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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돈(2) 강진에 계신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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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2-12-26 18:52 조회1,6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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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돈 할아버님은 벼슬살이때문에 서울에 계셨지만



어머니는 강진에 사시고 계셨습니다.



서울에 계시면서도 항상 어머니를 그리워 하며,



벼슬도 강진에서 하기를 간청하기도 하셨으나,



세종께서는 중앙관직에 근무하게 하기 위하여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오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세종은 아직 임금이 되시기 전부터 김돈 선조님에 대한 명망을 들으시고



여러 번 교유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뜻이 이루어 지지 않았는데



임금이 된후에 과거 시험에 김돈선조님이 합격하시니 이제야 만날 수 있겠다고



매우 기뻐하셨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기록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7권 > 전라도 全羅道 [5]







강진현 康津縣



동쪽은 장흥부 경계까지 24리, 남쪽은 바닷가까지 7리, 서쪽은 해남현 경계까지 25리, 북쪽은 영암군



경계까지 44리고, 서울과의 거리는 9백 2리이다.



건치연혁 도강현(道康縣)은 본래 백제의 도무군(道武郡)이었는데, 신라 때에 양무(陽武)로 고쳤고,



고려 때에 도강현으로 고쳐 영암군에 예속시켰으며, 명종 2년에 감무를 두었다. 탐진현(耽津縣)은



본래 백제의 동음현(冬音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탐진으로 고쳐 양무군(陽武郡)에 예속시켰으며,



고려 때에는 영암군에 예속하였다가 뒤에 장흥부에 예속시켰다. 본조 태종 17년에 병마도절제사의



영(營)을 도강(道康)의 옛 치소(治所)에 옮겨 두 현을 합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탐진을 치소로



하였다. 세종 11년에 도강의 송계(松溪)로 옮겼다가 성종 6년에 탐진의 옛 치소로 돌아 왔다



*우거 본조 김돈(金墩) : 자세한 것은 안동부(安東府) 인물 편에 있다.



*제영...김돈(金墩)의 시에, " 한 구역의 소나무와 대는 성긴 연기 밖이요,



십리나 펼쳐 있는 뽕과 삼밭은 가는 비 속이로구나." 하였다.







안동대도호부 인물편에 있는 김돈자료



김돈(金墩) :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썼다. 세종(世宗)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그의 이름을 듣고 불렀으나 돈(墩)이 사양하고 가지 않았더니, 과거에 급제하여 합격을 발표할 때,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위유(慰裕)하기를, “내가 경(卿)을 보고자 하였는데 경이 문득 나를 피하더니



이제 나의 신하가 되었구나.” 하고 뽑아서 집현전(集賢殿)에 들게 하고 항상 경연(經筵)을 겸직하게



하였다. 돈(墩)이 어머니가 강진(康津)에 있다고 하여 여러 번 지방관직(地方官職)으로 나가기를



요청하니, 임금이 특별히 역마(驛馬)를 내려주어서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와서 효도로 봉양하기에



편의하게 하였다. 사림(士林)에서 영광스럽게 여기었다. 돈(墩)이 의상(儀像)을 만드는데



정교(精巧)하였다. 임금이 간의대(簡儀臺)ㆍ보루각(報漏閣)을 제작할 때에 돈(墩)이 김조(金?)와 함께



참여하였다. 승지(承旨)로 있은 지 7년이나 되었는데, 병이 들자 승격시켜 인수 부윤(仁壽府尹)을



임명하였다. 얼마 안 되어서 졸(卒)하였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강진은 우리 문중 군사공파와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군요.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주회 -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에는 김돈 선조님의 어머니는 탐라(제주)에 사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1438년 도승지가 되었으며, 탐라에 있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여러 차례 외직을 원하였으며, 특히 역마를 보내어 탐라에 있는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와서 봉양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 솔내영환 - 강진의 옛 이름이 탐진이었는데 혹시 이것이 잘못된 것 아닐까요?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 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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