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연복사(=보제사)와 김방경,김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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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12-12 08:26 조회1,715회 댓글0건본문
연복사(=보제사)와 김방경,김영돈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郡/김태영 작성일 : 2002/08/21 10:33 (from:61.40.41.61) 조회 : 82
보제사(普濟寺)
<신증동국여지승람 개성부>
♠연복사(演福寺) : 도성 중앙에 있는데, 옛 이름은 ♠보제사(普濟寺)이다. 큰 전각을 능인전(能仁殿)이라 하며 그 앞 문을 신통문(神通門)이라 한다. 5층 누각이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졌으므로 지금 성중의 부자 상인이 재물을 내어 고쳐 지어서 채색[金碧]이 휘황하고, 종소리와 목탁 소리가 몇 리까지 들린다.
○ 권근(權近)의 탑중창기(塔重創記)에, "부처의 도는 자비(慈悲)와 희사(喜捨)로 덕을 삼고 응보가 틀리지 않는 것으로 징험을 삼는다. 그 말이 지극히 넓고 커서 번역되어 중국에 전하고 사해에 널리 퍼져 천년을 두고 이어지는데, 오랠수록 더욱 공경한다.
위로 왕공 대신(王公大臣)에서 아래로 어리석은 남녀에 이르기까지 복리(福利)를 바라서 높여 믿지 않는 이가 없으니, 사원(寺院)과 탑(塔)ㆍ묘(廟)의 시설이 높이 솟아 서로 바라다 보이며 천하에 가득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말기부터 받들어 섬기기를 더욱 성심으로 하여 성중에 절이 민가보다도 많았으며, 그 전각의 웅장하고 높이 솟은 것이 지금까지 아직 남아 있으니, 그 당시에 지극히 높이 받들었던 것을 상상하여 알 수 있다.
고려 왕씨가 후삼국을 통일한 초기에도 대개 신라를 따라 폐하지 않아 그것으로 복 받는 터전을 삼아서 중외(中外)에 사찰을 많이 설치하였으니, 이른바 비보(裨補)라는 것이 이것이다.
연복사는 사실 도성 안 시가지 곁에 자리잡고 있는데, 원래 호칭은 당사(唐寺)이다. 방언(方言)에 당(唐)은 대(大)와 비슷하기 때문에 또한 대사(大寺)라고도 한다.
집이 가장 커서 천여 채에 이르며, 안에 3개의 못과 9개의 우물을 파고 그 남쪽에 또 5층 탑을 세워서 풍수설(風水說)에 맞추었는데, 거기에 대한 설명은 옛 책에 갖추 적혀 있으므로 여기서는 덧붙여 말하지 않겠다.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주회 작성일 : 2002/09/01 14:20 (from:211.57.153.114) 조회 : 74
충렬공 큰아버지 김창金敞 05 (앵계 초당, 보제사)
---생 략---
다음 소개하는 시를 살펴보면 이규보가 살던 앵계리 주변 지세를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앵계 ★초당(鶯溪草堂) 앞에는 ★용수산(龍首山) ★곡령(鵠嶺)이 있고, 남쪽에 늙은 전나무가 많아 ★회동(檜洞)이라 일컬었고, 창문으로는★보제사(普濟寺)가 보이는 그런 곳입니다.
이곳은 충렬공 할아버지의 본댁이 있던 마을이고, 큰 아버지 김창의 절친한 친구였던 이규보가 살던 마을이므로 김창 선조께서도 이곳에 사셨거나 거주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친구를 찾아 자주 들렸을 것입니다.
또한 충렬공의 본댁이 있던 곳이므로 아버지 김효인께서도 사신 곳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해주의 신광사에 있었다고 하는 김방경찬 초당일기의 "초당"도 이곳 앵계리 초당을 뜻하는 것일 수 있고,
늙은 전나무가 많아 ★회동(檜洞)이라 불렀다 하는데, 현재 안동 풍산의 ★회곡동(檜谷洞)과 연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생 략---
1300년 이진 撰 충렬공 묘지문에
1300년(대덕4년 경자) 8월 16일에 병환으로 인하여 백목동 ★영계리에서 돌아가시니, 9월 3일에 예안현 서쪽 산록에 유고에 따라 안장하였다.
