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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전설적 서화 수장가였던 석농 김광국(石農 金光國·1727~1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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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12-29 03:03 조회2,1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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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전설적 서화 수장가였던 석농 김광국(石農 金光國·1727~1797)





오늘 12월28일자 조선일보에 18세기의 전설적 서화 수장가였던 석농 김광국(石農 金光國·1727~1797) 관련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한국서화가인명사전> 기록대로 이 분이 우리 선안동김씨 군사공파이신지? 아니면 <문화유산답사기> 기록대로 경주김씨이신지? 궁금중이 더해 갑니다.



내용중에 ---맏아들 ★종건(宗建·1746~1811)을 시켜 글(발문·跋文)을 썼는데----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군사공파보 같고 계신 분 계시면 김광국 선조님의 아들을 확인해서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국서화가인명사전>

범우사,저자 한문영

김광국 金光國 <조선> 1709(숙종35) ~ ? 문관, 서화가

자는 ★대관(大觀),★원빈(元賓) 호는 ★석농(石農) 본관은 안동,

동지중추부사 ★김수기의 손자,★김담(金湛)의아들, 1735년(영조11)

문과에급제, 여러 청요직을 지내고 1755년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1759년 황해도 암행어사가 되고,1769년 도승지를 거쳐

병조참판을 지냈다. 그림을 잘그렸을뿐 아니라 그림에 대한 감식안도

높아 고서화를 즐겼으며, 젊어서 김광수(金光遂), 이인상(李麟祥)등과

가까이 사귀었다.<작품>석농화원(石農畵苑),<편서>간독(簡牘)





<안동김씨족보, 군사공파보>

(1709 ~ 1783)

김광국(金光國) 字 중관(仲管) 숙종(肅宗) 기축생(己丑生) 을묘문과(乙卯文科)

관(官) 가선대부행승정원도승지겸경연참찬관(嘉善大夫行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

춘추관예문관수찬관(春秋館藝文館修撰官),직제학(直提學),

상서원정지(尙瑞院正至),호조참판(戶曹參判),제호조판서(除戶曹判書),

末肅而卒卽癸卯二月二日 壽75 諡 貞肅公, 묘선영좌록이좌(墓先塋左麓異坐)

배(配) 정부인 창원황씨(貞夫人 昌原黃氏)

배(配) 정부인 죽산안씨(貞夫人 竹山安氏)









(조선일보/문화)

[문화] 18세기 ‘西洋畵風 국내유입’ 첫 확인 (2002.12.27)



▲사진설명 : 석농 ★김광국이 18세기에 소장했던 서양판화.당시의 조선인들이 원근법 등 서양화법을 익혔음을 보여준다./이원복 국립광주박물관장 제공



18세기에 우리 화단에서 서양화를 구입·소장해서 서양화풍을 익혔음을 입증하는 서양판화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18세기의 전설적 서화 수장가였던 석농 ★김광국(石農 金光國·1727~1797)이 소장했던 동판화이다. 이 그림은 20세기, 유물 수집가로 이름 높았던 고(故) 홍성하씨가 소장했다가 최근 국내의 한 고미술상이 미국에서 입수해 들여온 것으로, 현재는 개인 소장자가 가지고 있다.



가로 25·7㎝, 세로 21㎝의 이 동판화가 어느 때, 누구의 작품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석농이 소장했다는 점에서 18세기 이전 작품임은 확실하며 ▲작품 아래에 이슬람제국 정치지배자의 명칭이었던 술탄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고, 회교 사원인 모스크가 눈에 띈다는 점에서 터키를 배경으로 한 그림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석농은 당대의 서화가였던 심사정 이인상 등과 교유하는 등 높은 감식안을 지닌 소장가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자신이 소장한 작품을 ‘화원별집’‘석농화원’등으로 묶어 보관했지만 후손들이 몰락하면서 그가 모은 그림도 여기 저기 흩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소장했던 그림 중 120여점 정도가 현존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처음으로 실체가 밝혀진 석농의 서양판화에 대해 외교학자이자 미술사학자였던 고(故) 동주 이용희(東洲 李用熙)는 1969년 ‘아세아’ 3월호에 기고한 논문 ‘김단원(=김홍도)이라는 화원’에서 “내가 우연히 본 바로는 홍성하선생의 ‘석농화첩’의 남은 그림 중 서양화풍 풍경판화 한 장이 일본의 우키요에(서기 17~19세기 일본 에도시대에 유행했던 미술 장르) 한 장과 더불어 수록돼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적었다. 그러나 이후 미술사학계에서 이 작품을 직접 본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원근법이 명확히 드러나는 이 그림 옆에 석농은 맏아들 ★종건(宗建·1746~1811)을 시켜 글(발문·跋文)을 썼는데, 서양 원근법에 대한 놀라움이 잘 드러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김승희 학예연구관이 번역한 발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서양화법(태서화법·泰西畵法)은 당나라나 송나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원근법을 사용해) 짧은 폭으로도 능히 천리 밖의 먼 기운을 표현한다. 한 장으로 이처럼 그려냄이 가히 비할 데가 없으니, 현실과 꼭 같이 그렸다는 점에서 중국풍이 아닌 새로운 화풍이라고 할 수 있다.”



이원복 국립광주박물관장(미술사)은 “청나라의 수도 연경(지금의 북경)에서 구입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조선 후기, 서양화풍의 국내 수용과 전파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18~19세기 청나라에 갔던 이들이 북경에서 서양화풍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하는 일들이 많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단지 중국에서 서양화를 보고만 온 것이 아니라 이를 구입해 들여와 국내 소장가가 수집했다는 데서 서양화풍에 대한 적극적 수용의지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愼亨浚기자 hjshin@chosun.com )













▣ 김윤식 - 잘 읽었습니다. 일전에 솔내 대부님께서 명빈 오류를 정정하신 것처럼 세간에 잘못 알려진 내용이 많은데, 백곡 할아버지의 경우도 개성김씨라 한 서책이 더러 있습니다. 잘못된 내용을 차근차근 고쳐 나가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김항용 -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 김발용 - 늦었습니다. 군사공파보에 김광국의 조부 수기(壽基) 부 담(湛)으로 되어 있으나 아드님은 한빈(漢彬) 노빈(魯彬)으로 되어 있습니다.

▣ 김주회 - 발용 형님! 감사합니다. 안타깝습니다. 실날같은 희망을 갖고 있었는데, 결국은 석농 김광국은 경주김씨였군요.

▣ 김주회 - <한국서화가인명사전> 정정을 요구해야 겠습니다.

▣ 솔내영환 - 군사공파보에 의하면 조부=수기, 부=담 이것이 서화가 인명사전과 일치합니다. 이는 삼대의 이름이 같으면 확실한 것 아닐까요? 다만 동사전에 아들이름과 족보에 있는 아들이름에 같은 점이 없는데 그 아들(인명사전)이 적힌 아들은 후손이 없어서 족보에서 빠졌거나, 본명이 아닌 자이거나 호 일수도 있기에 이늘 근거 할 수는 없습니다. 조부와 부, 본인의 이름이 일치하므로 석농 김광국은 안동김씨 군사공파이심이 틀림 없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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