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렴사공 金士廉 ②(생몰년 추정,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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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09-11 17:16 조회1,966회 댓글0건본문
안렴사공 金士廉 ②(생몰년 추정, 형제)
안렴사공 김사렴의 생몰년은 일부 자료에 1335(고려충숙왕3년)에 나시어 1405년(조선태종5년 을유)에 돌아가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 그러나 4남1녀중 막내인 김사형의 생몰년이 1333-1407(고려충혜왕2-조선태종7) 이므로 둘째인 김사렴은 1,2년 터울로 볼 때 1329년생이나 1330년생일 것입니다.
다음에 김사렴의 증조부 김순부터 간단히 연도계산을 해보면 18세 내지 20세 정도에 장자를 낳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는 아마도 몽고 지배시기에 유행한 조혼의 풍습에 따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생몰년 추정>
증조부 (3/5)김순 1258-1321
조부 (3/3)김영후 1292-1361
부 (1/2)김천 ?1310-
형 (1/4)김사겸 ?1328-
★ (2/4)김사렴 ?1330-
제 (3/4)김사안 ?1331-1391(공양왕 3)
제 (4/4)김사형 1333-1407(충혜왕2-태종7)
▣ 김사렴은 순흥안씨(안원숭의 6녀중 1녀)와의 사이에 6남(김간, 인비, 김위, 김제, 김약, 김식) 1녀(마희원에 출가)를 두었는데
김사렴의 막내아들인 6남 金湜은 족보 기록에 의하면 이조좌랑을 지낸 것으로 나와 있고, 기타 일부 자료에 보면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조에 출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조선조 문과방목] "안동김씨" 편에서는 이름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문과방목] "본관 미상의 김씨" 편에 보면
1356년(병신) 생으로 태조(太祖)2년(1393년), 식년시(式年試) 동진사3(同進士3) 으로 문과에 급제하신 본관 미상의 金湜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전력(前歷)은 생원(生員), 관직(官職)은 형조/판서&(刑曹/判書&) 으로 되어 있습니다.
김사렴의 생년을 1330년(?) 전후로 볼 때 1356년에 태어난 김식과는 25년 정도 나이 차이를 보면 이분이 김사렴의 6남1녀중 막내 아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부(父)가 김휘중(金輝中)으로 되어 있는데, 다른 이름도 있을 수 있고, 잘못 기록된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도 없습니다.
이 기록이 맞다고 보고 형제간의 터울을 1,2년으로 단순계산해서 생몰년을 추정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생몰년 추정>
증조부 (3/5)김순 1258-1321
조부 (3/3)김영후 1292-1361
부 (1/2)김천 ?1310-
형 (1/4)김사겸 ?1328-
★ (2/4)김사렴 ?1330-
제 (3/4)김사안 ?1331-1391(공양왕 3)
제 (4/4)김사형 1333-1407(충혜왕2-태종7)
자 (1/7)김간 ?1347-
자 (2/7)인비 ?1348-
녀 (3/7)장녀 ?1350-
자 (4/7)김위 ?1351-
자 (5/7)김제 ?1353- <1377진사, 1382문과>
자 (6/7)김약 ?1354-
자 (7/7)김식 1356- <1393문과>
김식(金湜)
태조(太祖)2년(1393년), 식년시(式年試) 동진사3(同進士3)
>>> 인적사항
생년(生年) 1356년, 병신
자(字)
호(號)
본관(本貫) 미상(未詳)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휘중(金輝中)
생부(生父)
조부(祖父)
증조부(曾祖父)
외조부(外祖父)
처부(妻父)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관직(官職) 형조/판서&(刑曹/判書&)
▣ 김사렴의 형 金士謙(김사겸)
족보기록을 보면
판사를 지냈고
배위는 청주한씨인데 부는 청성군 公義이고, 조부는 상당부원군 ( +屋옥)이고, 증조부는 한림학사 謝奇이며, 외조부는 대언 청주인 慶斯萬이다.
子는 (王+禹)로 부사를 지냈고, 女는 尹?輔와 柳沼文(문화인,전서)에 출가하였다.
경사만은 김방경의 사위 경수의 아들이다. 즉 김방경의 외손자이다. 경사만의 여(김방경의 외증손녀)는 한공의와 결혼하여 그 사이의 딸이 김사겸과 혼인한 것이다.
