 중국 사람들의 쓰레기통에 버린 배추 떡잎을 뒤져다가 겨우 반찬을 만드시던 때라 노자를 넉넉히 드렸을 리가 만무하다.



인천서 노자가 떨어진 어머님은 내가 말씀도 한 일이 없건마는 동아일보 지국으로 가서 사정을 말씀하셨다. 지국에서는 벌써 신문 보도로 어머님이 귀국하시는 것을 알았다 하면서 서울까지 차표를 사드렸다.



어머님은 서울에 내려서는 동아일보사를 가셨다. 동아일보사에서는 사리원까지 차표를 사드렸다.



어머님은 해주 본향에 선영과 친족을 찾으시지 않고 안악 김씨 일문에서 미리 준비하여 놓은 집에 계시게 하였다.



내가 인이를 데리고 있는 동안, 어머님은 당신의 생활비를 절약하셔서 때때로 내게 돈을 보내주셨다.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사건이 생기매 경찰은 가끔 어머님을 괴롭게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어머님께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나오시라고 기별하였다. 그 때에는 내게는 어머님이 굶으시지 않을이만한 힘이 있다고 여쭈었다.



어머님은 중국으로 오실 결심을 하시고 안악 경찰서에 친히 가겨서 출국 허가를 청하였더니 의외로 좋다고 하므로 살림을 걷어치우셨다.



그랬더니 서울 경무국으로부터 관리 하나가 안악으로 일부러 내려와서 어머님께 경찰의 힘으로도 못 찾는 아들을 노인이 어떻게 찾느냐고, 그러니 출국 허가를 취소한다고 하였다.



어머님은 대로하여서,



"내 아들을 찾는 데는 내가 경관들보다 나을 터이고, 또 가라고 허가를 하여서 가장 집물을 다 팔게 해놓고 이제 또 못 간다는 것이 무슨 법이냐. 너희놈들이 남의 나라를 빼앗아 먹고 이렇게 정치를 하고도 오래 갈 줄 아느냐?"



하면서 기절하셨다. 이에 경찰은 어머님을 김씨네에게 맡기고 가 버렸다.



그 후에 경찰이 물으면 어머님은,



"그렇게 말썽 많은 길은 안 떠난다"



하시고는 목수를 불러 다시 집을 수리하고 집물(什物)을 마련하시는 등 오래 사실 모양을 보이셨다.



이러하신 지 수삭 후에 어머님은 송화 동생을 보러 가신다 칭하고 신이를 데리시고 신천으로, 재령으로, 사리원으로 도막도막 몸을 옮겨서 평양에 도착하여 숭실 중학교 재학 중인 인이를 데리고 안동현으로 가는 직행차를 타셨다.



대련서 왜 경관의 취조를 받았으나 거기서 인이의 답변으로 늙은 조모를 모시고 위해위 친척의 집으로 간다고 하여서 무사히 통과하였다. 어머님이 상해 안공근의 집을 거쳐 가흥 엄항섭의 집에 오셨다는 기별을 남경에서 듣고 나는 곧 가흥으로 달려가서 9년 만에 다시 모자가 서로 만났다.



나를 보시자마자 어머님은 이러한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나는 이제부터 너라고 아니하고 자네라고 하겠네. 또 말로 책하더라도 초달로 자네를 때리지는 않겠네. 들으니 자네가 군관 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한다니, 남의 사표(師表)가 된 모양이니 그 체면을 보아주자는 것일세."



나는 어머님의 이 분부에 황송하였고, 또 이것을 큰 은전으로 알았다.



나는 어머님을 남경으로 모셨다가 따로 집을 잡고 계시게 하다가 1년이 못하여 장사로 가게 된 것이었다.



어머님이 남경에 계실 때 일이다. 청년단과 늙은 동지들이 어머님의 생신 축하연을 베풀려 함을 눈치채시고 어머님은 그들에게 그 돈을 돈으로 달라, 그러면 당신이 자시고 싶은 음식을 만들겠다 하시므로 발기하던 사람들은 어머님의 청구대로 그 돈을 드렸더니 어머님은 그것으로 단총 두 자루를 사서 그것을 독립 운동에 쓰라 하고 내어 놓으셨다.









▣ 김항용 - 가슴 찡한 내용을 읽었습니다.

▣ 김재이 - 정말 훌륭한 어머니께서 훌륭한 아들을 두셨습니다

▣ 김영윤 -

▣ 김주회 - 잘 읽었습니다. 옛부터 들어온 이야기 "큰 인물 뒤에는 반드시 훌륭하시고 현명하신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혹시 현풍곽씨 아니신가요? 저의 21대조 영삼사사공(휘천)의 배위, 즉 안렴사공(휘사렴)의 어머니도 삼한 국대부인 현풍곽씨(곽원진의 따님) 이십니다.

▣ 김윤만 - 자식의 체면을 살펴 주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감동깊게 읽었습니다.

▣ 솔내영환 - 예. 곽낙원여사의 본향은 현풍입니다.

▣ 태영/문 - !!! 감사합니다.

▣ 김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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