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Re:12월22일 일요일 서울시내 답사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2-12-21 07:03 조회1,761회 댓글0건본문
12월22일 일요일 서울시내 답사
12월 21일 토요일 송년모임을 마치고 다음날 서울시내 답사를 제안해 봅니다.
소요시간과 교통편을 정확히 알지 못해서 가감이나 순서조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다른 일정이 없으시면 일정을 세우는데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코스는
(지하철3호선 홍제역) 서울여자간호대학 : 김사달 박사 필적 <대학 간판> 확인
⇒ 홍제원터 ⇒ 세검정 ⇒ 창의문(자하문) : 김자점 선조의 인정반정 관련 루트
⇒ 스카이파크호텔 : 로비에 있는 김사달 박사 필적 <적벽부> 확인
⇒ 인사동 : 고서점 통문관, 호고당(김재갑 종친 운영) 방문
⇒ 탑골공원 : 김돈 선조의 앙부일구 대석 확인
⇒ 성균관 : 성균관 관람 및 김뉴 선조의 쌍계재 위치 확인
1. 서울여자간호대학 간판은 서봉 김사달 박사의 필적입니다.
⇒ 지하철 3호선 홍제역에서 하차하여 2번출구로 나오면 도보로 약 10분 소요 거리에 서울여자간호대학 (구 서울간호전문대학) 이 있는데, 서울간호전문대학의 간판은 서봉 김사달 박사의 필적이다.
2. 홍제원터는 김자점 선조의 인조반정과 관련된 곳입니다.
⇒ ?근방에 있는 홍제원은
김자점 선조께서 1623년 3월 군대를 모아 이귀·김류·이괄(李适) 등과 함께 홍제원(弘濟院)에서 궁궐로 진격해들어옴으로써 반정을 성공시켰다.
지금은 주택가로 변해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며, 유래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현재 홍제원터 표지석만이 설치되어 있다.
3. 세검정(서울시문화재자료 제4호)은 김자점 선조의 인조반정과 관련된 곳입니다.
⇒ ?이웃에 있는 세검정은
세검이라는 명칭은 1623년 인조반정시 무관 이귀, 이서, 구인후와 문관 김유, 최명길, 장유와 유생 심기원, 김자점 등이 광해군의 폐위를 이곳에서 논하고 칼을 씻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칼을 씻어서 칼집에 넣는다는 것은 곧 평화를 의미한다.
4. 스카이파크 호텔 로비에 서봉 김사달 박사의 필적이 걸려 있습니다.
⇒ 세검정에서 북악터널 입구 조금 못미쳐 있는 스카이파크 호텔 로비엔 가로 4미터 20센티에 세로 1미터 70센티나 되는 크기로 초서체의 <적벽부>를 쓴 그의 큰 글씨가 걸려 있다.
5. 창의문은 김자점 선조의 인조반정과 관련된 곳입니다.
⇒ 서울 쪽으로 조금 내려 오다가 창의문 彰義門이 있는데,
북문(北門) 또는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리며,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는 능양군(陵陽君:인조)을 비롯한 의군(義軍)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1741년(영조 17) 성문을 다시 고쳐 짓고 인조반정 공신의 명단을 걸게 하였는데 지금도 남아 있으며 자하문이라고도 한다.
■인조반정 仁祖反正은
1623년(인조 1) 서인(西人)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종(倧: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으로
도중에 이이반(李而狀)의 누설로 탄로될 위기에 놓였으나 예정대로 거사를 단행하였다. 이서(李曙)는 장단(長湍)에서, 이중로(李重老)는 이천(伊川)에서 군사를 일으켜 홍제원(弘濟院)에서 김류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 군대를 능양군이 친히 거느리고 이괄을 대장으로 하여 12일 밤에 창의문(彰義門)으로 진군하여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으로 반정군은 무난히 궁궐을 점령하였다. 이어 왕대비(인목대비)의 윤허를 얻어 능양군(인조)이 왕위에 올랐다.
인조반정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우리 선조님은
★(익원공파) 김자점(金自點) 선조님은 인조반정의 주역으로 반정성공후 정사공신 1등에 봉해지고, 아들 김식도 정사공신 3등에 봉해졌다.
