京畿道安金史資料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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郡/김태영 작성일02-11-19 07:33 조회1,821회 댓글0건본문
京畿道安金史資料集
[태조실록 권6, 태조3년 8월 11일(무인)]
o 임금이 좌시중(左侍中) 조준(趙浚), 우시중(右侍中) 김사형(金士衡)에게 서운관(書雲觀)이 전조(前朝) 말기에 <개성> 송도(松都)의 지덕이 쇠했다고 하고 이제 도리어 송도 명당이 좋다고 하니 서운관 관리로 하여금 각각 도읍될 만한 곳을 알리게 하라고 하였는데 서운관 관리가 부소(扶蘇) 명당과 다음으로 남경(南京)을 말함.
[태조실록 권9, 태조5년 3월 4일(신유)]
o 자은도승통(慈恩都僧統) 종림(宗林)이 전 판사(判事) 윤안정(尹安鼎)과 함께 <광주> 판교원(板橋院)을 짓고, 성 쌓는 사람으로 왕래 하다가 병이 난 자를 진찰시키고 약을 지어 구료 한데다 음식도 공급한 것을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이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미두(米豆)와 염장(鹽醬)을 내려줌.
[태조실록 권13, 태조7년 2월 30일(정미)]
o <양주> 회암사(檜巖寺)에 거둥하여 왕사(王師) 자초(自超)를 보고, <양주> 풍천(楓川)에 머물러서 동북면(東北面)이 사시대향(四時大享)으로 조폐하니 면할수 있는 방법을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에게 물으라고 하니 소신(小臣)과 여러 사절(使節)의 왕래를 줄이면 될것이라고 아룀.
[정종실록 권1, 정종1년 1월 2일(계유)]
o <양주> 홍제원(弘濟院)에 거둥하여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을 전송함.
[정종실록 권2, 정종1년 7월 19일(정해)]
o 여러 공후(公侯)와 재집(宰執)에게 명하여, 우정승(右政丞)김사형(金士衡), 판삼사사(判三司事)설장수(楔長壽), 정당(政堂)하윤(河崙)을 <개성> 태평관(太平館)에서 잔치 하도록함.
[태종실록 권2, 태종1년 12월 21일(을해)]
o 좌정승(左政丞)김사형(金士衡)을 <양주>소요산(逍遙山)에 보내어 태상왕(太上王)을 문안함.
[세종실록 권6, 세종1년 11월 15일(을묘)]
o 김구덕(金九德)이 향과 제문을 받들고 일곱번째의 재를 <양주>개경사(開慶寺) 에서 베풂.
[세종실록 권13, 세종3년 8월 5일(을미)]
o 임금이 김익정(金益精)을 시켜 <광주> 헌릉(獻陵)에 제사할 때 백의(白衣)가 아닌 담복(淡服)차림으로 행사 한것으로 하연(河演)을 꾸짖음.
[세종실록 권13, 세종3년 9월11일(신미)]
o 상왕(上王)이 지병조사(知兵曹事) 민의생(閔義生)을 임금에게 보내어, 휘호(徽號)를 봉숭하는 내일 비가 올지 모르니 임금이 오늘밤 미리 <양주> 낙천정(樂天亭)으로 거둥 하라는 뜻을 전하자, 임금이 지신사(知申事) 김익정(金益精)을 보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인정전(仁政殿)에서 존호(尊號)를 올리게 해달라고 청함.
[세종실록 권13, 세종3년 10월 6일(을미)]
o 변계량(卞季良), 지신사(知申事)김익정(金益精)을 <고양>벽제역(碧蹄驛)에 보내 명사(明使)를 위로 하게함.
[세종실록 권39, 세종10년 3월 10일(임진)]
o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낸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김구덕(金九德)이 졸(卒)함.
[세종실록 권51, 세종13년 2월 25일(경신)]
o 특명으로 전 총제(摠制) 김익정(金益精)을 경기감사로 제수함.
[세종실록 권58, 세종14년 12월 18일(계묘)]
이조참판(吏曹參判) 김익정(金益精)이 금송(禁松)과 각도 공부(貢賦) 책정등의 문제를 아룀.
[세종실록 권68, 세종17년 4월 20일(신유)]
o 집현전(集賢殿)부제학(副提學) 김돈(金墩)등이 <양주>회암사(檜巖寺)에서 큰 법회(法會)를 벌인 것이 백성을 미혹(迷惑)하는 일이니 유사(攸司)에게 명하여 불사(佛事)를 주관하는 중을 죄주고, 불사에 사용하는 콩과 조, 베와 비단을 거두어 굶주린 백성들과 국가의 용도에 사용하여 백성들의 미혹함을 끊계 해달라고 상소하자 계본(啓本)을 그대로 머물러 두게함.
