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산관(풍영루)과 김영후(金永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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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12-15 03:46 조회1,588회 댓글0건본문
상산관(풍영루)과 김영후(金永煦)
김종직의 점필재집 <풍영루중영기>에
-----내가 이 고을의 옛일을 상고해 보건대, 원(元) 나라 태정(泰定) 정묘년(1327, 충숙왕14)에 관우(館宇)를 중수하여 적당한 위치를 잡은 사람은 목사(牧使) ★김영후 (金永煦)이고, 기(記)를 쓴 사람은 ★근재(謹齋)였다.
그리고 황명(皇明) 홍무(洪武) 경술년(1370, 공민왕19)에 이르러 관우의 동편을 개척하고 그 곳에 새 정자를 지은 사람은 목사 ★김남득(金南得)이고, 풍영루(風詠樓)라 이름하고 또 기를 지은 이는 ★목은(牧隱)이며, 시(詩)를 지은 이는 ★도은(陶隱)이었다.
그 후 경신년 병화(兵火)에 정자도 불타버렸는데, 얼마 안 되어 그 옛터에다가 정자를 바꾸어 누각으로 지은 사람은 목사 ★송인(宋因)이고, 기를 지은 사람은 ★양촌(陽村)이었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경북 상주의 객관인 상산관을 1327년 정간공 김영후 선조님께서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을 뒷받침하는 내용입니다.
국역 점필재집 ≫ 점필재집 문집 ≫ 문집 제2권 ≫ 기(記) ≫
풍영루중영기(風詠樓重營記)
§ 풍영루중영기(風詠樓重營記)
상주(尙州)는 낙수(洛水)의 상류에 위치하여 감사(監司)의 본영(本營)이 되었으니, 실로 동남방의 하나의 큰 도회(都會)이다. 그래서 사명을 받들고 정사를 반포하는 빈객과 일본(日本)에서 조공(朝貢)을 바치러 오고 가는 사신이 계속 줄을 잇되, 죽령(竹嶺)을 경유하는 경우는 3분의 1도 못 되고 대부분이 관현(冠縣 문경(聞慶)의 고호임 )을 경유하는데, 상주가 그 사방에서 폭주(輻湊)하는 중심지가 되어 있다.
그러니 의당 높고 웅장한 누각(樓閣)을 두어서 의형(儀刑)을 맞추어 관첨(觀瞻)을 장엄하게 하고, 높고 탁 트이게 하여 무더위를 제거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풍영루(風詠樓)를 중수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 전하(殿下)의 18년 정미(丁未) 봄에 순창(淳昌) ★설순조(薛順祖) 공이 부절(符節)을 갖고 이 고을에 와서 이 누각의 용마루와 서까래가 휘어져 기울고, 난간은 깨어졌으며, 기왓장은 처마에 뒹굴고, 벽에서 비는 새며, 붉고 흰 빛깔의 장식은 모두 흐려지고 벗겨져서, 누각에 오른 사람이 관현악(管絃樂)을 베풀기도 전에 주춤하며 꺼리는 빛이 완연함을 보고는 개연히 누각을 중수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 해 가을에 통판(通判) ★신후 현(申侯?)이 뒤따라 이르렀다. 마침내 두 사람의 의논이 서로 합하여 다음해 봄에 농사일이 시작되기 전에 재목 수집을 명하여 성중(城中)으로 실어 들이고, 가을 8월에 이르러 비로소 옛집을 헐고 그 제도를 훨씬 넓혀서 짓되 일을 시작한 지 겨우 30여 일 만에 자귀와 흙손의 사용을 모두 끝마쳤다.
그래 놓고 보니, 누각의 넓고 탁 트이고 화려함이 더불어 대적할 것이 없어서, 성지(城池)와 여항(閭巷)도 모두 자랑스러운 빛이 있고, 경내(境內)의 진산(鎭山)과 소택(沼澤)이 된 모든 산천(山川)들도 갑자기 훨씬 더 높고 깊어진 것 같았다.
그러자 공(公)이 이에 이 고을의 교수인 나의 친구 ★주윤창(周允昌) 군을 중개인으로 삼아 편지를 보내어 나에게 기(記)를 지어달라고 요청하였다.