1350년 안진 跋 충렬공 행장에
89세에 병환으로 ★본댁에서 돌아가시니 임종시까지 아픔이 없이 쓸쓸하게 앉아서 돌아가셨고 유언에 따라 안동의 조부산소 (족보에 조부 김민성 묘는 안동부서 一息 화림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음) 근처에 장사하게 되었다.
<고려사>
김방경이 일찍이 왕과 공주를 위하여 연회를 배설하여 대접한 적이 있었다. 그때 사용한 은그릇들은 모두 새로 주조하여 만든 것이었는데 연회가 끝난 다음에 그것들을 내탕(內帑-국왕의 창고)에다 바치었으며,
또 ★보제사(普濟寺)에다 5백 나한당(五百羅漢堂)을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축하고 낙성식 때에 큰 술잔치 모임을 열었는데 달로화적과 양부(兩府-첨의부와 밀직사의 대신들)가 모두 여기에 참가하였으며 서울 안의 인사들과 부녀자들이 일시에 모두 모였으므로 식견 있는 사람들은 이를 조소하였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 木+差 錄) 에서>
충렬공과 ★보제사(普濟寺)
방경(方慶)은 왕(王),공주(公主)를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고 사용(使用)하는 그릇은 모두 새로만든 은(銀)그릇으로 하고, 잔치가 끝나자 그것을 모두 내탕(內帑)에 바쳤다.
또 오백나한당(五百羅漢堂)을 ★보제사(普濟寺)에다 지어 대단히 장려(壯麗)한 모습을 드러냈고 크게 법회(法會)를 열어 그 낙성식(落成式)을 거행 하였다.
달로화적(達魯花赤)과 양부(兩府)가 모두 모이고 도성(都城)의 사녀(士女)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郡/김태영 작성일 : 2002/08/21 10:33 (from:61.40.41.61) 조회 : 82
보제사(普濟寺)
<신증동국여지승람 개성부>
♠연복사(演福寺) : 도성 중앙에 있는데, 옛 이름은 ♠보제사(普濟寺)이다. 큰 전각을 능인전(能仁殿)이라 하며 그 앞 문을 신통문(神通門)이라 한다. 5층 누각이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졌으므로 지금 성중의 부자 상인이 재물을 내어 고쳐 지어서 채색[金碧]이 휘황하고, 종소리와 목탁 소리가 몇 리까지 들린다.
○ 권근(權近)의 탑중창기(塔重創記)에, "부처의 도는 자비(慈悲)와 희사(喜捨)로 덕을 삼고 응보가 틀리지 않는 것으로 징험을 삼는다. 그 말이 지극히 넓고 커서 번역되어 중국에 전하고 사해에 널리 퍼져 천년을 두고 이어지는데, 오랠수록 더욱 공경한다.
위로 왕공 대신(王公大臣)에서 아래로 어리석은 남녀에 이르기까지 복리(福利)를 바라서 높여 믿지 않는 이가 없으니, 사원(寺院)과 탑(塔)ㆍ묘(廟)의 시설이 높이 솟아 서로 바라다 보이며 천하에 가득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말기부터 받들어 섬기기를 더욱 성심으로 하여 성중에 절이 민가보다도 많았으며, 그 전각의 웅장하고 높이 솟은 것이 지금까지 아직 남아 있으니, 그 당시에 지극히 높이 받들었던 것을 상상하여 알 수 있다.
고려 왕씨가 후삼국을 통일한 초기에도 대개 신라를 따라 폐하지 않아 그것으로 복 받는 터전을 삼아서 중외(中外)에 사찰을 많이 설치하였으니, 이른바 비보(裨補)라는 것이 이것이다.