[세종실록 권68, 세종17년 6월 12일(임자)]
o 사신(使臣) 이충(李忠)이 직산(稷山)에서 돌아오자, 우부승지(右副承旨) 김돈(金墩)을 한강(漢江)에 보내 맞이 하게함.
[세종실록 권71, 세종18년 1월 26일(임진)]
경기감사를 지낸 형조참판(刑曹參判) 김익정(金益精)이 졸(卒)함.
[세종실록 권82, 세종20년 9월 25일(병오)]
o 찬성(贊成)신개(申槪)가 <광주> 헌릉(獻陵)의 비문에 적힌 무인년(戊寅年)의 기록이 미미하거나 완곡하니 이를 대서특서(大書特書)해야 한다고 아뢰자,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김돈(金墩)으로 실록(實錄)을 상고토록 한 뒤 실록의 기록이 간략하나 실록을 고칠수 없으니, 비문을 소상히 고쳐 써야 할것라 이르고 이를 신개와 의논토록 명함.
[세종실록 권85, 세종21년 4월 21일(정유)]
o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김돈(金墩)에게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서울로 불러들인 승려 행호(行乎)에게 사라(紗羅)와 저포(紵布)를 주어 다시 산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어떠한가를 의논하자, 김돈이 서늘한 가을을 기다려 산으로 돌려 보내되 옷의 재료를 주는 것은 성상의 재결에 있다고 대답하자, 행호를 <고양> 대자암(大慈庵)에 머물게 했다가 여름을 지내고 서늘한 때를 기다려 산으로 돌아 가도록 처치 하겠다고 김돈에게 이름.
[문종실록 권10, 문종1년 10월 27일(임진)]
o 계모의 상을 입은 수원부사(水原府使) 김맹헌(金孟獻)을 집의(執義)로 낙점함.
[세조실록 권8, 세조3년 6월 26일(무오)]
o 승지(承旨) 김질(金 石質)이 포천(抱川)에 있는 어미를 근친하기를 원하니 임금이 역마(驛馬)를 내 주게하고, 경기관찰사에게 주찬(酒饌)을 마련하여 주게함.
[세조실록 권16, 세조5년 4월 10일(계축)]
o 좌승지(左承旨) 김질(金 石質)을 별선위사(別宣慰使)로 개성부(開城府)에 보냄.
[세조실록 권22, 세조6년 10월 6일(무신)]
o 대장(大將) 김질(金 石質)이 여러 진(鎭) 군사가 군목(軍目)과 맞지 않다하여 경기관찰사 황효원(黃孝源), 광주진장(廣州鎭將) 유지(庾智), 수원진장(水原鎭將) 최제남(崔悌男)을 국문하기를 청하였으나 이를 용서함.
[세조실록 권41, 세조13년 2월 26일(임술)]
o 병조(兵曹)에서 팔도군적사(八道軍籍使) 김질(金 石質)의 계본에 의거하여 왕래가 쉬운 충청도와 경기도의 사람으로 조례를 자청해줄 것을 아뢰자 그대로 따름.
[세조실록 권41, 세조13년 3월 18일(계미)]
o 성균직강(城均直講) 김유(金紐)와 사예(司藝) 유희익(兪希益)등에게 명하여 <광주> 영릉(英陵)에 가서 인지의(印地儀)를 가지고 땅을 측량해 보아 시험하게 함.
[성종실록 권3, 성종1년 2월 14일(계해)]
o 대사간(大司諫) 김수녕(金壽寧)이 경기의 부역(賦役)이 다른 도에 비해 심하므로 공부(貢賦)를 반으로 줄여 주도록 청함.
[성종실록 권8, 성종1년 11월 2일(병자)]
o 경기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 김유(金紐)가 재상(災傷)과 연분(年分)의 등제(等第)시에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해 책을 만드는 대신에 도행장(導行帳)을 등사 하기를 청함.
[성종실록 권11, 성종2년 8월 2일(임인)]
o 대사간(大司諫) 김수녕(金壽寧)등이 사리(私利)를 추구한 김국광(金國光)을 죄를 나열하며 세조조(世祖朝)에 <개성> 산예역(散猊驛)의 조역(助役)을 폐치(廢置)하여 수중(手中)에 두려고 했었다는 것 등을 상소함.
[성종실록 권13, 성종2년 11월 11일(기유)]
o 경기의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으로 나갔던 김유(金紐)에게 전년도의 경기 실상에 대해 물음.
[성종실록 권18, 성종3년 5월 21일(정사)]
o 경기와 충청도(忠淸道)에 홍수가 나서 살곳을 잃은 자가 많으므로 시강관(侍講官) 김유(金紐)가 이들을 진휼 하자고 청함.