생몰년 1588-1651(선조21-효종2)
음보로 출사하여 병조좌랑에까지 이르렀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논의에 반대하는 등 광해군 때에 대북세력에 맞서다가 정계에서 축출당하였다. 처음에 최명길(崔鳴吉)·심기원(沈器遠)과 함께, 사돈관계에 있는 이귀(李貴)를 중심으로 반정을 모의하던 중 1622년(광해군 14) 김류(金#유15)·신경진(申景#진26) 등과 연결되었다.
1623년 3월 군대를 모아 이귀·김류·이괄(李适) 등과 함께 홍제원(弘濟院)에서 궁궐로 진격해들어옴으로써 반정을 성공시켰다. 인조 즉위 후 박홍구(朴弘耉)·조정(趙挺) 등 광해군 때의 정승들이 인사권을 행사하려는 것을 막아 이귀가 주로 인사를 담당할 수 있게 하였다.
반정 직후 호위대장이 된 신경진 휘하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되었다가 호조좌랑을 거쳐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같은해 반정공신인 정사공신(靖社功臣)1등에 녹훈되었다. 공신녹훈을 전후하여 반정의 두 주역인 김류와 이귀가 서로 대립하게 되자, 그 이후 김류 쪽에 가담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가두었던 기자헌(奇自獻) 등 40여인의 인사들을 죽이는 일을 주장하였다.
★(제학공파) 김치(金緻) 선조님은 반정주역 심기원에게 반정날짜를 택일해 주고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1577(선조 10)∼1625(인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사정(士精), 호는 남봉(南峰)·심곡(深谷).
아버지는 부사 시회(時晦)이며, 증영의정 시민(時敏)에게 입양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짐을 깨닫고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였다. 인조반정이 있을 무렵 심기원(沈器遠)과 사전에 내통하여 벼슬길에 다시 올랐으나, 대북파(大北派)로 몰려 유배당하였다.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항용 작성일 : 2002/12/17 15:45 (from:211.114.248.253) 조회 : 53
괴산설화(5)-김치편
<반정을 택일해 주고 살아난 김치>
---게시판 참조---
★(익원공파) 김대래(金大來) 선조님은
1564(명종 19)∼1608(선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대유(大猷), 자는 희태(希泰). 아버지는 주(柱)이다.
1608년에는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그해 광해군이 즉위하여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大北派)가 세력을 잡게 되자 양사(兩司)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즉, “그는 유영경(柳永慶)의 심복으로서 온갖 도의에 어긋난 일을 모의하였는데, 일찍이 적자(嫡子)도 아니요 장자(長子)도 아니라는 말을 공공연히 떠들어대어 감히 왕의 존엄성을 범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마침내 종성에 유배된 뒤 사사(賜死)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신원되었다.
★(제학공파) 김시양(金時讓) 선조님은
1581(선조 14)∼1643(인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仲), 호는 하담(荷潭). 아버지는 비안현감 인갑(仁甲)이다.
이듬해에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가 되었는데, 향시에 출제한 시제가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한 것이라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 영해(寧海)로 이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예조정랑·병조정랑·수찬·교리를 역임,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안렴사공파) 김언 선조님은
1588(선조 21)∼1636(인조 14). 조선 인조 때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여윤(汝潤). 아버지는 진사 낙서(洛瑞)이다.
1609년(광해군 1) 진사가 되고 161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된 뒤 폐모론에 가담하지 않아 7, 8년 뒤 겨우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에 머물렀다.
인조반정 후 부안현감·예조정랑·병조정랑·성균관사예·예빈시정·장악원정 등을 역임하고 1628년(인조 6)에 영천군수를 거쳐 성천부사가 되었다.
★(제학공파) 김호 선조님은
1584(선조 17)∼1631(인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회보(晦甫). 아버지는 계종(繼宗)이다.
1614년 다시 정언으로 서용되었으며, 옥당록에 오르고, 겸문학·지평으로 옮겼다.
이때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에 찬성하고, 그에 반대하는 기자헌(奇自獻)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목대비에게 예를 갖춘다고 공격받았으며, 또 폐비의 절차를 맡지 않으려 하였다는 이유로 온성판관(穩城判官)으로 좌천당하였다.
1621년 수찬에 임명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도망하여 숨었다.
1631년 폐모논의를 일으켰다는 혐의로 장살(杖殺)되었다.
6. 탑골공원 안에는 김돈 선조님께서 제작에 참여하고 銘을 지은 앙부일구를 받쳤던 대석이 옮겨져 있습니다.
