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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충무공 김시민 장군 08 (관련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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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12-05 17:18 조회1,5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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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김시민 장군 08 (관련인물)





<야후 홈페이지>

★이헌국 李憲國 [1525~160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 전주(全州)

호 : 유곡(柳谷)

별칭 : 자 흠재(欽哉), 시호 충익(忠翼)



본관 전주(全州). 자 흠재(欽哉). 호 유곡(柳谷). 시호 충익(忠翼). 1551년(명종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575년(선조8)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1578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도승지로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수습하여 1590년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책록되고, 1592년 임진왜란 때 형조판서로 세자를 강계(江界)에 호종, 이듬해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좌참찬으로 ★김시헌(金時獻) 등과 복수군(復皐軍)을 조직하고, 1599년 우의정을 거쳐 이듬해 좌의정이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가 1601년 병으로 사직하였다.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되고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정언신(鄭彦信)

1527(중종 22)∼1591(선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입부(立夫), 호는 나암(懶庵). 예조좌랑 진(振)의 아들이다.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고, 1571년(선조 4) 호조좌랑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그뒤 전라도도사·장령·동부승지 등을 거쳤다.

그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함경도병마절도사로 나가 변민(邊民)을 잘 다스리고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미를 풍족하게 비축하였다. 이어 대사헌으로 옮겼다가 부제학이 되었다.

1582년(선조 16)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오자 우참찬으로 함경도도순찰사에 임명되어 막하로 ★이순신(李舜臣)·★신립(申砬)·★김시민(金時敏)·★이억기(李億祺) 등 뛰어난 명장들을 거느리고 적을 격퇴하였다.

이어 함경도관찰사로 북쪽 변방을 방비하고 병조판서에 승진되었다.

1589년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후 그 잔당에 대한 옥사를 다스리고는 위관(委官)에 임명되었으나, 서인 정철(鄭澈)의 사주를 받은 대간으로부터 정여립의 구촌친(九寸親)이므로 공정한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아, 위관을 사퇴하고 이어서 우의정도 사퇴하였으며, 정철이 위관을 대신하였다.

그뒤 역가문서(逆家文書)가운데에 그가 들어 있다는 것을 구실로 정철 등으로부터 계속 정여립의 일파로 모함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투옥, 사사(賜死)의 하교가 있었으나 감형되어 갑산에 유배, 그곳에서 죽었다.

1599년에 복관되었다. 문경의 소양사(瀟陽祠)에 제향되었다.







<야후 홈페이지>

★조헌 趙憲 [1544~1592]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 : 배천

호 : 중봉·도원·후율

별칭 : 시호 문열, 자 여식

활동분야 : 정치·군사

주요저서 : 《동환봉사》 《중봉집》



본관 백천(白川). 자 여식(汝式). 호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시호 문열(文烈).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하생. 1567년(명종 2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정주교수(定州敎授)가 되고, 1572년(선조 5) 정자(正字)로 왕이 절에 향(香)을 하사하는 것을 반대하여 삭직된 뒤 곧 저작(著作)에 기용되고, 1574년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호조와 예조의 좌랑·감찰을 거쳐 통진현감(通津縣監)으로 남형(濫刑)한다는 탄핵을 받고 부평(富平)에 유배되었다. 1581년 공조좌랑에 등용되어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종묘서령(宗廟署令)을 거쳐 1582년 보은현감(報恩縣監)으로 나갔다. 1586년 공주제독관이 되어 동인이 이이·성혼을 추죄(追罪)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고향에 내려가 임지를 이탈한 죄로 파직당하였다.



1589년 동인을 공박하다가 길주에 귀양가고, 그해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이 일어나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여 명을 모아 영규(靈圭) 등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錦山)으로 향했으나,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대부분 해산되고, 700명의 의병으로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이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1754년(영조 30) 영의정에 추증,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금산의 성곡서원(聖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중봉집》이 있고, 저서에 《동환봉사》등이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야후 홈페이지>

★이탕개의 난 尼蕩介-亂

1583년(선조 16) 여진인(女眞人) 추장 이탕개를 주동 인물로 하여 일어난 여진인의 반란.



여진족에 대한 정책은 세종대왕의 4군(郡)·6진(鎭)의 개척 이래 그들을 회유하고 정벌하면서 교린정책을 썼지만, 여진족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였다. 이탕개는 여진족의 우두머리로서, 선조 초기부터 함경도의 6진에 출입하면서 조선 조정에 공순(恭順)의 뜻을 표시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그에게 벼슬을 주며 후대하였다. 그러던 중에 만주와 조선의 국경지대인 경원성(慶源城)에 사는 여진인들이 전(前) 진장(鎭將)을 비난하는 소문을 퍼뜨리면서 민심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때 이탕개는 그들과 합세하여 조선에 반기를 들었다.



반란이 발생하였을 초기에 경원부사(慶源府使) 김수(金璲)가 여진군에게 패퇴하자, 그들은 성을 점령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경원부 내의 모든 진(鎭)과 보(堡)를 점령하여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이웃 고을인 온성(穩城)의 부사 신립(申砬)과 첨사(僉使) 신상절(申尙節) 등이 일어나 여진군을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두만강 너머로까지 추격하여 그 소굴을 소탕하였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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