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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돈(4) 간의대의 설계는 김돈 선조님의 업적이라는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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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2-12-30 20:05 조회1,6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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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의대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 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의대를 설치하고 그 기문을 김돈 할아버님이 쓰신 것으로 보아 그 제작에 선조님이



참여하였으리라고 추측은 하였습니다만, 확실한 증거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조님께서 간의대의 설계에 직접 참여 하셨다는 근거 자료를 찾았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선조님이 쓰신 [간의대기]를 옮겨 쓰다 보니 자연히 밝혀 지게 되었습니다.



간의대기 본문 중에서 [유사가 시종을 기록하여 장래에 명시할 것을 청하므로 이에 신이 그 설계에



참여했다 하여 신에게 명하여 그 사실을 기록하게 하였다.]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여렵게 타자하면서 이런 자료를 밝히게 되니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간의대기 본문(번역본)을 여기에 소개합니다.





간의대 기 (簡儀臺 記)



선덕(宣德) 7년 임자 가을 7월 아무 날에 임금은 경연(經筵)에 나아가 역상(歷象)의 이치를 논하시고,



따라서 예문관 제학(禮文館提學) 신 정인지(鄭麟趾)에 이르기를, "우리 동방이 멀리 바다 밖에 있으나



모든 시설면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중국의 제도를 따랐는데, 유독 하늘을 관찰하는 기구가 부족한 점이



있다. 경(卿)은 이미 역산(歷算)에 대하여 제조(提調)의 직을 맡고 있으니, 대제학(大提學) 정초(鄭招)와



더불어 고전을 강구하고 의표(儀表)를 창작하여 측험(測驗)하는 것을 갖추도록 하라. 그러나 그 요점은



북극(北極)의 출지(出地) 고하(高下)에 달려 있다. 그러니 먼저 간의(簡儀)를 만들어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신 정초·신 정인지는 옛제도를 상고하는 일을 맡고, 중추원사(中樞院使) 이천(李 )은



공역을 감독하는 일을 맡아서 먼저 나무로 견양을 만들어 북극의 출지(출지)를 38도로 정하니, 거의



원사(元史)의 측정한 바와 부합되므로 드디어 동(銅)을 부어 의(儀)를 만들어 완성되게 되자, 호조판서



신 안순(安純)에게 명하여 후원 경회루의 북쪽에다 돌고, 석란(石欄)을 두르고 머리에 간의(簡儀)를



설치하며, 정방형(正方形)의 안상을 그 남쪽에 놓고, 대의 서쪽에 높이가 5백 8천이 되는 동주표(銅柱表)



를 세우고, 푸른 돌을 깎아서 규(圭)를 만들고, 규의 면에 장(丈)·척(尺)·촌(寸)·분(分)의 용영부(用影符)



를 새기고, 일중(日中)의 그림자를 취하여 이기(二氣)의 차고 줄어드는 단표(端表)로 미루어 알게 하고,



서쪽에 작은 각(閣)을 세워 혼의와 혼상을 두되 혼의는 동으로, 혼상은 서로 하며, 혼의의 제도는



역대마다 한결같지 아니한데, 지금은 오(吳)씨의 서찬(書纂)에 실린 바와같이 칠목(漆木)으로 혼의·



혼상을 만드는 제도에 의거하여 칠포(漆布)로 체(體)를 만들어 탄환처럼 둥글게 하고, 주위는 10척 8촌



6분으로 하여, 가로 세로 주천도분(周天度分)을 그리고, 적도(赤道)는 중앙을 차지하고, 황도(黃道)는



적도(赤道)의 안팎에서 나고 들되, 각각 24도 약(弱)으로 하고, 두루 중외(中外)의 관성(官星)을



배열하여 하루 한 바퀴를 돌아서 1도(度)를 지내고, 노끈을 이용하여 해를 얽어서 황도(黃道)서 그치게



하되, 매일 도(度)를 행하여 천행(天行)과 함께 합하고, 그 물에 부딪쳐 기계가 운전하는 교묘한 법은



속에 들어서 내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 다섯 가지는 옛 사기에 상세히 나타나 있는 것이다.