내가 이 고을의 옛일을 상고해 보건대, 원(元) 나라 태정(泰定) 정묘년(1327, 충숙왕14)에 관우(館宇)를 중수하여 적당한 위치를 잡은 사람은 목사(牧使) ★김영후 (金永煦)이고, 기(記)를 쓴 사람은 ★근재(謹齋)였다.
그리고 황명(皇明) 홍무(洪武) 경술년(1370, 공민왕19)에 이르러 관우의 동편을 개척하고 그 곳에 새 정자를 지은 사람은 목사 ★김남득(金南得)이고, 풍영루(風詠樓)라 이름하고 또 기를 지은 이는 ★목은(牧隱)이며, 시(詩)를 지은 이는 ★도은(陶隱)이었다.
그 후 경신년 병화(兵火)에 정자도 불타버렸는데, 얼마 안 되어 그 옛터에다가 정자를 바꾸어 누각으로 지은 사람은 목사 ★송인(宋因)이고, 기를 지은 사람은 ★양촌(陽村)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누각을 중수함에 있어서 그 제모(制謀)와 정공(程功)은 충분히 두 김 목사와 한 송 목사에 필적할 만한데, 그 기문 짓는 일을 촉탁받은 나는 네 선생[四先生] 2893) 의 제자 축에도 들지 못하니 어찌하겠는가.
옛날에 ★한퇴지(韓退之)는 등왕각(?王閣)의 기를 지으면서 자기의 글이 세 왕씨(王氏)의 다음에 나열되는 것을 영광으로 삼았으나, 2894) 나는 뻔뻔스럽게 네 선생의 뒤에 구미 속초(狗尾續貂) 2895) 를 해 놓으면 반드시 세상 사람들이 배를 부둥켜 안고 웃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장차 부끄러워 움츠리기에도 겨를이 없을 판인데, 또 영광이라고 할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공의 명령이 끝내 그치지 않으므로 감히 굳이 사양하지 못하여 우선 그 대강을 기술하고, 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는 바이다.
배와 수레가 모두 모여드니 舟車之會兮
사방으로 통하는 요충이로다 四達之衝
사신의 수레가 서로 교차하니 冠蓋結轍兮
다른 고장은 하풍에 따르도다 異邦趨風
이런 누각이 있지 않으면 不有斯構兮
연향과 호궤를 어디에 의탁하랴 宴?奚托
그 누가 뜨거운 것을 잡고서 誰能執熱兮
시원한 물에 가서 씻지 않으리오 逝不以濯
상산은 푸르고 푸르며 商山蒼蒼兮
낙수는 광대하게 흐르는도다 洛水??
이전의 것을 계승한 이 있으니 前者有繼兮
층층의 누각이 구름에 닿았네 層構?雲
구불구불 흐르는 맑은 낙수요 ?紆淸洛兮
높고도 험준한 상안이로다 ??商顔
순창 설공의 계승한 업적은 淳昌之續兮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으리로다 攸久不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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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2893] 위에서 말한 근재(謹齋) 안축(安軸), 목은(牧隱) 이색(李穡),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양촌(陽村) 권근(權近)을 가리킨다. ☞
[註 2894] 퇴지는 한유(韓愈)의 자임. 한유가 일찍이 원주 자사(袁州刺史)로 있을 적에 홍주 자사(洪州刺史) 왕중서(王仲舒)의 부탁을 받고 신수등왕각기(新修?王閣記)를 지었는바, 그 기문의 끝부분에 “나는 이미 등왕각을 가보지 못한 것을 한탄스럽게 여겼던 바이라, 그 위에 나의 이름이 실리게 된 것을 마음 속으로 기뻐하고, 또 나의 글이 세 왕씨(王氏)의 다음으로 나열되는 것을 영광으로 삼는 바이다.” 한 데서 온 말인데, 세 왕씨는 바로 유각기(遊閣記)를 지은 왕발(王勃), 부(賦)를 지은 왕서(王緖), 수각기(修閣記)를 지은 왕중서(王仲舒)를 가리킨다. 《韓昌黎集 卷十三》 ☞
[註 2895] 담비꼬리가 부족하여 개꼬리로 대신한다는 고사인데, 여기서는 곧 다른 이의 하던 사업을 자기가 잇게 된 것을 겸사하여 비유한 말이다. ☞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발용 - 글 감사합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고맙습니다.