[성종실록 권94, 성종9년 7월 15일(갑술)]
o 대사헌(大司憲) 김유(金紐)가 경기, 황해, 평안도 등의 점마(點馬)를 흉년으로 인해 보내지 않은 것과 같이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등에도 보내지 말기를 청하자, 그대로 따름.
[성종실록 권114, 성종11년 2월 14일(갑자)]
o 대사간(大司諫) 김작(金 石昔)과 지평(持平) 복승정(卜承貞)이 삼대비(三大妃)가 <양주> 광릉(光陵)에 참배(參拜) 하는것을 정지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 하지 않음.
[성종실록 권155, 성종14년 6월 6일(정묘)]
o 김작(金 石昔)을 경기 관찰사로 삼음.
[성종실록 권155, 성종14년 6월 16일(정축)]
o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이복선(李復善)이 전례에 따라 부모가 살아 있는 곳인 경기에 관찰사로 임명된 김작(金 石昔)을 교체 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 하지 않음.
[성종실록 권215, 성종19년 4월 28일(신유)]
o 경기관찰사를 지낸 형조판서(刑曹判書) 김작(金 石昔)이 졸(卒)함.
[성종실록 권271, 성종23년 11월 4일(신미)]
o 김성동(金誠童)을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평부사(富平府使)로 삼음.
[성종실록 권287, 성종25년 2월 20일(기묘)]
o 경기관찰사 이세좌(李世佐)가 백성을 잘 다스린 부평부사(富平府使) 김성동(金誠童), 전 남양부사(南陽府使) 박처륜(朴處綸), 지평현감(砥平縣監) 고형산(高荊山)의 가자(加資)를 청하자 그대로 따름.
[성종실록 권287, 성종25년 2월 23일(임오)]
o 헌납(獻納) 남세담(南世聃)이 부평부사(富平府使) 김성동(金誠童)의 가선대부(嘉善大夫) 가자(加資)가 부당 하다고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음.
[성종실록 권287, 성종25년 2월 27일(병술)]
o 김성동(金誠童)을 가선대부(嘉善大夫) 부평도호부사(富平都護府使)로 삼음.
[연산군일기 권9, 연산군1년 10월 29일(무인)]
o 부평부사(富平府使)를 지낸 김성동(金誠童)이 졸(卒)함.
[연산군일기 권19, 연산군2년 11월 19일(임술)]
o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김수동(金壽童)이 12월 12일에 임금이 <광주> 선릉(宣陵)에 거둥하려는 계획에 대해 강물이 풀리는 시기에 얼음위를 건너는 위험성을 들어 정지 할 것을 상차(上箚)함.
[연산군일기 권44, 연산군8년 6월 16일(병진)]
o 특지(特旨)로 김수동(金壽童)을 경기관찰사에 제수함.
[연산군일기 권46, 연산군8년 9월 14일(계미)]
o 경기감사 김수동(金壽童)에게 도내(道內)에 천둥과 번개가 미친 곳을 자세히 물어보고, 아울러 우박이 내렸는지의 여부도 조사하여 아뢰라고 전교함.
[연산군일기 권47, 연산군8년 11월 3일(임신)]
o 경기관찰사 김수동(金壽童)이 재해가 심한 수원(水原), 안산(安山),부평(富平), 김포(金浦), 통진(通津), 파주(坡州), 장단(長湍)등지의 공물(供物)과 조세(租稅)는 경창(京倉)으로 올리지 말고 주창(州倉)에 바쳐 운반하는 폐단을 없앨것과, 형을 구타한 광주(廣州)의 이옥산(李玉山)을 문초할 것 등을 아룀.
[연산군일기 권48, 연산군9년 2월 10일(정미)]
o 경기관찰사 김수동(金壽童)이 이천(利川)백성 김계손(金季孫)의 나이가 1백3세라고 아뢰자, 말(馬)을 주어 서울로 보내도록 하라고 전교함.
[연산군일기 권48, 연산군9년 2월 12일(기유)]
o 경기관찰사 김수동(金壽童)이 금년의 흉년이 매우심하여 도내의 곡식이 부족할 것 같으니, 예전의 예대로 경창(京倉)의 쌀을 내어 구휼하기를 청하자, 그대로 따름.
[중종실록 권9, 중종4년 윤9월 18일(정축)]
o 김수동(金壽童), 박원종(朴元宗)등이 공물(貢物) 배정시 각 고을의 생산을 상정(詳定)하여 백성들이 편리하게 해줄 것을 아뢰자, 그대로 따름.
[중종실록 권10, 중종5년 3월 9일(갑자)]
o 김수동(金壽童)이 <풍덕> 제릉(齊陵), <여주> 영릉(英陵) 제사에 배행(陪行)하는 백관들이 융복(戎服)을 입을 것을 아뢰었으나, 예전대로 행하도록 명함.
