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명빈의 오류자료 수정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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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2-12-25 00:43 조회1,566회 댓글0건본문
수정요구 서신
수신처
두산대백과사전
야후백과사전
서울시사펀찬위원회
남양주시교육청
금곡초등학교
귀 홈의 명빈에 대한 중요한 오류가 있어 수정을 요구합니다.
명빈은 세종의 후궁이 아니라 태종의 후궁이니 세종에게는 어머니뻘입니다.
또 명빈은 김오문의 딸이 아니라 김구덕(판돈녕부사. 안정공)의 딸이며 김오문과는
남매지간 입니다. 이에대한 자료를 첨부하오나 조속히 수정하여 주식 바랍니다.
수정요구 서신
그 근거 자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명빈이 金九德의 따님이라는 자료
조선왕조실록 태종 022 11/11/20(정축) / 김씨를 명빈으로, 노씨를 소혜 궁주로, 김씨를 숙공 궁주로 책봉하다
김씨(金氏)를 봉하여, 명빈(明嬪)을 삼고, 노씨(盧氏)는 소혜 궁주(昭惠宮主)를,
김씨(金氏)는 숙공 궁주(淑恭宮主)를 삼았다.
임금이 김구덕(金九德)에게 벼슬을 제수하고자 하여 지신사(知申事) 김여지(金汝知) 등에게
이르기를, “판각(判閣)이나 근시(近侍)의 벼슬은 빈(嬪)의 아비로 시킬 수 없을까?” 하니,
대답하였다. “전례(前例)로는 마땅히 군(君)을 봉하여야 합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옛적에 한(漢)나라에서 유씨(劉氏)가 아니면 왕이 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사정(事情)은 다르나, 군(君)을 봉할 수 없고, 또 후세에 예(例)로 삼으면 불가하다.
” 임금이 말하였다. “천자(天子)가 황후(皇后)에게 제후(諸侯)가 부인(夫人)에게 천지(天地)
일월(日月) 같아서 높고 낮은 것이 등급이 있는데, 예전 사람이 말하기를, ‘남편이 아내에게
굴한다.’ 하였으니, 만일 헌수(獻酬) 기거(起居)를 예(禮)가 있으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예조 참의(禮曹參議) 허조(許稠)가 대답하였다. “경적(經籍)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남편은 아내의 벼리[綱]가 되는데, 어떻게 항례(抗禮)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 세종 039 10/03/10(임진) / 판돈녕부사 김구덕의 졸기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김구덕(金九德)이 졸(卒)하였다. 구덕은 본관(本貫)이 안동(安東)이니
상락군(上洛君) 김묘(金昴)의 아들이다. 나이 19세에 진사(進士)·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에 보직(補職)되었다. 여러 번 사헌 규정(司憲糾正)으로
천전(遷轉)되어 잡단(雜端)과 형조 의랑(刑曹議郞)을 거쳐 나가서 단양(丹陽)·청풍(淸風)·
한주(韓州)의 세 군의 군수(郡守)가 되었다. 사헌 중승(司憲中丞)으로 전직되어
지사간(知司諫)으로 옮기고, 또 해주(海州)·광주(廣州)·청주(淸州)의 세 주(州)의 목사(牧使)와
연안 부사(延安府使)와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가 되었다. 딸이 태종전(太宗殿)으로 뽑혀
들어와 명빈(明嬪)이 되었으므로 동지총제(同知摠制)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승진되고,
강원도 관찰사가 되고 들어와서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 또 한성윤(漢城尹)으로서
들어와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고, 조금 후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졸(卒)하매 조회를 3일 동안 폐하고, 조문(弔問)하고 부의(賻儀)를 내리고, 안정(安靖)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화합함을 좋아하여 다투지 않는 것을 안(安)이라 하고, 너그럽고
즐거워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한다. 성품이 온량(溫良)하여 사람들을
예(禮)로서 대접하고 평소에 사장(詞章)을 좋아하여 시(詩) 읊기를 폐하지 않았다.
아들은 김오문(金五文)이었다.
▣ 김태서 - 수고하셨습니다.
▣ 김윤만 - 수고하셨습니다.
▣ 김주회 - 대단한 작업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작업이 앞으로는 절실히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김영윤 -
▣ 김윤식 - !!! 감사합니다.
