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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렴사공 金士廉 ①(행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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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09-11 00:09 조회1,9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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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렴사공 金士廉 ①(행적을 찾아서)





안렴사공 김사렴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시대 개인문집 등에는 보이지 않고, 조선후기에 남공철이 지은 고려명신전 일민편에 일부 내용이 실려 있고, 기타 두문동 관련 자료 등에 諱字(휘자)가 언급되고 있는 정도입니다. 따라서 공식적인 행적을 확인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 고려명신전을 참고문헌으로 한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이나 [디지털 한국학]에 나와있는 김사렴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사렴(金士廉)

생몰년 미상.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안동. 평장사(平章事)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문장에 능하였다.

공민왕 때에 과거에 급제, 벼슬이 안렴사(按廉使)에 이르렀다.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과 교분이 두터웠을 뿐만 아니라 직간으로도 유명하였다.



신돈(辛旽)이 집권하였을 때 공경대부들이 모두 신돈을 받들고 왕이 총애하자, 상소하여 신돈이 반드시 뒤에 정사를 어지럽히고 사직을 망하게 할 것이라고 간하였다. 당시 정추(鄭樞)·이존오(李存吾) 등이 신돈을 탄핵하다 쫓겨난 뒤여서, 조야가 감히 신돈의 일을 말하지 못하였는데 홀로 이를 논하여 직언했다는 소리가 높았다.



고려가 망하자 청주에 은퇴, 태조가 여러 차례 좌사간에 임명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도산(陶山)으로 옮겨 은거하였다.

참고문헌 : 高麗名臣傳. 〈朴天圭〉





*일민(逸民)이라 함은 자기의 주의를 지키기 위해 숨어서 세상에 나오지 않는 덕이 높은 사람을 말하고,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은 1822년(순조 22)에 금릉(金陵) 남공철(南公轍:1760~1840)이 지은 전기집(傳記集)으로



*남공철(南公轍 [1760~1840]) 이라는 사람은 본관 의령(宜寧). 자 원평(元平). 호 사영(思穎) ·금릉(金陵). 1784년(정조 8) 음보로 세마(洗馬)에 등용되어 산청(山淸) ·임실(任實) 등의 현감을 지냈다. 179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800년(순조 1) 동지사, 이듬해 이조판서가 되었다. 1811년 원자좌유선(元子左諭善), 1814년 선혜청제조에 이어 예조판서, 1817년 우의정, 1821년 좌의정, 1823년 영의정에 올랐고, 1833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고 합니다.







▣ 청주교육대학교 김재윤 교수(문학박사) 가 지은 "여말의 충절 김사렴" 이라는 글을 보면



공은 임종이 다가오자 여러 아들들을 돌아보며 유언하기를

"나는 고려조의 옛신하로서 이미 임금을 도와 나라를 보존치 못하였고, 나라가 망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따라 죽지 못하였으니, 천하의 죄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그러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돌아가 선왕과 조상님들을 뵐 수 있단 말이냐?

내가 죽거든 깊은 산중에 파묻고 봉분도 하지 말고 표석도 세우지 말라. 그리고 우리 자손 중에서 고려조에 이미 벼슬했던 사람은 다시는 조선조에서 벼슬하지 말라." 고말하였다. (고려명신전 참조)



공의 이 유언은 그 자손들이 그대로 받들어 평총을 하고 표석도 세우지 않았다. 그뒤 많은 세월동안 병란과 시세 혼란으로 공의 묘소를 알 길이 없었다.



또한 공의 학문도덕과 그 고매한 인격으로 미루어 볼 때 생존시에 썼던 기록물이나 시문과 저서들이 많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 세상에 아무러한 행적도 남기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에 그 어느 것 하나도 찾아볼 길이 없고, 공의 생졸일시조차도 알 수 없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은 살아 있으면소도 사람들로 하여금 그 처소를 알 수 없게 하였고, 죽어서도 후세 사람들이 그 묘소를 알 수 없게 하였다.



공이 타계한 지 273년만인 1678년(숙종4년 戊午)에 후손들이 공의 증손인 양성공 吹(취)의 실전된 묘소를 탐색하던 중, 석곽 중의 誌石이 발견되어 자세히 살펴본 결과 뜻밖에도 공의 묘소로 확인되었다. 당시의 그 기쁨이 얼마나 컷을 것인가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묘소가 알려지게 됨으로써 혹시 어떤 화가 미치지 않을까 조심스럽고 또한 다시 실전하지 않을까 두려운 나머지 작은 징표만을 남겨 미봉을 한 채 내려오다가, 조선 왕조가 망한후 1938년(戊寅) 2월에 가서야 봉분을 개축하고 신도비와 비각등 제반 石儀를 마련하여 어엿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지금의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 도산 자좌의 양지바른 언덕으로서 그 앞으로는 너른 들이 펼쳐있고 그 사이로는 금강 줄기가 유유히 굽이치고 있다.