[중종실록 권13, 중종6년 4월 24일(계묘)]
o 김수동(金壽童)등이 여주(驪州)의 예에 따라 임시로 광주(廣州)의 판관을 혁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아뢰자, 그대로 따름.
[중종실록 권15, 중종7년 2월 1일(병자)]
o 영의정(領議政) 김수동(金壽童)이 명을 받고 <과천> 청계산(淸溪山)에 사냥 하러감.
[중종실록 권22, 중종10년 5월 7일(계사)]
o 장령(掌令) 김희수(金希壽)가 효행(孝行)이 뛰어난 개성부(開城府) 충순위(忠順衛) 민백화(閔伯和)의 포장(褒奬)을 청하자, 해조(該曹)에 문의 하라고 전교함. 사헌부(司憲府)에서 어버이 상사(喪事)에 근신하지 않은 마전군수(麻田郡守) 김수경(金壽卿)등을 파직 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 하지 않음.
[중종실록 권30, 중종12년 12월 3일(갑진)]
o 이조판서(吏曹判書) 한세환(韓世桓)등이 비어있는 과천현감(果川縣監)에 김식(金湜)을 제수하는 일을 의논하자, 그대로 따름.
[중종실록 권36, 중종14년 9월 25일(병진)]
o 정언(正言) 김익(金 )이 경기의 학교가 문란함을 아뢰고, 시독관(試讀官) 조우(趙佑)는 굶주린 기전(畿甸) 백성들을 구제해야 한다고 아룀.
[중종실록 권37, 중종14년 12월 25일(을유)]
o 사간원(司諫院)이 <고양> 희릉(禧陵)참봉(參奉) 봉천상(奉天祥)등이 종(奴)처럼 김식(金湜)을 받들었다면서 개차하기를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음.
[중종실록 권39, 중종15년 4월 15일(임진)]
o 배릉(拜陵)때 수가하는 관원은 시복(時服)으로 다녀와야 하는데, <파주> 공릉(恭陵), <여주> 영릉(英陵), <풍덕> 제릉(齊陵)은 융복(戎服)으로 수가하고 있으므로 이를 어떻게 할지 승지(承旨) 김희수(金希壽)가 아뢰니, 전례대로 하라고 전교함.
[중종실록 권40, 중종15년 7월 17일(계묘)]
o 사헌부(司憲府)에서 새 장단부사(長湍府使) 김수경(金壽卿)이 크게 물론이 있으므로 갈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음.
[중종실록 권49, 중종18년 11월 29일(을미)]
o 사헌부(司憲府)에서 이천부사(利川府使) 김수경(金壽卿)이 벼슬살이를 삼가지 않으므로 갈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음.
[중종실록 권62, 중종23년 8월 20일(기미)]
o 집의(執義) 김공예(金公藝)가 추석때 청령위(淸寧尉) 옹주(翁主)가 문밖에 나갔다 돌아올적에 <여주>보재원(普濟院)에 머물렀는데, 한천위(漢川尉)와 안양군(安陽君) 부인이 호종(扈從)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인들이 외람된 짓을 하였으므로 추고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름.
[중종실록 권68, 중종25년 5월 16일(을사)]
o 홍문관(弘文館) 직제학(直提學) 김공예(金公藝)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호조판서(戶曹判書)를 경기감사로 제수하여 백성을 구제하려 하였으나 사간원(司諫院)의 의논이 있어 개정 하였으므로 해로울 것이 없다고 전교함.
[명종실록 권2, 명종원년 10월 17일(병오)]
o 사인(舍人) 김노(金魯)가 아뢰기를, 의금부(義禁府)에서 행이(行移)한 공문이 9월8일에 경기에 도착 되었으므로 공문을 못받아 이행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안변부사(安邊府使) 이구(李久)를 파직시키는 것은 지나친 듯하다고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음.
[명종실록 권6, 명종2년 9월 9일(정사)]
o 사인(舍人) 김주(金澍)가 삼공(三公)의 뜻으로 아뢰기를, 각도의 재상어사(災傷御史)가 오갈적에 그 폐단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각도에서 두서너 고을만 선택하게 할 것을 말함.
[명종시록 권7, 명종3년 4월 15일(경신)]
o 부응교(副應敎) 김주(金澍)를 경기에 파견하여 구황을 잘하는지의 여부를 살피게함.
[명종실록 권13, 명종7년 11월 23일(신축)]
o 김주(金澍)를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는데, 여주(驪州)에서 산업(産業)을 경영 하면서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비난이 많았다고 사신(史臣)이 논함.
[명종실록 권21, 명종11년 8월 25일(신해)]
o 김주(金澍)를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로 삼음.
