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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문화인물 허균과 안동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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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1-09-09 01:45 조회2,6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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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문화인물 허균 안동김문

 9월의 문화인물로 허균과 그의 누이 허난설헌이 선정되어 대대적인 행사에 들어갔다 ,    

(.이에 대하여서는 김주회씨의 글, 게시판 번호 333을 참조하세요)

 

허난설헌은 안동김씨 서운관정공 후손인 김성립의 부인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허균의 부인 또한 우리 안동김문의 따님이시지만, 별로 알려지지 않아 여기에 소개한다.

 허균의 대한 자료는 생략하고,

그의 조강지처인 김씨에 대하여 살펴보면....

문온공(척약재 김구용)의 8세종손은 의금부도사를 지내신 김 대섭이다.

김 대섭은 1남 2녀를 두었으니,

첫딸은 실학자로 유명한 지봉 이 수광이고

그의 아들이 영의정을 지낸 이 성구,대사성을 지낸 이 민구이다.

둘째딸이 바로 교산 허균의 첫 번째 부인이다.

그 다음의 아들이 철원부사, 상의원정을 지낸 김 확이다..

 

허균 (이 이화 지음, 한길사 발행) 에서 인용

....전략......

 허균은 열일곱 살 때에 혼인하여 얻은 세 살 아래의 아내 김씨 에게도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이때서야 이성에 눈뜨기 시작 했고 아내에게 정을 지니게 되었다.

 김씨는 도사 김 대섭의 둘째딸로서 현명하고 정숙한 부인이었다..

김 대섭의 맏딸은 실학자로 유명한 지봉 이수광에게 시집갔고, 김씨는 둘째딸로서

허균에게 시집와 홀시어머니를 극진히 받들었고 종들을 거느릴 때에는 엄하고도

자애롭게 대했다. 허균이 놀기를 좋아할 때마다 군자는 몸가짐을 잘 가져야 한다고

나무랄 지경으로 현명한 부인이었다. 또 그에게 늘 부지런히 공부하기를 권하면서,

가난한 집안 살림과 늙으신 어머님을 생각하여 재주만 믿고 잠깐이라도 놀아서는

안 된다고 격려하기도 하였다. 허균은 이때부터 친구를 넓게 사귀고 술집에 드나들며

놀기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리고 자유롭게 풍류를 즐기는 활달한 선비의

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 같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허균은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어린 딸과 함께 강원도 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허균으로서는 육체적 고통도

처음으로 겪는 셈이었다. 이때에 그의 식구들은 하루에 한끼도 먹지 못했다고 하며,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잠을 자며 하루에 칠 팔십리 길을 걸었다고 한다. 이내 김씨는

피난길에 단천 에서 첫아들을 낳았다. 김씨는 황급한 피난길에서 굶주리고 산후조리를

못해 아들을 낳은 지 사흘만에 임명역 근처의 산성원 에서 세상을 떠났다. 허균은

아내의 체온이 채식기도 전에 타향에서 소를 팔아 관을 짜고 옷을 찢어 염을 하여

장사지내고 강릉으로 향했다. 혼인한지 8년 만에 사별이었고 김씨는 첫딸을 낳은 후

피난길에서 아들을 낳다가 불행을 당했다. 그런데 갓난 아들도 피난길에 잃게 되었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허균과 김씨 사이에서 낳은 딸은 진사 이 사성에게 시집갔고,

여기에서 태어난 외손자 이 필진이 오직 그의 하나뿐인 유문집 [성소부부고]를 보존했다.

허균은 뒤에 형조참의가 되어 죽은 김씨가 숙부인으로 봉함을 받자, 애절한 행장을 지어

김씨를 추모했다. 이하 생략.

망처숙부인김씨행장(9월의 문화 인물 책자에서 인용) 亡妻淑夫人金氏行狀

부인은 융경 신미년(1571)년에 나서 열 다섯에 우리 집으로 시집왔다.

언행은 삼가 공손하면서도 꾸밈이 없었다. 길쌈을 하는 것도 부지런하여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고, 말을 하는 것도 아예 입에서 나오는 것 같지 않았다.

 나의 홀어머니를 섬기는 데도 매우 공손하여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찾아뵈었다. (중략)

임진왜란을 만났을 때 적을 피하여 다녔는데 마침 애를 배어서 지치고도 급하게 되었다.

단천에 이르러서 7월 7일에 아들을 낳았다. 겨우 이틀이 지나자, 적들이 갑자기 이르렀다. ...

아내는 10일 저녁에 목숨이 끊어졌다. 소를 팔아서 관을 사고 옷을 찢어서 염을 했다.

살덩이가 아직도 따뜻해서 차마 땅에 묻을 수 없었다. 곧 적이 성을 공격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진창의 도사가 급히 명령을 내려서 뒷산등성이에 임시로 묻었다. 그대가 세상에서 누린 나이는

스물 둘이요, 나와 함께 산 것은 모두 팔년 이었다. 아! 아! 슬퍼라 그대가 낳은 아들도

젖이 없어서 일찍 죽었다. 처음에 딸 하나를 낳았는데 자라서 진사 이사성에게 시집을 갔다. (중략)

 을미년(1595년)3월에 어머님을 따라 원주 서면 갈대 숲에다 마지막으로 관을 묻었다.

이 언덕을 선영 왼쪽에 있었는데 동북쪽을 등지고 서남쪽을 바라보는 곳이다.

이에 삼가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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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부인 안동김씨를 잃고 그후 둘째부인을 얻었는데, 선산김씨 김효원의 딸인데

행적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연속극 [천둥소리]에서 나오는 부인은 바로 선산김씨이며

첫부인 안동김씨의 사위 이사성은 허균과 관련되어 고문 끝에 귀양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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