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자점할아버지 이야기(3)

페이지 정보

김윤만 작성일02-12-26 04:02 조회1,717회 댓글0건

본문

자점할아버지 이야기(3)





--소위 김자점 역모사건은 인조의 후궁 조귀인과 소현세자빈 민회빈(강빈) 그리고



조귀인과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자의대비)간 단순한 여인네들의 다툼을 원당과 산당



무리들이 이를 억지로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역모사건화하였다. 신면의 아들 신종화



의 상소와 숙종의 복권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一)



--처음에 자점이 귀양을 가서 미기에 역모하다가 이 일이 발각되어 그 아들 鉞(월 ;



鉞(월)은 한자가 비슷한 鉽(식)의 오류로 이하 鉽(식)으로 정정하여 표기한다.)과 함



께 복주되었는데 식이 죽을 때 공술하기를, 『자점이 통역관 이형장을 보내서 청인



에게 밀고하기를, 송시열의 무리(山黨 ; 산당)를 묶어 가라고 하였소. 그러나 그 계획



은 신면에게서 나온 것이요.』하므로 신면을 고문했으나 복종하지 아니하고 죽었다.



그런데 뒤에 통역관 이형장이 죽을 때에 오직, 『죄 없는 신면이 불쌍하게 죽었다.』



는 말 이외에 아무 말이 없었다.





(二)



--숙종 을묘년(1675년 숙종 1년)에 신면의 아들 宗華(종화)가 그 아버지의 원앙함을



하소연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의 부, 면이 故(고) 판서 김익희(김장생의 손자)와 이성 三종친으로 나이 서로



비슷하고 정분이 또한 깊었습니다. 한데 불행하게 을유년(1645년 인조 23년)간에 익



희가 간사한 말로 친구를 공격하되 그 뜻이 너무 흉험하므로 신의 아버지가 만나서



面斥(면척 ; 마주 대하여 책망함)도 하고 글월로서 나무라기도 하였더니 익희는 知己



(지기)의 責善(책선)하는 정으로 듣지 아니하옵고 마침 평생토록 원을 삼으니 그 때



의 재상들이 다 익희의 잘못을 배척하여 내직에 있지 못하고 외직으로 쫒겨 나게 되



어, 부끄럼과 분노가 더욱더욱 쌓이고 부풀어 기회만 있으면 거짓말을 꾸며 흉한 일



을 만들려 하더니 말경에는 산당 사람들을 달래어 탄핵과 공격하는 일을 받으니 실



상 기축년(1649년 인조 27년) 대간들의 논핵이 여기서 생겨 난 것입니다.



--신의 어버이가 죄를 입었다가 도리어 恩叙(은서)를 받아 신묘년(1651년 효종 2년)



겨울에 대사간에 임명되자 故(고) 정승 원두표가 새로 참찬이 되니 신의 어버이가



말하기를 두표가 일찍 병자년(1636년 인조 14년)에 남한산성이 포위되던 날에 병권



으로 임금을 위협한 죄가 있고 갑신년(1644년 인조 22년) 逆獄(역옥) 후에 임금의 전



령을 위조하여 연성군 李時昉(이시방 ; 이귀의 아들) 형제를 죽이려고 음모하던 사람



이라, 비록 재주와 지혜가 족히 한 세상을 움켜 쥐고 번복하는 한이 있다하여도 화



평한 조정을 감당할 수 없아오니 그의 벼슬을 갈아버립시사고 논계한 일이 있사온



바 이러한 지 한달이 되지 못하여 역옥이 일어나 두표가 判義禁(판의금 = 의금부 장



관)이 되니 이것을 기화로 삼아 사사 원수 갚는 것을 유일한 능사로 생각하던 바 세



룡(자점의 손자)의 공술에 신의 어버이를 끌어 넣어 安澈(안철)을 증거로 세웠나이



다. 그러나 그 때 의금부에서 수사한 政案(정안)과 조보에 기록된 세룡의 말을 상고



하오면 만났다 하는 시기가 안철이 병사로서 안주 지방에 있을 때인데 그 말이 허망



하오며 또 이경여· 정태화· 김육 같은 이가 다 화평한 것을 주장하여 면질을 청하와



처음에 형벌을 정지하게 되었는데, 급기야 자점의 아들 식이 자복한 후에 두표가 다



시 말하기를 이제 네 공술에는 도시 무관들만 말을 하니 이밖에 문관 중 이름있는



이를 불러 넣을 사람은 없느냐? 이에 식이 마침내 신의 어버이를 끌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는 통역관 이형장이라고 말하였나이다. 한데 그 다음해 봄에 형장