[명종실록 권30, 명종19년 2월 17일(경신)]
o 대간(臺諫), 시종(侍從)을 거친 수령으로서 경기 및 다른 도에 있는자를 대간(臺諫), 시종(侍從)에 추천하라고 하였는데, 이헌국(李憲國), 김억령(金億齡)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전교함.
[선조실록 권4, 선조3년 7월 9일(을해)]
o 개성유수(開城留守) 김덕룡(金德龍)에게 번거롭게 진소(陳疏)하지 말라고 답함.
[선조실록 권4, 선조3년 8월 8일(계묘)]
o 개성유수(開城留守) 김덕룡(金德龍)등이 소를 올려 을사년(乙巳年:1545년,인종1년)의 일에 대해 억울한 죄는 씻고, 죄지은것은 다스릴 것을 청함.
[선조실록 권15, 선조14년 4월 5일(무술)]
o 경기어사의 서장에 따라 도내에 선정(善政)을 베푼 인천부사(仁川府使) 임영로(任榮老), 고양군수(高陽郡守) 이소(李韶), 죽산현감(竹山縣監) 김취려(金就礪)등에게는 향표리(鄕表裡) 한벌을 주고, 구황을 착실히 하지않은 여주목사(驪州牧使) 이인(李認)과 부평부사(富平府使) 김시민(金時敏)은 파출하라고 명함.
[선조실록 권17, 선조16년 8월 15일(갑자)]
o 김수(金 目卒)가 파주(坡州)에 도착해서 상소하여 봉명(奉命)의 일을 사양하니, 임금이 마음놓고 맡은바 직무를 다하라고 답함.
[선조실록 권18, 선조17년 6월 1일(병오)]
o 지례현감(知禮縣監) 김첨(金瞻)등이 술을 마시며 놀다 장난으로 ‘큰도적이 고을에 들어와 관사의 기물을 몽땅 가져갔다’는 통문을 돌려 경기등 각 고을에 퍼지니, 경기감사가 조사해본 결과 허위임을 알고 계문(啓聞)하니 양사(兩司)가 나국을 청했는데, 곧 풀려남.
[선조실록 권18, 선조17년 6월 20일(을축)]
o 김첨(金瞻)과 권응시(權應時)의 사건에 대해 양사(兩司)가 잡아다 추국하여 이유를 밝히고자 하니, 그대로 따름.
[선조실록 권21, 선조20년 8월 27일(갑술)]
o 사간원(司諫院)이 광주목사(廣州牧使) 김억령(金億齡)은 술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으므로 파직할 것을 아뢰자, 그대로 따름.
[선조실록 권21, 선조20년 9월 18일(갑진)]
o 김찬(金瓚)을 경기감사로 삼음.
[선조실록 권21, 선조20년 9월 20일(병오)]
o 사헌부(司憲府)가 경기감사 김찬(金瓚)은 당상(堂上)에 승품된지 6~7개월만에 2품으로 올랐으니 개정할 것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음.
[선조실록 권27, 선조25년 6월 21일(기유)]
o 경상도관찰사 김수(金 目卒)등이 기병(騎兵), 보병(步兵) 6만여인을 거느리고 수원(水原)에 진을 쳤는데 양천(陽川) 북포를 경유하여 군사를 건너려 하니 앞뒤 양쪽에서 들이치는 계책을 조정에서 급속히 지휘해 줄 것을 치계함.
[선조실록 권54, 선조27년 8월 16일(신유)]
o 접반사(接伴使) 김찬(金瓚)이 임진강(臨津江)에는 찰방(察訪)을 두어 점검 함으로써 몰래 숨어서 강을 건너는 폐단이 없도록 경기감사에게 하시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름.
[선조실록 권64, 선조28년 6월 14일(을묘)]
o 비변사(備邊司)가 둔전(屯田)의 네가지 이익을 말하면서, 경기로부터 변방에 이르기 까지 둔전을 크게 개간하되 안집사(安集使)를 제조(提調)로 개칭하고, 유근(柳根)과 김수(金 目卒)를 아울러 제조에 차임하고 도제조(都提調)는 의망(擬望)하여 차출할 것 등을 아뢰니 그대로 따름.
[선조실록 권65, 선조28년 7월 20일(신묘)]
o 김찬(金瓚)이 사절(死節)하여 정표(旌表)할 만한 사람의 사적(事蹟)을 인출, 반포하기 위해 상고할 만한 문적(文籍)의 근거가 없음을 아뢰니, 함께 인쇄 하도록 계하(啓下)한 효자와 열녀에 대해서도 각도에 행이(行移)하여 사실대로 장계(狀啓)토록 할 것을 이름.