★김방경 -여(안동김씨)+경수 -경사만 -여(청주경씨)+한공의 -여(청주한씨)+김사겸
김용선 편저로 1993년 한림대학교에서 발간한 [고려묘지명집성] 에 게재되어 있는
1365년 (공민왕14년 을사) 이장 찬 [한공의 묘지명]에 보면
한공의는 3남3녀를 두었는데 딸 3명은 모두 먼저 죽었는데 宗簿令 金士謙(종부령 김사겸)과 三司右尹 李彰路(삼사우륜 이창로)와 軍簿判書 廉興邦(군부판서 염흥방)은 그의 사위들이다. 외손자인 金禑(김우)는 權務(권무)이며, 손녀2명이 있다. 라고 되어 있는데
김사겸은 1365년 (공민왕14년 을사)에 종부령이라는 벼슬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당시 權務(권무)라는 벼슬을 하고 있던 외손자인 金禑(김우)는 김사겸의 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족보에는 金禑(김우)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습니다.
▣ 김사렴의 동생 金士安(김사안)
영환종친께서 작성하신 문온공파 자료에 보면
김사안은 문온공파조 척약재 김구용의 부친인 상락군 김묘의 3남9녀중 제일 큰 사위이이고, 최유경(김묘의 셋째딸이 최유경의 둘째부인, 최유경은 김사렴을 주벽으로 모시는 청원 송천서원에 배향되어 있음) 과는 동서지간이 됩니다.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20.上洛君 設壇 墓碑文 (金昴)
제 1서는 재신 김사안이나 무후하고,
21.驪興郡 夫人 閔氏 墓誌銘 (金昴 처)
제 1서는 전 밀직사부사 김사안,
<전주최씨 홈페이지>
최유경의 두번째부인 상락공 김묘의 딸(안동김씨)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1] 김사안(金士安)
고려시대[?-1391(공양왕3)]의 문신. 시호는 충강(忠康). 본관은 안동(安東)임.
방경(方慶)의 4세손이며, 할아버지는 상락후(上洛侯) 영후(永煦)이고, 아버지는 밀직부사를 지낸 천(#천46)이다. 조선의 개국공신 사형(士衡)의 형이며 부인은 당숙 묘(昴)의 딸이다.
1388년(우왕 14)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서 이색(李穡)·이숭인(李崇仁)과 함께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신정(新正)을 하례하였으며 공양왕 때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충강(忠康)이라 시호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朴天植〉
▣ 김사렴의 동생 金士衡(김사형)
김사렴의 막내동생인 김사형(익원공파조)에 대한 자료는 많기 때문에 생략하고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것만 게재합니다.
[1] 김사형(金士衡)
고려, 조선시대[1333-1407(충혜왕2-태종7)]의 문신. 자는 평보(平甫)이고, 호는 낙포(洛圃). 시호는 익원(翼元). 본관은 안동(安東)임. 고조는 방경(方慶), 할아버지는 영후(永煦),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 천(#천46)이다.
음보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뒤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고, 뒤에 개성윤(開城尹)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뒤,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고, 1390년(공양왕 2)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이 되고 이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승진하였다.
1390년 윤이(尹#이23)·이초(李初)의 옥이 있은 뒤 그 당을 둘러싸고 찬성사(贊成事)정몽주와 대결하고 서로 탄핵하였다. 삼사좌사(三司左使)·동판도평의사사(同判都評議司事)로 있다가 여러 장상들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 겸 병조전서응양상장군(門下侍郎贊成事兼判尙瑞司事兼兵曹典書鷹揚上將軍)에 올랐다.
같은해 12월 문하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의 작위와 식읍 1천호 및 식실봉(食實封)300호를 받았다.
그뒤 좌정승을 지냈고 1398년(태조 7) 제1차왕자난 때,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 적장(嫡長)을 후사로 세울 것을 요청하여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1등에 책봉되었다.
1399년(정종 1)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1401년 다시 좌정승에 복직되고 이듬해 영사평부사를 지낸 다음,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개국공신 중에서는 배극렴(裵克廉)다음으로 지위가 높았던 고려의 원로구신이며, 가문이 귀현(貴顯)하였고 마음이 청고하여 이성계가 아꼈다고 한다.