▣ 김은회 -
▣ 김항용 - 감사합니다. <서울 600년>에는 하담 김시양이 경주김씨로 되어 있어 이를 발견한 서운관정공파의 김규태님께서 요청하여 바로 잡은 일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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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홈의 명빈에 대한 중요한 오류가 있어 수정을 요구합니다.
명빈은 세종의 후궁이 아니라 태종의 후궁이니 세종에게는 어머니뻘입니다.
또 명빈은 김오문의 딸이 아니라 김구덕(판돈녕부사. 안정공)의 딸이며 김오문과는
남매지간 입니다. 이에대한 자료를 첨부하오나 조속히 수정하여 주식 바랍니다.
수정요구 서신
그 근거 자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명빈이 金九德의 따님이라는 자료
조선왕조실록 태종 022 11/11/20(정축) / 김씨를 명빈으로, 노씨를 소혜 궁주로, 김씨를 숙공 궁주로 책봉하다
김씨(金氏)를 봉하여, 명빈(明嬪)을 삼고, 노씨(盧氏)는 소혜 궁주(昭惠宮主)를,
김씨(金氏)는 숙공 궁주(淑恭宮主)를 삼았다.
임금이 김구덕(金九德)에게 벼슬을 제수하고자 하여 지신사(知申事) 김여지(金汝知) 등에게
이르기를, “판각(判閣)이나 근시(近侍)의 벼슬은 빈(嬪)의 아비로 시킬 수 없을까?” 하니,
대답하였다. “전례(前例)로는 마땅히 군(君)을 봉하여야 합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옛적에 한(漢)나라에서 유씨(劉氏)가 아니면 왕이 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사정(事情)은 다르나, 군(君)을 봉할 수 없고, 또 후세에 예(例)로 삼으면 불가하다.
” 임금이 말하였다. “천자(天子)가 황후(皇后)에게 제후(諸侯)가 부인(夫人)에게 천지(天地)
일월(日月) 같아서 높고 낮은 것이 등급이 있는데, 예전 사람이 말하기를, ‘남편이 아내에게
굴한다.’ 하였으니, 만일 헌수(獻酬) 기거(起居)를 예(禮)가 있으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예조 참의(禮曹參議) 허조(許稠)가 대답하였다. “경적(經籍)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남편은 아내의 벼리[綱]가 되는데, 어떻게 항례(抗禮)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 세종 039 10/03/10(임진) / 판돈녕부사 김구덕의 졸기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김구덕(金九德)이 졸(卒)하였다. 구덕은 본관(本貫)이 안동(安東)이니
상락군(上洛君) 김묘(金昴)의 아들이다. 나이 19세에 진사(進士)·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에 보직(補職)되었다. 여러 번 사헌 규정(司憲糾正)으로
천전(遷轉)되어 잡단(雜端)과 형조 의랑(刑曹議郞)을 거쳐 나가서 단양(丹陽)·청풍(淸風)·
한주(韓州)의 세 군의 군수(郡守)가 되었다. 사헌 중승(司憲中丞)으로 전직되어
지사간(知司諫)으로 옮기고, 또 해주(海州)·광주(廣州)·청주(淸州)의 세 주(州)의 목사(牧使)와
연안 부사(延安府使)와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가 되었다. 딸이 태종전(太宗殿)으로 뽑혀
들어와 명빈(明嬪)이 되었으므로 동지총제(同知摠制)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승진되고,
강원도 관찰사가 되고 들어와서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 또 한성윤(漢城尹)으로서
들어와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고, 조금 후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졸(卒)하매 조회를 3일 동안 폐하고, 조문(弔問)하고 부의(賻儀)를 내리고, 안정(安靖)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화합함을 좋아하여 다투지 않는 것을 안(安)이라 하고, 너그럽고
즐거워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한다. 성품이 온량(溫良)하여 사람들을
예(禮)로서 대접하고 평소에 사장(詞章)을 좋아하여 시(詩) 읊기를 폐하지 않았다.
아들은 김오문(金五文)이었다.
▣ 김태서 - 수고하셨습니다.
▣ 김윤만 - 수고하셨습니다.
▣ 김주회 - 대단한 작업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작업이 앞으로는 절실히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김영윤 -
▣ 김윤식 - !!! 감사합니다.
▣ 김은회 -
▣ 김항용 - 감사합니다. <서울 600년>에는 하담 김시양이 경주김씨로 되어 있어 이를 발견한 서운관정공파의 김규태님께서 요청하여 바로 잡은 일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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