⇒3호선 종로3가역 하차
앙부일구는 1437년(세종 19) 처음으로 만들어져,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남가(南街)에 각각 석대를 쌓아 그 위에 설치하여 한국 최초의 공중시계 역할을 하다가 임진왜란 때 유실되어 없어지고, 종묘 앞에 있던 대석만이 현재 탑골공원 안에 옮겨져 있고, 2∼3세기 후에 만들어진 2개의 앙부일구가 남아 보물로 지정되었고, 현재 창덕궁에 있다.
仰釜日구 臺石 (앙부일구 대석)
탑골공원 안에 한성 초기의 유물인 앙부일구, 곧 해시계를 받쳤던 대석이 놓여 있다.
일찍이 운종가의 서쪽 혜정교 (지금의 광화문 우체국 앞 복청교 자리) 옆과 운종가 동쪽, 곧 종로3가 종묘 앞에 운종가를 오고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시각을 살펴볼 수 있게끔 높직한 대석 위에 앙부일구를 설치하였는데, 지금 탑골공원 안에 있는 받침돌이 바로 종묘 앞에 있던 대석이다.
<동국여지승람> 교량 조에
"혜정교가 운종가에 있는데 다리 동쪽에 앙부일구가 있다.
金墩(김돈)이 지은 銘文에
"모든 시설을 하는 데에는 시간을 알아보게 하는 시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밤에는 更漏(경루)가 있지만 낮에는 시각을 알기 어렵다. 구리로 주조하여 그릇을 만들었는데 그 형상이 가마솥과 같다.
거기에 바르게 둥근 테를 그려서 子와 午가 마주 서게 하였다. 공간이 꺽인 테를 따라 그 안에 分刻을 度數로 새겼다. 둥군 하늘 절반을 표시한 것이다.
神의 몸을 그렸으니 이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하여서 이다. 刻과 分이 자세하여 햇빛이 비치면 시각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길가에 설치한 것은 보는 사람들이 모이게 함이다. 지금부터는 백성들이 일할 때를 알 것이다."
이렇게 설명한 비로 그 앙부일구를 설치하였던 대석이다.
<생략>
"-----종묘 대문 밖 길가에 지금도 네 개의 돌을 겹쳐 놓은 반석이 있다. 곧 옛적의 일구대이다.----- 일구의 제도를 지금은 들을 수 없으나 그 대석만은 그대로 있다.-----" 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순조(1801-1835) 때까지 이 대석이 지표면에 나앉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해에 공원에 들렀다가 관리 책임자에게 그 대석이 잘 있느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어리둥절해 하기에 함께 가서 살펴보니 원각사비 근처에 그대로 있었다.
저 대석을 모르느냐고 하니 거추장스러워서 치워 버리려고 했다는 것이 아닌가. 한참동안 열심히 설명하고 잘 보존하다록 납득시키기는 했지만 돌아와서도 씁쓰레한 마음이 좀체 가시지 않았다.
7. 명륜동의 성균관 동쪽 개울 위편에는 (안정공파) 금헌 김뉴 선조의 쌍계재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복개가 되어서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균관을 가운데 두고 그 동쪽과 서쪽으로 泮水(반수)가 흐른다. 지금은 복개가 되어서 보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동쪽 개울 위편이 경치 좋고 그윽한 터전이어서
한성 초기에 琴軒 金紐 (1420-?) 가 쌍계재 서옥, 곧 글방을 짓고 살았다. 여기에 사숙재 강희맹이 글로 <쌍계재賦>를 지어 일약 장안의 명소가 되었다.
김유의 본관은 안동으로 --- (중략) --- 시와 글씨, 거문고에 뛰어나서 당대의 3絶이라 일컬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 한성부 古蹟 조에
"쌍계재의 遺址가 성균관 泮水(성균관을 싸고 흐르는 개울) 동쪽에 있는데 김유의 옛 집터이다" 라고 적고 있다.
<용재총화>에도
"서울 성안에서 경치 좋은 곳이 비록 적으나 그 중에서 삼청동이 가장 좋고 인왕동이 그 다음이다. 쌍계동, 백운동, 청학동이 또 그 다음이다.--- 쌍계동은 성균관 윗골(上谷)에 있는데 두 샘물이 산골의 실개천을 이룬다. 김유가 개천가에 초당(草堂)을 짓고 복숭아나무를 심어 무릉도원을 모방하니 강희맹이 글(賦)을 지었다." 라고 씌어 있다.