경회루의 남쪽에 집 삼영(三楹)은 세워 누기(漏器)를 두고, 이름을 보루각(報漏閣)이라 하고, 동영(東楹)



을 사이에 2층으로 자리를 만들어 삼신(三神)은 위에 있어, 시(時)를 맡은 자는 종을 치고, 경(更)을



맡은 자는 북을 치고, 점(點)을 맡은 자는 징[鉦]을 치며, 12신(神)은 아래에 있어 각각 신패(辰牌)를



들었는데, 인력을 빌리지 않고 때에 따라 저절로 올리게 하며 천추전(千秋殿)의 서쪽에 소각(小閣)을



세워 이름을 흠경각(欽敬閣)이라 하고, 종이를 발라 산을 만들되 높이는 7척쯤 되게 하여 각(각) 속에



두고, 안으로 기륜(機輪)을 설치하여 옥루수(屋漏水)를 이용하여 부딪치게 하고, 오색구름이 해를



에워싸고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며, 옥녀(玉女)가 때를 따라 방울을 흔들고 사신(司辰)과 무사(武士)가



저절로 서로 돌아보게 되고, 4신(神)12신(神)이 돌아가면서 차례로 일어났다 엎디곤 한다. 산의 사면에



빈풍(*빈風)과 사시(四時)의 풍경을 진열한 것은, 민생의 의식에 대한 고난을 생각한 까닭이요, 비스듬한



그릇을 두어 누수의 여분(여분)을 받게 한 것은 천도(天道)가 차고 비는 이치를 관찰하자는 까닭이요,



간의(簡儀)가 비록 혼의보다 간편하나 전용(專用)하기 어려워서 소간의(小簡儀) 두 대를 만들었으니,



의(儀)가 비록 극히 간단하나 쓰기는 간의와 다름이 없다. 그래서 하나는 천추전 저쪽에 두고, 하나는



서운관(書雲觀)에 주었으며, 우매한 백성들이 시각에 어둡기 때문에 앙부(仰釜) 일구(日晷) 두 대를



만들고 그 안에다 시신(時神)을 그렸으니, 대개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굽어보면 때를 알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는 혜정교(惠政橋) 가에 두고, 하나는 종묘 남쪽거리에 두었으니 낮에 대한 측후는



기구가 이미 갖추어졌거니와 밤에 대한 것은 고험할 길이 없으므로, 밤낮으로 때를 알 수 있는 기구를



만들어 이름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 하고, 네 대를 만들어 하나는 만춘전(萬春殿) 동쪽에 두고,



하나는 서운관(書雲觀)에 두고, 둘은 나누어서 동·서 두 경계의 원수영(元帥營)에 두고, 일성정시의



(日星定時儀)는 무거워서 군용(軍用)에 불편하므로 소정시의(小定時儀)를 만들었는데, 그 제도는 대략



같고 조금 다를 뿐이다. 이 여섯건에 대하여는 각각 서(序)와 명(銘)이 있어 설명이 다 되었으며, 또



현주일구방(懸柱日晷方)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6치 3푼이며, 북쪽에 기둥을 세우고 부(부)의 남쪽에



못을 파고 십자(十字)를 부의 북쪽에 그려 놓고, 기둥 머리에 추(錘)를 달아서 십자와 서로 맞으면



반드시 물로 기준을 아니하여도 자연히 평평하고 바르며, 백각(百刻)을 작은 바퀴에 그렸는데, 바퀴의



직경은 3치 2푼이며, 자루가 있어 비스듬이 기둥을 꿰고 바퀴의 중심에 구멍이 있어, 한 가닥의 가는



선(線)을 꿰어 위로 기둥 끝에 매어 아래로 부(趺)의 남쪽에 매고, 선의 그림자가 있는 곳으로 시각을



알며, 구름낀 날에는 때를 알기 어려우므로 행루(行漏)를 만들었는데, 형체도 작고 제도도 간략하니



물을 뿌리는 병과 물을 받는 병이 각각 하나요, 굽은 통[渴烏]으로 쏟으며 물을 바꿔넣는 시기는



자(子)·오(午)·묘(卯)·유(酉)시를 이용하게 되어 있다. 소정시의(小定時儀)·현주(懸柱)·행루(行漏)는



각각 몇 건을 만들어 나눠서 두 경계선에 내주고, 나머지는 서운관(書雲觀)에 있다. 또 마상(馬上)에서도



때를 몰라서는 안되기 때문에 천평일귀(天平日晷)를 만들었는데, 그 제도는 현주일구(懸柱日晷)와 대략



같으며, 오직 못을 남북으로 파고, 기둥을 부심(趺心)에 세우고 노끈으로 기둥머리를 꿰어 들어서 남을



가리키게 한 것만이 다르다. 하늘을 중험하여 때를 알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정남침(定南針)을