조준과 함께 8년간 재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정사는 모두 조준이 전단(專斷)하였고, 말을 신중히 하고 스스로 삼가며 분수를 지켜 조준의 의견에 따랐으며, 적을 가지지 않았다. 개국공신 1등에 책봉된 것은 공이 컸기 때문이 아니며, 처음에는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다고도 한다.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韓永愚〉
안렴사공 김사렴의 생몰년은 일부 자료에 1335(고려충숙왕3년)에 나시어 1405년(조선태종5년 을유)에 돌아가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 그러나 4남1녀중 막내인 김사형의 생몰년이 1333-1407(고려충혜왕2-조선태종7) 이므로 둘째인 김사렴은 1,2년 터울로 볼 때 1329년생이나 1330년생일 것입니다.
다음에 김사렴의 증조부 김순부터 간단히 연도계산을 해보면 18세 내지 20세 정도에 장자를 낳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는 아마도 몽고 지배시기에 유행한 조혼의 풍습에 따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생몰년 추정>
증조부 (3/5)김순 1258-1321
조부 (3/3)김영후 1292-1361
부 (1/2)김천 ?1310-
형 (1/4)김사겸 ?1328-
★ (2/4)김사렴 ?1330-
제 (3/4)김사안 ?1331-1391(공양왕 3)
제 (4/4)김사형 1333-1407(충혜왕2-태종7)
▣ 김사렴은 순흥안씨(안원숭의 6녀중 1녀)와의 사이에 6남(김간, 인비, 김위, 김제, 김약, 김식) 1녀(마희원에 출가)를 두었는데
김사렴의 막내아들인 6남 金湜은 족보 기록에 의하면 이조좌랑을 지낸 것으로 나와 있고, 기타 일부 자료에 보면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조에 출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조선조 문과방목] "안동김씨" 편에서는 이름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문과방목] "본관 미상의 김씨" 편에 보면
1356년(병신) 생으로 태조(太祖)2년(1393년), 식년시(式年試) 동진사3(同進士3) 으로 문과에 급제하신 본관 미상의 金湜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전력(前歷)은 생원(生員), 관직(官職)은 형조/판서&(刑曹/判書&) 으로 되어 있습니다.
김사렴의 생년을 1330년(?) 전후로 볼 때 1356년에 태어난 김식과는 25년 정도 나이 차이를 보면 이분이 김사렴의 6남1녀중 막내 아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부(父)가 김휘중(金輝中)으로 되어 있는데, 다른 이름도 있을 수 있고, 잘못 기록된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도 없습니다.
이 기록이 맞다고 보고 형제간의 터울을 1,2년으로 단순계산해서 생몰년을 추정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생몰년 추정>
증조부 (3/5)김순 1258-1321
조부 (3/3)김영후 1292-1361
부 (1/2)김천 ?1310-
형 (1/4)김사겸 ?1328-
★ (2/4)김사렴 ?1330-
제 (3/4)김사안 ?1331-1391(공양왕 3)
제 (4/4)김사형 1333-1407(충혜왕2-태종7)
자 (1/7)김간 ?1347-
자 (2/7)인비 ?1348-
녀 (3/7)장녀 ?1350-
자 (4/7)김위 ?1351-
자 (5/7)김제 ?1353- <1377진사, 1382문과>
자 (6/7)김약 ?1354-
자 (7/7)김식 1356- <1393문과>
김식(金湜)
태조(太祖)2년(1393년), 식년시(式年試) 동진사3(同進士3)
>>> 인적사항
생년(生年) 1356년, 병신
자(字)
호(號)
본관(本貫) 미상(未詳)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휘중(金輝中)
생부(生父)
조부(祖父)
증조부(曾祖父)
외조부(外祖父)
처부(妻父)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관직(官職) 형조/판서&(刑曹/判書&)
▣ 김사렴의 형 金士謙(김사겸)
족보기록을 보면
판사를 지냈고
배위는 청주한씨인데 부는 청성군 公義이고, 조부는 상당부원군 ( +屋옥)이고, 증조부는 한림학사 謝奇이며, 외조부는 대언 청주인 慶斯萬이다.
子는 (王+禹)로 부사를 지냈고, 女는 尹?輔와 柳沼文(문화인,전서)에 출가하였다.
경사만은 김방경의 사위 경수의 아들이다. 즉 김방경의 외손자이다. 경사만의 여(김방경의 외증손녀)는 한공의와 결혼하여 그 사이의 딸이 김사겸과 혼인한 것이다.