<쌍계재 부>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 (생략) ---
▣ 태영/문 - !!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솔내 - 감사합니다.
12월 21일 토요일 송년모임을 마치고 다음날 서울시내 답사를 제안해 봅니다.
소요시간과 교통편을 정확히 알지 못해서 가감이나 순서조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다른 일정이 없으시면 일정을 세우는데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코스는
(지하철3호선 홍제역) 서울여자간호대학 : 김사달 박사 필적 <대학 간판> 확인
⇒ 홍제원터 ⇒ 세검정 ⇒ 창의문(자하문) : 김자점 선조의 인정반정 관련 루트
⇒ 스카이파크호텔 : 로비에 있는 김사달 박사 필적 <적벽부> 확인
⇒ 인사동 : 고서점 통문관, 호고당(김재갑 종친 운영) 방문
⇒ 탑골공원 : 김돈 선조의 앙부일구 대석 확인
⇒ 성균관 : 성균관 관람 및 김뉴 선조의 쌍계재 위치 확인
1. 서울여자간호대학 간판은 서봉 김사달 박사의 필적입니다.
⇒ 지하철 3호선 홍제역에서 하차하여 2번출구로 나오면 도보로 약 10분 소요 거리에 서울여자간호대학 (구 서울간호전문대학) 이 있는데, 서울간호전문대학의 간판은 서봉 김사달 박사의 필적이다.
2. 홍제원터는 김자점 선조의 인조반정과 관련된 곳입니다.
⇒ ?근방에 있는 홍제원은
김자점 선조께서 1623년 3월 군대를 모아 이귀·김류·이괄(李适) 등과 함께 홍제원(弘濟院)에서 궁궐로 진격해들어옴으로써 반정을 성공시켰다.
지금은 주택가로 변해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며, 유래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현재 홍제원터 표지석만이 설치되어 있다.
3. 세검정(서울시문화재자료 제4호)은 김자점 선조의 인조반정과 관련된 곳입니다.
⇒ ?이웃에 있는 세검정은
세검이라는 명칭은 1623년 인조반정시 무관 이귀, 이서, 구인후와 문관 김유, 최명길, 장유와 유생 심기원, 김자점 등이 광해군의 폐위를 이곳에서 논하고 칼을 씻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칼을 씻어서 칼집에 넣는다는 것은 곧 평화를 의미한다.
4. 스카이파크 호텔 로비에 서봉 김사달 박사의 필적이 걸려 있습니다.
⇒ 세검정에서 북악터널 입구 조금 못미쳐 있는 스카이파크 호텔 로비엔 가로 4미터 20센티에 세로 1미터 70센티나 되는 크기로 초서체의 <적벽부>를 쓴 그의 큰 글씨가 걸려 있다.
5. 창의문은 김자점 선조의 인조반정과 관련된 곳입니다.
⇒ 서울 쪽으로 조금 내려 오다가 창의문 彰義門이 있는데,
북문(北門) 또는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리며,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는 능양군(陵陽君:인조)을 비롯한 의군(義軍)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1741년(영조 17) 성문을 다시 고쳐 짓고 인조반정 공신의 명단을 걸게 하였는데 지금도 남아 있으며 자하문이라고도 한다.
■인조반정 仁祖反正은
1623년(인조 1) 서인(西人)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종(倧: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으로
도중에 이이반(李而狀)의 누설로 탄로될 위기에 놓였으나 예정대로 거사를 단행하였다. 이서(李曙)는 장단(長湍)에서, 이중로(李重老)는 이천(伊川)에서 군사를 일으켜 홍제원(弘濟院)에서 김류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 군대를 능양군이 친히 거느리고 이괄을 대장으로 하여 12일 밤에 창의문(彰義門)으로 진군하여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으로 반정군은 무난히 궁궐을 점령하였다. 이어 왕대비(인목대비)의 윤허를 얻어 능양군(인조)이 왕위에 올랐다.
인조반정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우리 선조님은
★(익원공파) 김자점(金自點) 선조님은 인조반정의 주역으로 반정성공후 정사공신 1등에 봉해지고, 아들 김식도 정사공신 3등에 봉해졌다.
생몰년 1588-1651(선조21-효종2)
음보로 출사하여 병조좌랑에까지 이르렀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논의에 반대하는 등 광해군 때에 대북세력에 맞서다가 정계에서 축출당하였다. 처음에 최명길(崔鳴吉)·심기원(沈器遠)과 함께, 사돈관계에 있는 이귀(李貴)를 중심으로 반정을 모의하던 중 1622년(광해군 14) 김류(金#유15)·신경진(申景#진26) 등과 연결되었다.