[선조실록 권68, 선조28년 10월 13일(임자)]
o 대사헌(大司憲) 김찬(金瓚)이, 임진년(壬辰年:1592년, 선조25년)에 어머니를 만나러 고양(高陽)에 갔다가 영평(永平)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것과 강화(江華)에 도달하여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鄭澈)이 부사(府使)로 삼는다고 하여 제때에 환조(還朝)하지 못한 죄등을 들어 파직을 청하였으나 사퇴하지 말라고 답함.
[선조실록 권89, 선조30년 6월 22일(신사)]
o 헌납(獻納) 김대래(金大來)가 옹주(翁主)등을 우선 강화(江華)로 피난시키라는 전교 때문에 백성들이 흩어지니 경솔히 동요하여 미치지 못할 후회를 끼쳐서는 안되므로 속히 제궁(諸宮)을 이피시키는 명을 거두도록 할 것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음.
[선조실록 권95, 선조30년 12월 23일(기묘)]
o 호조판서(戶曹判書) 김수(金 目卒)가, 본도의 양곡이 부족하면 양호(兩湖)부근과 충주(忠州)에 현존한 양식을 군전(軍前)에 수송하고 이것도 부족하면 경기 여주(驪州), 이천(利川)의 양곡을 수송하여 보태는 것이 편리할 듯 하다고 아룀.
[선조실록 권133, 선조34년 1월 3일(임인)]
o 우승지(右承旨) 김시헌(金時獻)이, 도망쳐 <양주> 회현방(會賢坊)에 숨어있는 중국군사를
[선조실록 권141, 선조34년 9월 30일(갑자)]
o 지평(持平) 김정일(金鼎一)이, 특별휴가를 얻어 부모님을 뵈러 가면서 파주(坡州)와 장단(長湍)에서 조반과 양식, 찬거리를 보내와 받았으며 경기감사의 장계에 대한 회계공사(回啓公事)에서 공사(公事)가 아니면 지공(支供)을 할수없다고 하였으니 중한 지위에 있으면서 잘못을 했으므로 파직시킬 것을 아뢰었으나, 사피하지 말라고 답함. 장령(掌令) 이진빈(李軫賓)이 경기감사의 장계로 인해 가벼이 언관을 채직시키는 것은 소요스러운 단서를 만들수 있으니 대사헌(大司憲) 성영(成泳)과 지평(持平) 김정일(金鼎一)모두 출사를 명할 것을 아뢰자 그대로 따름.
[선조실록 권160, 선조36년 3월 27일(계미)]
o 승정원(承政院)이 신응구(申應矩)의 일로 유몽인(柳夢寅)을 불러 물으니, 유몽인이 전 부사(府使) 김수남(金壽男)및 양근(楊根)의 족인(族人) 신인(辛麟)의 말이 같아서 서계한것이며 허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 핵실할 것을 청한 것 이라고 답하자, 사헌부(司憲府)에 내리라고 전교함.
[선조실록 권169, 선조36년 12월 17일(무술)]
o 경기감사 김수(金 目卒)가, 죽산부(竹山府)에서 이달 9일 땅이 진동하며 천둥 같은 소리가 났다가 그쳤는데 천지가 폐색(閉塞)되는 겨울에 이변이 비상하다고 치계하자, 예조(禮曹)에계하함.
[선조실록 권171, 선조37년 2월 29일(정유)]
o 경기감사 김수(金目卒)가 중외(中外)의 방납하는 폐단이 심하여 백성을 소진시키고 있으니 폐단을 없앨 방도를 해조로 하여금 규례를 만들어 정하게 할 것을 아뢰자, 병조(兵曹)에 계하함.
[선조실록 권173, 선조37년 4월 17일(정유)]
o 행(行) 경기관찰사 김수(金 目卒)가, 광주목사(廣州牧使) 이수록(李綏祿)등의 첩정에 4월12일 비와 우박이 섞여 내려 봄보리와 가을보리가 모두 손상되었다라고 한내용을 장계함.
[선조실록 권178, 선조37년 9월 28일(을해)]
o 경기감사 김수(金 目卒)가, 장단(長湍)지방에 천둥과 번개가 치며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져 곡식이 무더기로 떨어졌다고 장계함.
[선조실록 권180, 선조37년 10월 12일(무오)]
o 경기감사 김수(金 目卒)가, 수원(水原), 죽산(竹山), 파주(坡州), 강화(江華)등에 산성을 수축하여 숙위군(宿衛軍)의 부족 문제를 해결 하자고 아룀.
[선조실록 권181, 선조37년 11월 3일(기묘)]
o 경기감사 김수(金 目卒)가, 김포(金浦)지역 10월29일 유시에 땅이 진동하는 소리가 나다 그쳤으며, 양천(陽川)지역에서는 땅이 진동하는 소리가 화포 소리처럼 들렸다고 아룀.
