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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돈(13) 갑인자를 만드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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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1-09 20:41 조회1,7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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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돈 선조님은 행정가이시며, 과학자이시며, 또한 문필가이셨습니다.

세종때 만든 갑인자는 그 글씨가 예뻐기로도 유명합니다.

이 글씨도 선조님의 글씨입니다. 갑인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갑인자(甲寅字)

1434년(세종 16) 갑인(甲寅)에 만든 동활자(銅活字)

1420년에 만든 경자자(庚子字)의 활자체가 가늘고 빽빽하여 보기가 어려워 좀더 큰 활자가

 필요하게 되어 왕명으로 주조된 활자이다.

 이천(李천) · 김돈(金墩) · 김빈(金빈) · 장영실(蔣英實) · 이세형(李世衡) · 정척(鄭陟) ·

이순지(李純之) 등이 두 달 동안에 20여만의 큰 중자(中字)인 대자(大字)와 소자(小字)를 만든 것이다.

 그 자본(字本)은 경연청(經筵廳)에 소장된 《효순사실 孝順事實》 · 《위선음즐 爲善陰즐》 ·

《논어》 등으로 하고, 부족한 글자는 뒤에 세조가 된 진양대군 유(晉陽大君 )가 써서 보충하였는데,

 활자체가 매우 해정(楷正)하고 부드러운 필서체로서 진(晉)나라의 위부인자체(衛夫人字體)와

비슷하여 일명 ‘위부인자’라 하기도 한다. 이 활자를 만드는 데 관여한 인물들은 당시의 과학자나

또는 정밀한 천문기기를 만들었던 기술자였으므로 활자의 모양이 훨씬 해정하고 바르게 만들어졌다.

 경자자와 비교하면 대자와 소자의 크기가 고르고 활자의 네모가 평정(平正)하며, 조판(組版)도

완전한 조립식으로 고안하여 밀랍을 사용하는 대신 죽목(竹木)으로 빈 틈을 메우는 단계로 개량,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하루의 인출량(印出量)이 경자자의 배인 40여장으로 크게 늘어났다. 현재

전하고 있는 갑인자본을 보면 글자획에 필력(筆力)의 약동이 잘 나타나고 글자 사이가 여유있게

 떨어지고 있으며, 판면이 커서 늠름하다. 또 먹물이 시커멓고 윤이 나서 한결 선명하고 아름답다.

우리나라 활자본의 백미라 일컬을 만하다. 이와같이 우리나라의 활자인쇄술은 세종 때 갑인자에

이르러 고도로 발전하였으며, 이 활자는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여섯번이나 개주(改鑄)되었다.

뒤의 개주와 구별하기 위해 특히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라 일컫고 있다. 이 초주갑인자는 선조초에

재주(再鑄)될 때까지 140여년간에 걸쳐 오래 사용되었기 때문에 전해지고 있는 인본의 종류가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대학연의 大學衍義》, 《분류보주이태백시 分類補註李太白詩》 등의

초인본이다. 초주갑인자는 오래 사용하는 사이에 활자가 닳고 이지러지고 부족한 글자가 생겨 1499년

(연산군 5) 《성종실록》을 찍어낼 때와 1515년(중종 10)에 보주(補鑄)가 이루어졌고, 그밖에도 수시로

 목활자를 만들어 보충하며 선조초까지 사용되었다. 갑인자의 재주에 관하여는 1573년(선조 6) 주조의

계유자설(癸酉字說)과 주조의 경진자설(庚辰字說)이 제기되어 분분하였다. 그러던 중 근래에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서 뒤의 경자자설이 옳음이 밝혀졌다. 선조 때의 고관인 김귀영(金貴榮)의 문집인

《동원집 東園集》에 의하면 1580년에 대내에 소장한 갑인자본 《대학연의》를 자본으로 9개월 걸려

주성하였으며, 그 일은 박순(朴淳) 등이 감독하고 황윤길(黃允吉) 등이 관장하였다. 재주갑인자는

 초주갑인자에 비하면 정교도가 떨어지고 운필에 박력이 적지만, 이후의 다른 개주갑인자보다는

낫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재주갑인자의 인본으로는 《회찬송악악무목왕정충록 會纂宋岳鄂武穆王精忠

錄》 · 《시전대전 詩傳大全》 등을 들 수 있다. 갑인자의 세번째 개주는 1617년(광해군 9)에 임진왜란

으로 중단되었던 종래의 주자제도를 복구하고자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고 주조를 시작하여