연복사는 사실 도성 안 시가지 곁에 자리잡고 있는데, 원래 호칭은 당사(唐寺)이다. 방언(方言)에 당(唐)은 대(大)와 비슷하기 때문에 또한 대사(大寺)라고도 한다.
집이 가장 커서 천여 채에 이르며, 안에 3개의 못과 9개의 우물을 파고 그 남쪽에 또 5층 탑을 세워서 풍수설(風水說)에 맞추었는데, 거기에 대한 설명은 옛 책에 갖추 적혀 있으므로 여기서는 덧붙여 말하지 않겠다.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주회 작성일 : 2002/09/01 14:20 (from:211.57.153.114) 조회 : 74
충렬공 큰아버지 김창金敞 05 (앵계 초당, 보제사)
---생 략---
다음 소개하는 시를 살펴보면 이규보가 살던 앵계리 주변 지세를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앵계 ★초당(鶯溪草堂) 앞에는 ★용수산(龍首山) ★곡령(鵠嶺)이 있고, 남쪽에 늙은 전나무가 많아 ★회동(檜洞)이라 일컬었고, 창문으로는★보제사(普濟寺)가 보이는 그런 곳입니다.
이곳은 충렬공 할아버지의 본댁이 있던 마을이고, 큰 아버지 김창의 절친한 친구였던 이규보가 살던 마을이므로 김창 선조께서도 이곳에 사셨거나 거주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친구를 찾아 자주 들렸을 것입니다.
또한 충렬공의 본댁이 있던 곳이므로 아버지 김효인께서도 사신 곳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해주의 신광사에 있었다고 하는 김방경찬 초당일기의 "초당"도 이곳 앵계리 초당을 뜻하는 것일 수 있고,
늙은 전나무가 많아 ★회동(檜洞)이라 불렀다 하는데, 현재 안동 풍산의 ★회곡동(檜谷洞)과 연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생 략---
1300년 이진 撰 충렬공 묘지문에
1300년(대덕4년 경자) 8월 16일에 병환으로 인하여 백목동 ★영계리에서 돌아가시니, 9월 3일에 예안현 서쪽 산록에 유고에 따라 안장하였다.
1350년 안진 跋 충렬공 행장에
89세에 병환으로 ★본댁에서 돌아가시니 임종시까지 아픔이 없이 쓸쓸하게 앉아서 돌아가셨고 유언에 따라 안동의 조부산소 (족보에 조부 김민성 묘는 안동부서 一息 화림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음) 근처에 장사하게 되었다.
<고려사>
김방경이 일찍이 왕과 공주를 위하여 연회를 배설하여 대접한 적이 있었다. 그때 사용한 은그릇들은 모두 새로 주조하여 만든 것이었는데 연회가 끝난 다음에 그것들을 내탕(內帑-국왕의 창고)에다 바치었으며,
또 ★보제사(普濟寺)에다 5백 나한당(五百羅漢堂)을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축하고 낙성식 때에 큰 술잔치 모임을 열었는데 달로화적과 양부(兩府-첨의부와 밀직사의 대신들)가 모두 여기에 참가하였으며 서울 안의 인사들과 부녀자들이 일시에 모두 모였으므로 식견 있는 사람들은 이를 조소하였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 木+差 錄) 에서>
충렬공과 ★보제사(普濟寺)
방경(方慶)은 왕(王),공주(公主)를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고 사용(使用)하는 그릇은 모두 새로만든 은(銀)그릇으로 하고, 잔치가 끝나자 그것을 모두 내탕(內帑)에 바쳤다.
또 오백나한당(五百羅漢堂)을 ★보제사(普濟寺)에다 지어 대단히 장려(壯麗)한 모습을 드러냈고 크게 법회(法會)를 열어 그 낙성식(落成式)을 거행 하였다.
달로화적(達魯花赤)과 양부(兩府)가 모두 모이고 도성(都城)의 사녀(士女)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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