▣ 김윤만 - 나라안 방방곡곡 가는 곳마다 선조님의 얼이 깃든 유적이 산재해 있으니 참으로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종직의 점필재집 <풍영루중영기>에
-----내가 이 고을의 옛일을 상고해 보건대, 원(元) 나라 태정(泰定) 정묘년(1327, 충숙왕14)에 관우(館宇)를 중수하여 적당한 위치를 잡은 사람은 목사(牧使) ★김영후 (金永煦)이고, 기(記)를 쓴 사람은 ★근재(謹齋)였다.
그리고 황명(皇明) 홍무(洪武) 경술년(1370, 공민왕19)에 이르러 관우의 동편을 개척하고 그 곳에 새 정자를 지은 사람은 목사 ★김남득(金南得)이고, 풍영루(風詠樓)라 이름하고 또 기를 지은 이는 ★목은(牧隱)이며, 시(詩)를 지은 이는 ★도은(陶隱)이었다.
그 후 경신년 병화(兵火)에 정자도 불타버렸는데, 얼마 안 되어 그 옛터에다가 정자를 바꾸어 누각으로 지은 사람은 목사 ★송인(宋因)이고, 기를 지은 사람은 ★양촌(陽村)이었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경북 상주의 객관인 상산관을 1327년 정간공 김영후 선조님께서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을 뒷받침하는 내용입니다.
국역 점필재집 ≫ 점필재집 문집 ≫ 문집 제2권 ≫ 기(記) ≫
풍영루중영기(風詠樓重營記)
§ 풍영루중영기(風詠樓重營記)
상주(尙州)는 낙수(洛水)의 상류에 위치하여 감사(監司)의 본영(本營)이 되었으니, 실로 동남방의 하나의 큰 도회(都會)이다. 그래서 사명을 받들고 정사를 반포하는 빈객과 일본(日本)에서 조공(朝貢)을 바치러 오고 가는 사신이 계속 줄을 잇되, 죽령(竹嶺)을 경유하는 경우는 3분의 1도 못 되고 대부분이 관현(冠縣 문경(聞慶)의 고호임 )을 경유하는데, 상주가 그 사방에서 폭주(輻湊)하는 중심지가 되어 있다.
그러니 의당 높고 웅장한 누각(樓閣)을 두어서 의형(儀刑)을 맞추어 관첨(觀瞻)을 장엄하게 하고, 높고 탁 트이게 하여 무더위를 제거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풍영루(風詠樓)를 중수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 전하(殿下)의 18년 정미(丁未) 봄에 순창(淳昌) ★설순조(薛順祖) 공이 부절(符節)을 갖고 이 고을에 와서 이 누각의 용마루와 서까래가 휘어져 기울고, 난간은 깨어졌으며, 기왓장은 처마에 뒹굴고, 벽에서 비는 새며, 붉고 흰 빛깔의 장식은 모두 흐려지고 벗겨져서, 누각에 오른 사람이 관현악(管絃樂)을 베풀기도 전에 주춤하며 꺼리는 빛이 완연함을 보고는 개연히 누각을 중수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 해 가을에 통판(通判) ★신후 현(申侯?)이 뒤따라 이르렀다. 마침내 두 사람의 의논이 서로 합하여 다음해 봄에 농사일이 시작되기 전에 재목 수집을 명하여 성중(城中)으로 실어 들이고, 가을 8월에 이르러 비로소 옛집을 헐고 그 제도를 훨씬 넓혀서 짓되 일을 시작한 지 겨우 30여 일 만에 자귀와 흙손의 사용을 모두 끝마쳤다.
그래 놓고 보니, 누각의 넓고 탁 트이고 화려함이 더불어 대적할 것이 없어서, 성지(城池)와 여항(閭巷)도 모두 자랑스러운 빛이 있고, 경내(境內)의 진산(鎭山)과 소택(沼澤)이 된 모든 산천(山川)들도 갑자기 훨씬 더 높고 깊어진 것 같았다.
그러자 공(公)이 이에 이 고을의 교수인 나의 친구 ★주윤창(周允昌) 군을 중개인으로 삼아 편지를 보내어 나에게 기(記)를 지어달라고 요청하였다.
내가 이 고을의 옛일을 상고해 보건대, 원(元) 나라 태정(泰定) 정묘년(1327, 충숙왕14)에 관우(館宇)를 중수하여 적당한 위치를 잡은 사람은 목사(牧使) ★김영후 (金永煦)이고, 기(記)를 쓴 사람은 ★근재(謹齋)였다.