사용하지만, 그러나 인위(人爲)적인 것을 면치 못하므로 정남일구(定南日晷)를 만들었으니, 대개



정남침(定南針)을 쓰지 아니하여도 남과 북이 저절로 정해지기 때문이다. 부(趺)의 길이는 1척 2촌



5푼이요, 두 머리의 넓이는 4치, 길이는 2치이요, 허리 넓이는 1치이고 길이는 8치 5푼이며, 중간에



둥근 못이 있어 직경은 2치 6푼이요, 물나가는 골이 있어 두 머리로 통하여 기둥 곁에 고리처럼 두르고,



북주(北柱)는 길이가 1자 1치요, 남주(南柱)는 길이가 5치 9푼이요, 북주의 1치 10푼 아래와 남주의



3치 8푼 아래에 각각 축(軸)이 있어 사유환(四遊環)을 받들 환은 동서로 운전하여 반주천도(半周天度)



를 새기고, 도(度)는 사분(四分)을 하여 북(北)의 16도로부터 1백 67도에 이르기까지는 속이 비어



쌍환의 양식과 같으며, 나머지는 전환(全環)이 되고 안으로 한 획을 중심에 새기고, 밑바닥에는 모난



구멍이 있으며, 횡으로 직거(直距)를 설치하고, 거(距)의 한 복판은 6치 7푼인데, 속을 비게 하여 규형



(窺衡)을 갖게 하고, 형(衡)은 위로 쌍환을 꿰고, 아래로 전환에 임하여 남과 북으로 높고 낮으며,



평평하게 지평환(地平環)을 설치하되, 남주의 머리와 더불어 가지런하게 하여 하지(夏至)의 해가 들고



나는 시각을 준하고, 횡으로 반환(半環)을 지평환(地平環)의 아래 설치하여 안으로 주각(晝刻)을 나누어



모난 구멍에 해당하게 하고, 부(趺)의 북에 십자(十字)를 그려놓고 추(錘)를 북축(北軸)의 끝에 달아서



십자와 더불어 서로 맞게 하니 역시 평평함을 취한 것이요, 규형(窺衡)을 이용하여 매일 태양이 극한



도분(度分)에 가서 뚫고 들어오는 해그림자가 정히 둥근 때가 되면 곧 모난 구멍에 의거하여 반환(半環)



의 각을 굽어보면 자연히 남쪽이 정해져서 때를 알게 된다. 기구가 무릇 열다섯인데 구리로 만든 것이



열이다. 수년을 지나서 완성을 고하니, 실로 무오년 봄이었다. 유사가 시종을 기록하여 장래에 명시할



것을 청하므로 이에 신이 그 설계에 참여했다 하여 신에게 명하여 그 사실을 기록하게 하였다.



신은 그윽히 생각하건대 수시(授時)의 요결은 하늘을 측후하는 데에 있고, 하늘을 측후하는 요결은



의표(儀表)에 있는 것이다. 이러므로 요임금이 희화(羲和)에게 명하여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역상(歷象)하게 하였고, 순임금이 선기옥형(璿璣玉衡)을 살피어 칠정(七政)을 제정하였으니, 진실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근렴하는 것은 늦추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당(漢唐)이래로



역대에 각각 기구가 있었으나 혹은 잘되고 혹 잘못되어 갑자기 세기는 쉽지 않고 오직 원조(元朝)



곽수경(郭守敬)의 제작인 간의(簡儀)·앙의(仰儀)·규표(圭表)등의 기구가 정교한 것이라 이를 만하다.



오직 우리 동방에서는 제작이 드러나지 못하였는데, 하늘이 큰 운수를 열어 주어 문교(文敎)가 바야흐로



홍기하고, 우리 주상전하께서 성신(星辰)의 자품과 흠경(欽敬)하는 마음으로 만기(萬幾)의 겨를에



역산(歷算)이 정하지 못하였음을 느끼고 그를 고정(考定)하게 하시고 측험(測驗)하는 것이 미비함을



염려하여 기구를 제작하게 하시니, 비록 요·순의 생각으로도 어찌 이보다 더 할 수 있으랴. 그 기구를



제작함에 있어서도 하나 둘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에 이르도록 하여 참고에 대비하였고, 그 규모에



있어서도 옛것만을 본뜬 것이 아니라 모두 성심(聖心)으로 제정하여 다 정묘한 경지에 도달하였으니,



비록 원(元)이 곽수경(郭守敬)으로도 그 이상 교(巧)를 베풀 수가 없게 되었다. 아, 이미 수시(授時)의



역서(歷書)를 교정하고, 또 하늘을 관찰하는 기구를 마련하여, 위로 천시(천시)를 받들고 아래로 백성의



일을 부지런하게 하시니, 우리 전하가 물정(物情)을 열어주어 임무를 달성하게 하신 지극한 인(仁)과



농사를 권장하여 근본을 중히 하신 지극한 뜻은 실로 우리 동방에서 처음 있는 성사(盛事)인 동시에



장차 높은 대(臺)와 더불어 무궁토록 아울러 전할 것이다.





*빈=나라이름 빈, 얼룩질 빈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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