 다음해인 1618년 7월에 완성되었다. 그해의 간지를 따서 무오자(戊午字) 또는 광해군동자(光海君銅

字)라 한다. 갑인자를 개주한 것 중에서는 가장 박력이 없으나, 갑인자의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활자의 특징은 1623년(인조 1) 6월에 사간 정온(鄭蘊)에게 내사(內賜)한 기록이 적힌 유시부

(柳時溥) 소장 《서전대전 書傳大全》이 발견됨으로써 밝혀진 것이다. 이 활자로 찍어낸 책은 그밖에

《시전대전 詩傳大全》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임진왜란 후의 어려운 사정 속에 이루어진

개주였기 때문에 그 규모가 작았고, 또 광해군 말기의 실정으로 책의 인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624년 이괄의 난으로 흩어져 없어진 데 기인할지도 모른다. 갑인자의 네번째 개주는

호조판서와 병조판서의 자리에 있으면서 수어사(守禦使)를 겸직한 바 있던 김좌명(金佐明)이

1668년(현종 9)에 호조와 병조의 물자 및 인력을 사용하여 수어청에서 대자 6만6100여개와 소자

4만6000여개의 동활자를 주조한 것으로, 이 활자들은 그가 죽은 뒤 교서관(校書館)으로 옮겨졌다.

 이것을 그해의 간지를 붙여 무신자(戊申字) 또는 무신갑인자라 한다. 이 활자도 개주갑인자로서는

정교롭지 못하나 무오자보다는 박력이 있으며, 영조 말기까지 백여년 동안 사용되어 그 인본의

종수가 매우 많다. 이와같이, 오래 사용되었기 때문에 초기에 찍은 책은 인쇄가 깨끗하지만, 뒤에

찍은 것은 활자가 닳고 이지러지고 목활자가 많이 섞여 인쇄가 정교하지 않은 편이다. 사주갑인자본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잠곡선생연보 潛谷先生年譜》와 《잠곡선생유고 潛谷先生遺稿》를 들 수 있다.

갑인자의 다섯번째 개주는 정조가 동궁으로 있던 1772년(영조 48)에 갑인자본 《심경 心經》과

《만병회춘 萬病回春》을 자본으로 하여 주조한 것으로 임진자(壬辰字)라 하며 교서관에 두고

사용하였다. 정조의 관찬서를 해제하여 연대순으로 엮어놓은 《군서표기 群書標記》에서 수록된

그 인본을 보면, 1772년에 《역학계몽집전 易學啓蒙集箋》, 1773년에 《신정자치통감강목속편 新定資

治通鑑綱目續編》, 1775년에 《경서정문 經書正文》, 1777년에 《원속명의록 原續明義錄》,

 1799년에 《아송 雅誦》 등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고려대학교 박물관에는 임진자 조판의

실물이 있다. 마지막으로 나온 갑인자계 동활자는 1777년에 평안감사 서명응(徐命膺)에게 명하여

15만자를 더 주성케 하였으며 정유자(丁酉字)라 일컫는다. 정유자는 가주(加鑄)한 것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교서관에 둔 임진자에 합치지 않고 규장각의 본원에 따로 두고 사용하였다.

그러나 글자체가 서로 같아 인본의 식별이 어려워서 종래는 정유자가 주성된 1777년 이전의 책만을

임진자본으로 보아왔다. 《군서표기》에 의하면, 1781년(정조 5)에 정유자로 찍어낸 《팔자백선 八子

百選》이 초기 인본이며, 그 이후 계속해서 나타난다. 이 활자는 1794년에 이르러 창경궁의 옛

홍문관에 설치한 주자소로 옮겨졌는데, 1857년(철종 8) 8월 주자소에 불이 나서 활자가 모두

소실되었다. 그때 화재로 소실된 다른 활자는 다음해에 다시 주성되었지만 정유자만은 주조되지

 않았다. 그것은 교서관에 둔 임진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정유자는 1857년까지 인쇄에 사용되고, 그 이후는 임진자가 조선 말기까지 사용되다가 다른 활

자와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어 그 잔존 활자가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서지가들이 지금도 눈에 불을 켜고 갑인자로 찍은 서책을 찾는답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윤식 종친님! 갑인자 서책 찾는 서지가 이야기 좀 더 해주세요
▣ 김윤만 - <갑인자>가 곧 <위부인자>군요. 그동안 헷갈렸는데 감사합니다.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감사합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발용 - 감사합니다. 대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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