이 환국하여 국문하던 날 효종께서 특별히 신의 어버이 일을 물으라고 명령하시와



형장을 국문하였는데 형장이 두세번 부르짖기를, 내가 이미 역모에 죄를 범해서 죽



게 된 몸이 다른 사람을 돌아 볼 겨를이 있겠소만 신면으로 말하면 과연 원앙하오.>



한 기록이 있으며《연려실기술》에는 또 이러한 것이 있다.





(三)



--판의금 閔熙(민희)의 회계에, 자점의 손자 세룡의 공초에는 『신면이 변사기· 안철



두 사람을 데리고 그 어버이 집에 이르니 그 아비가 나라를 원망하여 모역할 뜻을



말하였소.』하였고,



--자점의 아들 식의 공초에는, 『모역을 함께 같이 의논한 것 아니오, 신면이 臣(신)



을 권하여 이형장으로 하여금 청조에 교환하여 청나라 군사를 의주 지방에 머물게



하고 산당 사람을 잡아가도록 만들려고 하였소.』하여 신면의 죽음이 이에 말미암은



것이로되 그 뒤에 이형장이 청나라에서 돌아와 국문을 당할 때에 공술한 것은 신면



과는 한 번도 얼굴을 대해 본 일이 없는데, 어떻게 서로 통하겠소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신면은 실로 범한 일이 없으나 오직 자점의 집에서 수색한 문서 중에



신면이 대사간이 되어 停啓(정계)한 것이 있는데, 마침 또 송준길이 신면을 김자점의



낙당 사람이라고 지목하여 탄핵한 것과 부합되었으며 또 신면의 위인이 세력을 지고



권세를 부려서 붕우사이에도 미움을 받은 것이 오래이던 까닭도 없지 않았다. 하지



만 자식이 되어 아비를 위해 송사하는 것은 인정과 의리에 막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시월경에 영의정 許積(허적)이 아뢰되, 신묘년(1651년 효종 2년) 옥사 다스릴



때에 신이 金吾郞(금오랑)으로 참석하여 옥사의 사정을 잘 안다고 말하였다.



<신면이 안철과 동모하였단 말은 세룡의 공초에서 나온 것이오나 공초한 가운데 날



짜가 서로 어긋날 뿐 아니라 대신의 진달에 다시 식에게 물으니 식이 공술하되 신면



이와는 같이 의논한 일이 없다고 말하오니 신면이 역모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알겠



사오며, 더욱이 이형장의 공초에 신면의 무죄한 것을 극언하였나이다.> 임금도 그



때에 벌써 신면이 원앙한 것을 알고 하교하시되, 『일이 선조에 생긴 것이라 하여



원앙한 줄을 알고야 어찌 신설하지 않으랴. 곧 신면의 관작을 회복하라.』하였다.



이것이 洛黨(낙당) 대 原黨(원당) 대 山黨(산당)의 싸움이다.





<출전 : 이조당쟁사화/김병곤/삼중당/1967>











▣ 김정중 - !!!!

▣ 김영윤 - 계속되는 자점 할아버지 이야기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참으로 좋은 연구주제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잘 깨우쳐 주고 계십니다. 청 명의 틈새에서 권력을 손에 쥐려는 이들의 숨가쁜 당쟁의 회오리를 보고 있습니다. 또 다음 글이 기대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자점 할아버지는 우리 할아버지에 6촌 형님이 되십니다.윤만 아저씨의 깊은 연구가 기대됩니다.

▣ 김주회 - 감사합니다. 당쟁과 관련된 책은 모두 섭렵하고 계시는 군요. 잘 읽고 있습니다.

▣ 솔내영환 -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아 묻혀 있;던 좋은 자료를 찾아 재조명하시는 윤만씨 화이팅!!!!

▣ 김윤식 - 감사합니다. 많은 것을 새롭게 배우고 있습니다.

▣ 김은회 - 윤만 형님 고맙습니다.

▣ 김완식 - 계속관심가지고 읽고 있습니다.고맙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