그리고 황명(皇明) 홍무(洪武) 경술년(1370, 공민왕19)에 이르러 관우의 동편을 개척하고 그 곳에 새 정자를 지은 사람은 목사 ★김남득(金南得)이고, 풍영루(風詠樓)라 이름하고 또 기를 지은 이는 ★목은(牧隱)이며, 시(詩)를 지은 이는 ★도은(陶隱)이었다.
그 후 경신년 병화(兵火)에 정자도 불타버렸는데, 얼마 안 되어 그 옛터에다가 정자를 바꾸어 누각으로 지은 사람은 목사 ★송인(宋因)이고, 기를 지은 사람은 ★양촌(陽村)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누각을 중수함에 있어서 그 제모(制謀)와 정공(程功)은 충분히 두 김 목사와 한 송 목사에 필적할 만한데, 그 기문 짓는 일을 촉탁받은 나는 네 선생[四先生] 2893) 의 제자 축에도 들지 못하니 어찌하겠는가.
옛날에 ★한퇴지(韓退之)는 등왕각(?王閣)의 기를 지으면서 자기의 글이 세 왕씨(王氏)의 다음에 나열되는 것을 영광으로 삼았으나, 2894) 나는 뻔뻔스럽게 네 선생의 뒤에 구미 속초(狗尾續貂) 2895) 를 해 놓으면 반드시 세상 사람들이 배를 부둥켜 안고 웃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장차 부끄러워 움츠리기에도 겨를이 없을 판인데, 또 영광이라고 할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공의 명령이 끝내 그치지 않으므로 감히 굳이 사양하지 못하여 우선 그 대강을 기술하고, 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는 바이다.
배와 수레가 모두 모여드니 舟車之會兮
사방으로 통하는 요충이로다 四達之衝
사신의 수레가 서로 교차하니 冠蓋結轍兮
다른 고장은 하풍에 따르도다 異邦趨風
이런 누각이 있지 않으면 不有斯構兮
연향과 호궤를 어디에 의탁하랴 宴?奚托
그 누가 뜨거운 것을 잡고서 誰能執熱兮
시원한 물에 가서 씻지 않으리오 逝不以濯
상산은 푸르고 푸르며 商山蒼蒼兮
낙수는 광대하게 흐르는도다 洛水??
이전의 것을 계승한 이 있으니 前者有繼兮
층층의 누각이 구름에 닿았네 層構?雲
구불구불 흐르는 맑은 낙수요 ?紆淸洛兮
높고도 험준한 상안이로다 ??商顔
순창 설공의 계승한 업적은 淳昌之續兮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으리로다 攸久不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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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2893] 위에서 말한 근재(謹齋) 안축(安軸), 목은(牧隱) 이색(李穡),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양촌(陽村) 권근(權近)을 가리킨다. ☞
[註 2894] 퇴지는 한유(韓愈)의 자임. 한유가 일찍이 원주 자사(袁州刺史)로 있을 적에 홍주 자사(洪州刺史) 왕중서(王仲舒)의 부탁을 받고 신수등왕각기(新修?王閣記)를 지었는바, 그 기문의 끝부분에 “나는 이미 등왕각을 가보지 못한 것을 한탄스럽게 여겼던 바이라, 그 위에 나의 이름이 실리게 된 것을 마음 속으로 기뻐하고, 또 나의 글이 세 왕씨(王氏)의 다음으로 나열되는 것을 영광으로 삼는 바이다.” 한 데서 온 말인데, 세 왕씨는 바로 유각기(遊閣記)를 지은 왕발(王勃), 부(賦)를 지은 왕서(王緖), 수각기(修閣記)를 지은 왕중서(王仲舒)를 가리킨다. 《韓昌黎集 卷十三》 ☞
[註 2895] 담비꼬리가 부족하여 개꼬리로 대신한다는 고사인데, 여기서는 곧 다른 이의 하던 사업을 자기가 잇게 된 것을 겸사하여 비유한 말이다. ☞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발용 - 글 감사합니다.
▣ 태영/문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고맙습니다.
▣ 김윤만 - 나라안 방방곡곡 가는 곳마다 선조님의 얼이 깃든 유적이 산재해 있으니 참으로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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