[선조실록 권181, 선조37년 11월 6일(임오)]
o 경기감사 김수(金 目卒)가, 백성을 잘다스린 부평부사(富平府使)황치경(黃致敬), 이천부사(利川府使)이광길(李光吉), 적성현감(積城縣監)이유청(李幼淸), 통진현감(通津縣監)윤신(尹藎)등을 각별히 포장(褒奬)할것을 아룀.
[선조실록 권198, 선조39년 4월 9일(정미)]
o 개성부(開城府) 별영위사(別迎慰使)로 갔던 좌승지(左承旨) 김시헌(金時獻)이 개성에 들어온 조사(詔使)에게 어첩(御帖)과 예단(禮單)등을 증정한 일을 아룀.
[광해군일기 권53, 광해군4년 5월 24일(정사)]
o 김시헌(金時獻)을 <양주> 성릉(成陵) 헌관(獻官)으로 임명함.
[광해군일기 권58, 광해군4년 10월 16일(병자)]
o 김시헌(金時獻)이 각도 경재소(京在所)의 복설문제를 대신들과 다시 의논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름.
[광해군일기 권117, 광해군9년 7월 15일(정축)]
o <안성> 청룡사(靑龍寺) 부근에 장사 지내려는 김자점(金自點)의 청을 허락 하지 않음.
[광해군일기 권126, 광해군10년 4월 29일(무오)]
o 광주목사(廣州牧使) 김두남(金斗南)의 보고를 토대로 경기감사 유희량(柳希亮)이 올린 장계(狀啓)에 따라 여주(驪州)와 이천(利川)에서 역모를 꾀한 박의립(朴義立), 봉충(奉忠), 조대윤(趙大允),서준(徐濬)을 잡아 조사하게 함.
[광해군일기 권127, 광해군10년 윤4월 1일(기미)]
o 광주목사(廣州牧使) 김두남(金斗南)이 익명서(匿名書)에 의거해 여주(驪州)와 이천(利川)에서 이능운(李凌雲)과 이계종(李繼宗)을 체포해 가두고, 봉충(奉忠)과 박의립(朴義立)에 대해서도 조사함.
[인조실록 권15, 인조5년 1월 18일(을유)]
o 김자점(金自點)에게 순검사(巡檢使)의 직을 주어 강화(江華)를 주관하게 함.
[인조실록 권15, 인조5년 2월 27일(갑자)]
o 임진강(臨津江)을 방어하는 것이 무엇보다 긴요하므로 김자점(金自點)을 임진수어사(臨津守禦使)로 삼아 지키게 함.
[인조실록 권15, 인조5년 2월 28일(을축)]
o 수어사(守禦使) 김자점(金自點)을 인견하고 임진강(臨津江)의 방어 계책을 의논함.
[인조실록 권24, 인조9년 6월 23일(을축)]
o 각도의 군사를 점검하여 출진(出鎭)한 날이 다가오매 비국(備局)에서 김시양(金時讓)을 8도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통솔 하게함.
[인조실록 권25, 인조9년 7월 4일(병자)]
o <강화> 강도(江都)를 보장(保障)으로 적의 침입을 대비 하자는 이원익(李元翼)의 차자(箚子)로 인해 비국(備局)에서 김자점(金自點)을 강도구관당상(江都句管堂上)으로 추천하니, 그대로 따름.
[인조실록 권25, 인조9년 8월 23일(갑자)]
o 이수일(李守一), 이서(李曙), 김자점(金自點), 김시양(金時讓)등이 <강화> 강도(江都)에서 돌아와 방어책에 대해 아룀.
[인조실록 권25, 인조9년 8월 26일(정묘)]
o 우의정(右議政) 이정구(李廷龜)가 도성(都城)의 방어와 <강화> 강도(江都)의 보장(保障)에 관해 차자(箚子)를 올리면서 김시양(金時讓)과의 의견 차이를 이유로 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음.
[인조실록 권25, 인조9년 9월 16일(정해)]
o 강도구관당상(江都句管堂上) 김자점(金自點)이 나주(羅州) 등지를 <강화> 강도(江都)에 소속시켜 중국과 통상케 하는 등의 경비조달 대책을 아룀.
[인조실록 권28, 인조11년 2월 12일(갑술)]
o 김자점(金自點)을 대신하여 호조판서(戶曹判書) 김신국(金藎國)으로 하여금 <강화> 강도(江都)의 관리 책임을 겸임하도록 함.
[인조실록 권40, 인조18년 1월 27일(기묘)]
o 비국(備局)의 요청으로 김자점(金自點)을 강화유수(江華留守)로 삼음.