공은 말년에 친교를 맺어 왔던 운곡 원천석이 공이 은거하고 있던 오근촌으로 찾아왔을 때 문정공 신현 선생과 역동 우탁 두분이 혁명역도들에게 억울하게 당한 일을 서로 비탄해 하면서 운곡에게 그들의 화 당한 사실을 잊지 말고 기록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로써 미루어보면 공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문헌과 詩書들이 역도들의 손에 의해서 화를 당하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자기 손으로 손수 불살라 없애 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공에 관한 일반 서적들은 예상했던 대로 혁명당시에 역도들이 윤몰시키고 말았다. 이는 모두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화해사전, 오은공시장)









정리해 보면 안렴사공 김사렴은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킴으로써 정도전등 혁명세력에 의해 견제를 받고 문집등 기록이 전몰된 듯하고, 조선초 정인지가 지은 고려사에서도 기록이 의도적으로 말소된 듯합니다.



또한 죽음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행적을 알지 못하도록 문집등을 말소하고 자신의 봉분을 평총으로 하여 남이 알지 못하게 하였고, 고려조에 벼슬한 아들 손자는 조선조에 다시 벼슬하지 말라고 유언하시어 자손들이 이를 따름으로서 안렴사공과 자손들의 구체적인 행적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다음 기록을 보면 한두가지 행적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 순흥안씨 홈페이지를 보면 안원숭이라는 분은 9남매 (3남 6녀)를 두었는데, 안렴사공 김사렴이 제일 큰 사위로 나와 있고, 관직이 右司諫(우사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안원숭은 슬하에 9남매(3남 6녀)를 두었는바

장남은 형조전서를 지낸 경질공 원(瑗)이며,

둘째는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휘 조동(祖同:양공공파조)이고,

셋째아들은 한림지제고(翰林知製誥)를 지낸 휘 수(垂:한림공파조)이다.



장녀는 우사간(右司간) 김사렴(金士廉)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우상시(右常侍)를 지낸 덕양부원군(德陽府院君) 기전룡(奇田龍)에게 출가,

셋째딸은 창녕부원군 독곡 성석린(좌의정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에게,

다음은 전공판서(典工判書) 김추(金錘)에게 출가했고,

다섯째딸은 좌랑(佐郞) 김수(金垂)에게 출가했고,

막내딸은 판중추(判中樞) 유원지(柳元之:좌의정 柳曼殊의 아들)에게 출가하였다.





右司諫(우사간)은 고려 때 중서문하성에 소속되어 간쟁을 맡아본 정 6품의 벼슬이었으나, 뒤에 우헌납으로 고치면서 정 5품으로 하였다가 다시 종 5품으로 바꾸었다고 하며



中書問下省(중서문하성)은 고려 때 국가의 행정을 총괄하는 관청으로, 왕의 조서(詔書)를 받들어 심사(審査)하고 시행하는 기관이라고 합니다.









▣ 또한 1993년에 김용선 편저로 한림대학교에서 발간한 [고려묘지명집성] 이라는 책자에 보면



목은이색이 찬하여 공민왕7년(원 지정18년, 1358) 에 만든 [김태현처 왕씨 묘지명]에

金台鉉의 외손 남6인중 군부판서진현관 安元崇이라는 분이 있고, 외증손 여17인중 한분이 秘書監 金士廉에게 출가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안원숭이라는 분은 바로 김사렴의 장인이 되는 분입니다.



1358년 (공민왕7년)에 만들어진 묘지명에 "비서감 김사렴" 이라는 기록이 보이므로

김사렴은 공민왕초(1351?-)에 문과에 급제하여 1358년 경에는 秘書監(비서감, 고려 때 秘書省 소속의 종 3품 관직)을 역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秘書省(비서성)이란 관청은 고려 때 왕의 측근에서 축문(祝文)과 경적(經籍)을 다루고 임금의 명령을 행하는 기관인데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과 같은 관청이라고 합니다.







▣ 김사렴 할아버지가 역임하신 안렴사(按廉使)라는 자리는 고려시대의 지방장관으로 지금으로 하면 광역시장, 도지사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지방장관이 그 지방의 입법,행정,사법을 총괄하였기 때문에 지금의 시도지사보다는 권한이 막강한 자리라고 생각됩니다.



고려는 초기 이래 지방장관을 절도사(節度使) ·안무사(按撫使) ·안찰사(按察使) ·도부서(都部署) 등으로 부르다가 1276년(충렬왕 2) 안렴사로 고쳤다. 1298년에는 지역이 넓은 충청 ·전라 ·경상 3도에 안렴부사(按廉副使)를 두어 안렴사를 보좌하게 하였고, 동계(東界:함경도)의 안집사(按集使)를 없애고, 교주도(交州道:강원도)의 안렴사가 이를 겸하게 하였다.



1389년(창왕 1)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고쳤다가 1390년 각 도에 관찰사·경력사(經歷使)를 두었으며, 1392년 다시 이를 안렴사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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