1623년 3월 군대를 모아 이귀·김류·이괄(李适) 등과 함께 홍제원(弘濟院)에서 궁궐로 진격해들어옴으로써 반정을 성공시켰다. 인조 즉위 후 박홍구(朴弘耉)·조정(趙挺) 등 광해군 때의 정승들이 인사권을 행사하려는 것을 막아 이귀가 주로 인사를 담당할 수 있게 하였다.
반정 직후 호위대장이 된 신경진 휘하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되었다가 호조좌랑을 거쳐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같은해 반정공신인 정사공신(靖社功臣)1등에 녹훈되었다. 공신녹훈을 전후하여 반정의 두 주역인 김류와 이귀가 서로 대립하게 되자, 그 이후 김류 쪽에 가담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가두었던 기자헌(奇自獻) 등 40여인의 인사들을 죽이는 일을 주장하였다.
★(제학공파) 김치(金緻) 선조님은 반정주역 심기원에게 반정날짜를 택일해 주고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1577(선조 10)∼1625(인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사정(士精), 호는 남봉(南峰)·심곡(深谷).
아버지는 부사 시회(時晦)이며, 증영의정 시민(時敏)에게 입양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짐을 깨닫고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였다. 인조반정이 있을 무렵 심기원(沈器遠)과 사전에 내통하여 벼슬길에 다시 올랐으나, 대북파(大北派)로 몰려 유배당하였다.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항용 작성일 : 2002/12/17 15:45 (from:211.114.248.253) 조회 : 53
괴산설화(5)-김치편
<반정을 택일해 주고 살아난 김치>
---게시판 참조---
★(익원공파) 김대래(金大來) 선조님은
1564(명종 19)∼1608(선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대유(大猷), 자는 희태(希泰). 아버지는 주(柱)이다.
1608년에는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그해 광해군이 즉위하여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大北派)가 세력을 잡게 되자 양사(兩司)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즉, “그는 유영경(柳永慶)의 심복으로서 온갖 도의에 어긋난 일을 모의하였는데, 일찍이 적자(嫡子)도 아니요 장자(長子)도 아니라는 말을 공공연히 떠들어대어 감히 왕의 존엄성을 범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마침내 종성에 유배된 뒤 사사(賜死)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신원되었다.
★(제학공파) 김시양(金時讓) 선조님은
1581(선조 14)∼1643(인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仲), 호는 하담(荷潭). 아버지는 비안현감 인갑(仁甲)이다.
이듬해에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가 되었는데, 향시에 출제한 시제가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한 것이라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 영해(寧海)로 이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예조정랑·병조정랑·수찬·교리를 역임,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안렴사공파) 김언 선조님은
1588(선조 21)∼1636(인조 14). 조선 인조 때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여윤(汝潤). 아버지는 진사 낙서(洛瑞)이다.
1609년(광해군 1) 진사가 되고 161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된 뒤 폐모론에 가담하지 않아 7, 8년 뒤 겨우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에 머물렀다.
인조반정 후 부안현감·예조정랑·병조정랑·성균관사예·예빈시정·장악원정 등을 역임하고 1628년(인조 6)에 영천군수를 거쳐 성천부사가 되었다.
★(제학공파) 김호 선조님은
1584(선조 17)∼1631(인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회보(晦甫). 아버지는 계종(繼宗)이다.
1614년 다시 정언으로 서용되었으며, 옥당록에 오르고, 겸문학·지평으로 옮겼다.
이때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에 찬성하고, 그에 반대하는 기자헌(奇自獻)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목대비에게 예를 갖춘다고 공격받았으며, 또 폐비의 절차를 맡지 않으려 하였다는 이유로 온성판관(穩城判官)으로 좌천당하였다.
1621년 수찬에 임명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도망하여 숨었다.
1631년 폐모논의를 일으켰다는 혐의로 장살(杖殺)되었다.
6. 탑골공원 안에는 김돈 선조님께서 제작에 참여하고 銘을 지은 앙부일구를 받쳤던 대석이 옮겨져 있습니다.