[인조실록 권40, 인조18년 윤1월 13일(을미)]
o 비국(備局)에서 강화유수(江華留守)의 임명에 대해 논란이 많은 김자점(金自點)대신 다른 사람을 선임 하자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음.
[인조실록 권48, 인조25년 9월 3일(경자)]
o 영의정(領議政) 김자점(金自點)이 요역을 견감하는 일을 연분(年分)이 결정되기 전에 시행하여 경기 백성을 보전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음.
[인조실록 권50, 인조27년 3월 24일(계미)]
o 영의정(領議政) 김자점(金自點)이 <광주>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의 변고에 대해 언급함.
[효종실록 권5, 효종1년 8월 2일(계미)]
o 홍명하(洪命夏), 김휘(金徽), 홍처량(洪處亮)등을 경기와 양서(兩西)의 암행어사(暗行御使)로 삼음.
[현종실록 권19, 현종9년 6월 6일(계유)]
o 김휘(金徽)를 강화유수(江華留守)로 삼음.
[현종실록 권16, 현종10년 4월 23일(을유)]
o 강화유수(江華留守) 김휘(金徽)가 <강화> 철곳, 덕포(德浦), 정포(井浦)의 세진을 도로 옮기는 일에 대하여 아뢰고, 허적(許積)이 덕포는 우선 그대로 두고 철곳과 정포는 매우 중요한 곳이니 농한기에 먼저 옮기는 것이 마땅 하겠다고 아뢰자 그대로 따름.
[현종실록 권17, 현종10년 7월 13일(갑진)]
o 강화유수(江華留守) 김휘(金徽)가 <강화> 철곳첨사(僉使)와 <강화> 정포(井浦)만호(萬戶)를 농사일이 끝난뒤에 본진에 도로 이속 시켜야 하는데 곤란한점이 많다고 아뢰고, 홍중보(洪重普)는 철곳으로 진을 옮긴뒤에 별도로 별장(別將)을 두었는데 승천부(昇天府)로 옮기면 그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별장을 그대로 둘 필요가 없을 것 이라고 아뢰어 임금이 별장을 줄이도록 하라고 명함.
[현종개수실록 권21, 현종10년 10월 3일(계해)]
o 강화유수(江華留守) 김휘(金徽)가 나아가 아뢰기를, 별장(別將)을 이미 혁파했으니 이전처럼 파총(把摠)을 차출하여 군사를 관장케 하자는 것과 본부의 나룻배가 세월이 오래되어 썩어서 쓸수가 없어 바꾸었으면 하는데 물력이 부족하므로 약간의 곡식을 떼어주기를 원하니, 임금이 본부의 모미(耗米)4백섬을 내주라고 명함.
[현종실록 권18, 현종11년 2월 3일(신유)]
o 강화유수(江華留守) 김휘(金徽)가 강화도사(江華都事)를 혁파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대신들에게 물어본 뒤에 그대로 두되 군무만 관장하게 하고 민간의 일에는 간여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함.
[현종실록 권18, 현종11년 3월 20일(정축)]
o 강화유수(江華留守) 김휘(金徽)를 인견 하였는데 김휘(金徽)가 갑진년(甲辰年):1664년 현종5년) 이전의 환곡을 탕감해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각 창고의 환곡에 대하여 각 연도에 받아들이지 못한 수량을 상세히 계문(啓聞)하라고 명함.
[현종개수실록 권22, 현종11년 3월 20일(정축)]
o 강화유수(江華留守) 김휘(金徽)도 입대하여, 갑진년(甲辰年):1664년 현종5년)이전의 조곡으로서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탕감 시키기를 청하였으나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이 군향(軍餉)이라는 이유로 어렵게 여기니 각년의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나열해 기록해서 다시 품계하여 처리 하라고 명함.
* 京畿道史 資料集에서 우리 先祖님의 資料를 발취하여 보았습니다. 안사연 회워님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올려 드립니다.
▣ 김태서 - 저의 직계 할아버님 세분의 자료가 보이네요 감사합니다.
▣ 김윤만 -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귀중한 자료를 보았습니다.
▣ 김재원 -
▣ 김발용 - 감사합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귀한 자료 잘 사용하겠습니다. 노고가 크셨습니다.
▣ 솔내영환 - t새로운 자료 감사합니다. 여기에서 문온공의 아드님이신 부사공(휘명리)께서 후취부인이 계셨음이 공식적으로 확인되는군요. 부사공의 첫부인인 계림군부인(제정이달충의 따님)은 공이 40세때 돌아가시고 공은 그후 30년을 더 사셨으니 후취부인을 두셨으리라 생각되었으너데 자손도 없고, 지석이나 족보에도 기록이 없었는데 왕조실록에[맹헌(부사공의 장남]이 계모의....]란 기사를 보면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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