★김방경 -여(안동김씨)+경수 -경사만 -여(청주경씨)+한공의 -여(청주한씨)+김사겸
김용선 편저로 1993년 한림대학교에서 발간한 [고려묘지명집성] 에 게재되어 있는
1365년 (공민왕14년 을사) 이장 찬 [한공의 묘지명]에 보면
한공의는 3남3녀를 두었는데 딸 3명은 모두 먼저 죽었는데 宗簿令 金士謙(종부령 김사겸)과 三司右尹 李彰路(삼사우륜 이창로)와 軍簿判書 廉興邦(군부판서 염흥방)은 그의 사위들이다. 외손자인 金禑(김우)는 權務(권무)이며, 손녀2명이 있다. 라고 되어 있는데
김사겸은 1365년 (공민왕14년 을사)에 종부령이라는 벼슬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당시 權務(권무)라는 벼슬을 하고 있던 외손자인 金禑(김우)는 김사겸의 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족보에는 金禑(김우)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습니다.
▣ 김사렴의 동생 金士安(김사안)
영환종친께서 작성하신 문온공파 자료에 보면
김사안은 문온공파조 척약재 김구용의 부친인 상락군 김묘의 3남9녀중 제일 큰 사위이이고, 최유경(김묘의 셋째딸이 최유경의 둘째부인, 최유경은 김사렴을 주벽으로 모시는 청원 송천서원에 배향되어 있음) 과는 동서지간이 됩니다.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20.上洛君 設壇 墓碑文 (金昴)
제 1서는 재신 김사안이나 무후하고,
21.驪興郡 夫人 閔氏 墓誌銘 (金昴 처)
제 1서는 전 밀직사부사 김사안,
<전주최씨 홈페이지>
최유경의 두번째부인 상락공 김묘의 딸(안동김씨)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1] 김사안(金士安)
고려시대[?-1391(공양왕3)]의 문신. 시호는 충강(忠康). 본관은 안동(安東)임.
방경(方慶)의 4세손이며, 할아버지는 상락후(上洛侯) 영후(永煦)이고, 아버지는 밀직부사를 지낸 천(#천46)이다. 조선의 개국공신 사형(士衡)의 형이며 부인은 당숙 묘(昴)의 딸이다.
1388년(우왕 14)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서 이색(李穡)·이숭인(李崇仁)과 함께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신정(新正)을 하례하였으며 공양왕 때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충강(忠康)이라 시호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朴天植〉
▣ 김사렴의 동생 金士衡(김사형)
김사렴의 막내동생인 김사형(익원공파조)에 대한 자료는 많기 때문에 생략하고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것만 게재합니다.
[1] 김사형(金士衡)
고려, 조선시대[1333-1407(충혜왕2-태종7)]의 문신. 자는 평보(平甫)이고, 호는 낙포(洛圃). 시호는 익원(翼元). 본관은 안동(安東)임. 고조는 방경(方慶), 할아버지는 영후(永煦),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 천(#천46)이다.
음보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뒤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고, 뒤에 개성윤(開城尹)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뒤,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고, 1390년(공양왕 2)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이 되고 이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승진하였다.
1390년 윤이(尹#이23)·이초(李初)의 옥이 있은 뒤 그 당을 둘러싸고 찬성사(贊成事)정몽주와 대결하고 서로 탄핵하였다. 삼사좌사(三司左使)·동판도평의사사(同判都評議司事)로 있다가 여러 장상들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 겸 병조전서응양상장군(門下侍郎贊成事兼判尙瑞司事兼兵曹典書鷹揚上將軍)에 올랐다.
같은해 12월 문하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의 작위와 식읍 1천호 및 식실봉(食實封)300호를 받았다.
그뒤 좌정승을 지냈고 1398년(태조 7) 제1차왕자난 때,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 적장(嫡長)을 후사로 세울 것을 요청하여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1등에 책봉되었다.
1399년(정종 1)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1401년 다시 좌정승에 복직되고 이듬해 영사평부사를 지낸 다음,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개국공신 중에서는 배극렴(裵克廉)다음으로 지위가 높았던 고려의 원로구신이며, 가문이 귀현(貴顯)하였고 마음이 청고하여 이성계가 아꼈다고 한다.
조준과 함께 8년간 재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정사는 모두 조준이 전단(專斷)하였고, 말을 신중히 하고 스스로 삼가며 분수를 지켜 조준의 의견에 따랐으며, 적을 가지지 않았다. 개국공신 1등에 책봉된 것은 공이 컸기 때문이 아니며, 처음에는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다고도 한다.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韓永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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