⇒3호선 종로3가역 하차
앙부일구는 1437년(세종 19) 처음으로 만들어져,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남가(南街)에 각각 석대를 쌓아 그 위에 설치하여 한국 최초의 공중시계 역할을 하다가 임진왜란 때 유실되어 없어지고, 종묘 앞에 있던 대석만이 현재 탑골공원 안에 옮겨져 있고, 2∼3세기 후에 만들어진 2개의 앙부일구가 남아 보물로 지정되었고, 현재 창덕궁에 있다.
仰釜日구 臺石 (앙부일구 대석)
탑골공원 안에 한성 초기의 유물인 앙부일구, 곧 해시계를 받쳤던 대석이 놓여 있다.
일찍이 운종가의 서쪽 혜정교 (지금의 광화문 우체국 앞 복청교 자리) 옆과 운종가 동쪽, 곧 종로3가 종묘 앞에 운종가를 오고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시각을 살펴볼 수 있게끔 높직한 대석 위에 앙부일구를 설치하였는데, 지금 탑골공원 안에 있는 받침돌이 바로 종묘 앞에 있던 대석이다.
<동국여지승람> 교량 조에
"혜정교가 운종가에 있는데 다리 동쪽에 앙부일구가 있다.
金墩(김돈)이 지은 銘文에
"모든 시설을 하는 데에는 시간을 알아보게 하는 시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밤에는 更漏(경루)가 있지만 낮에는 시각을 알기 어렵다. 구리로 주조하여 그릇을 만들었는데 그 형상이 가마솥과 같다.
거기에 바르게 둥근 테를 그려서 子와 午가 마주 서게 하였다. 공간이 꺽인 테를 따라 그 안에 分刻을 度數로 새겼다. 둥군 하늘 절반을 표시한 것이다.
神의 몸을 그렸으니 이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하여서 이다. 刻과 分이 자세하여 햇빛이 비치면 시각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길가에 설치한 것은 보는 사람들이 모이게 함이다. 지금부터는 백성들이 일할 때를 알 것이다."
이렇게 설명한 비로 그 앙부일구를 설치하였던 대석이다.
<생략>
"-----종묘 대문 밖 길가에 지금도 네 개의 돌을 겹쳐 놓은 반석이 있다. 곧 옛적의 일구대이다.----- 일구의 제도를 지금은 들을 수 없으나 그 대석만은 그대로 있다.-----" 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순조(1801-1835) 때까지 이 대석이 지표면에 나앉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해에 공원에 들렀다가 관리 책임자에게 그 대석이 잘 있느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어리둥절해 하기에 함께 가서 살펴보니 원각사비 근처에 그대로 있었다.
저 대석을 모르느냐고 하니 거추장스러워서 치워 버리려고 했다는 것이 아닌가. 한참동안 열심히 설명하고 잘 보존하다록 납득시키기는 했지만 돌아와서도 씁쓰레한 마음이 좀체 가시지 않았다.
7. 명륜동의 성균관 동쪽 개울 위편에는 (안정공파) 금헌 김뉴 선조의 쌍계재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복개가 되어서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균관을 가운데 두고 그 동쪽과 서쪽으로 泮水(반수)가 흐른다. 지금은 복개가 되어서 보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동쪽 개울 위편이 경치 좋고 그윽한 터전이어서
한성 초기에 琴軒 金紐 (1420-?) 가 쌍계재 서옥, 곧 글방을 짓고 살았다. 여기에 사숙재 강희맹이 글로 <쌍계재賦>를 지어 일약 장안의 명소가 되었다.
김유의 본관은 안동으로 --- (중략) --- 시와 글씨, 거문고에 뛰어나서 당대의 3絶이라 일컬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 한성부 古蹟 조에
"쌍계재의 遺址가 성균관 泮水(성균관을 싸고 흐르는 개울) 동쪽에 있는데 김유의 옛 집터이다" 라고 적고 있다.
<용재총화>에도
"서울 성안에서 경치 좋은 곳이 비록 적으나 그 중에서 삼청동이 가장 좋고 인왕동이 그 다음이다. 쌍계동, 백운동, 청학동이 또 그 다음이다.--- 쌍계동은 성균관 윗골(上谷)에 있는데 두 샘물이 산골의 실개천을 이룬다. 김유가 개천가에 초당(草堂)을 짓고 복숭아나무를 심어 무릉도원을 모방하니 강희맹이 글(賦)을 지었다." 라고 씌어 있다.
<쌍계재 부>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 (생략) ---
▣ 태영/문 - !!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솔내 -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