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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척 수리사업의 대가 金方慶과 金自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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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11-27 19:58 조회1,6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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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척 수리사업의 대가 金方慶과 金自點





사무실에서 우연히 전라북도에서 발행하는 계간지를 보다가 수리 관개 기사가 있어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니 충렬공 金方慶 할아버지와 金自點 선조의 기사가 있어 발췌 타이핑하여 소개합니다.









▣[새천년을 여는 전북] 2000년 봄호

●水利의 고장 - 전라북도 (문경민, 새전북신문 정치부장)



<전 략>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시대에는 개답이 국가적으로 장려됐고 벼농사가 널리 퍼졌다. 가뭄에 대비한 저수지의 개축과 증축등 수리사업도 활발하게 전개됐다.



여러차례에 걸친 전란, 특히 몽고의 침략에 따른 여파로 경지가 피폐해지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들이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국가적 노력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특히 고려 고종22년 (1235년) 몽고군에 밀려 강화도로 천도한 후 해상방어를 목적으로 구축한 해안 제방에 대한 기록이 <동국문헌비고>에 전해지는 등 제방축조의 토목기술이 상당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방조제를 쌓고 논을 개간하는 최초의 간척사업도 고려시대의 기록에 남아 있다.



간척사업은 고려시대 병마판관 ★김방경(金方慶)이라는 이에 의해 ♠강화도에서 처음 시작됐는데 <고려사절요> 그는 강화도 뿐 아니라 ♠정주, ♠밀양 등 전국 곳곳에서 간척사업과 수리시설을 정비하고 다녀 제방축조 토목기술 전문가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전북 고부의 ♠눌제도 그가 개축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지>에 전해온다. ---世傳高麗時金方慶因舊修築---



<중 략>

이앙법이 실시된 데에는 제언(堤堰, 방죽)과 같은 수리시설의 확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선 태종15년(1415년)에 벽골제를 수축했으며 성종7년(1476년)에는 전국 각지에 제언을 만들었다.



인조21년(1636년)에는 ★김자점(金自點)이 황해도 봉산군에 ♠어지둔보(於之屯洑)를 축조하여 약 500정보의 논을 관개하고, 경기 장호원에 ♠김자점보를 축조했다는 기록들이 전한다.







<중 략>

눌제

<동국여지지> 고부군 산천조에는 ---눌제호는 군의 8리 서쪽에 위치하며 율호(律湖)라고도 한다. 둑의 길이가 1,200보에 이르며 주변이 40리에 이른다. 김제 벽골제 다음으로 큰 호수--- 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읍시 고부면 관청리에서 줄포로 이어지는 2차선 도로가 고부 눌제의 옛 둑으로 알려져 있다. 주변의 해발고도 25m의 구릉을 가로질러서 오늘날의 고부천 상류를 막은 것이다. 눌제 역시 벽골제와 비슷한 시기인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축조연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벽골제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됐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원광대 사학과의 나종우 교수는 <유적과 유물을 통해 본 고부의 역사적 변천>이라는 논문에서 눌제는 애초 저수지의 제방이 아니라 방조제로서의 기능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했다.



즉 눌제가 벽골제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으며 그 시기는 대략 3세기 후반까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눌제는 고려시대 ★김방경이 개축했으며 조선초에는 民田으로 용도가 변경됐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부군 고적조(古跡條)에 있다. 세종 즉위 당시만 해도 눌제는 1만여결의 농경지를 몽리구역 내에 두고 있었다. <세종실록, ---古阜訥堤下可耕萬餘結---)



세종대에는 또 눌제의 대대적인 개축이 있었는데 11,580명의 인력이 동원돼 1월 상순부터 2월 상순까지 근 1개월간의 공사를 통해 제방 3,480척을 정비했다. <세종실록>. 그러나 세종2년 8월 눌제는 홍수로 인해 상당부분 훼손되었고 이런 이유로 제언을 다시 수축하고자 하는 의욕도 점차 줄어 마침내 경지로 전환된 것으로 추측된다. <세종실록> 에는 당시 전라관찰사가 고부군 일대에 큰 비가 내려 눌제가 훼손되고 제방아래 밭 600여결이 침수됐다는 보고가 기록돼 있다.



<후 략>











☞그동안 우리 홈페이지에 소개된 충렬공 할아버지의 간척 수리관개 기록을 보면

충렬공께서 몽고군 침공시 청천강 하구 정주 앞바다 위도에 입보하여 제방을 쌓고 우물을 뚫었다는 기록 <고려사>

충렬공께서 강화도 이포, 제포 등 방파제를 쌓았다는 기록 <김은회 종친 제공>과 강화도는 원래 여러 섬이었는데 몽고군 침공시 모두 간척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는 기록

충렬공께서 밀양의 수산제, 제천의 의림지를 개축하였다는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다양합니다.



이를 종합해 볼 때 몽고군 침공시 산성이나 해도로 피난해 들어가는 정책을 펼 때 강화도의 간척사업, 위도의 수리관개사업 경험이 있는 충렬공께서 전문가로서 이 시책을 전국적으로 시행하여 산성이나 해도에서의 자체 식량 조달을 도모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또한 김자점 선조님께서도 황해 봉산의 어지둔보 축조등 황해 재령평야 간척, 경기 장호원의 김자점보<김윤만 종친 제공> 등을 축조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 분야의 권위자이었던 것 같습니다.









▣ 김발용 - 정말로 귀한자료입니다. 항상 종사일을 생각하시니 지나칠수있는 한권의 책도 눈에 들어오는 모양입니다.

▣ 김재이 - 새롭게만 생각나는 내용입니다 귀한자료 감사합니다

▣ 郡/김태영 - 좋은 자료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정리하여 홈에 올리겠습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지금까지 밝혀진 자점보는 (1)황해 봉산의 어지둔보 (2)경기 장호원의 자점보 두곳 뿐인가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저는 요즘 자점 할아버지와 함께 인조. 효종 때를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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