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돈(15) 이숙번이 공(김돈)께 순금띠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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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1-11 20:20 조회1,690회 댓글0건본문
태종때의 공신 이숙번이 김돈 선조님께 순금을 주고 구명을 부탁했다는 이야기가
흘러 다녀서 그 원류를 확인하여 보았습니다.
내용의 근원은 연려실기술에 있는 내용으로 용재총화와 소문쇄록에 있은 글을 인용된 것입니다.
그 글을 옮겨 보겠습니다.
고전국역총서 > 연려실기술 > 연려실기술 제2권 > 태종조 고사본말 太宗朝故事本末
태종조의 명신(名臣)
이숙번(李叔蕃)
이숙번은, 본관은 안성(安城)이다. 태조 계유(태조 2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좌명공신으로
안성군(安城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우찬성에 이르렀다. 대간의 탄핵으로 함양(咸陽)으로
귀양갔는데, 그곳에서 죽었다.
○ 공(이숙번)은 큰 공을 세운 뒤로 공을 믿고 교만하여 계급이 같은 재상을 하인만도 못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임금이 불러도 병이 있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심부름 온 내시가 늘 이어서 끊이지
않았는데, 안방에서는 풍악소리가 떠들썩하였다. 혹 누구에게 벼슬을 시키고 싶으면 작은 종이에
성명을 써서 사람을 보내어 아뢰었기 때문에 친한 친구가 좋은 벼슬자리에 늘어섰었다.
돈의문(敦義門) 안에 크고 훌륭한 집을 짓고 지나가는 사람과 말소리를 듣기 싫다고 위에 아뢰어서
돈의문을 막고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것을 금하였으며, 사치와 참람함이 날로 심하다가 죄를 얻어
곤장을 맞고 함양 별장으로 귀양갔다.
세종 때에 순금 띠를 도승지 김돈(金墩)에게 주고 서울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김돈은
그 띠를 받고는 싶었으나 그의 청을 아뢰기가 어려워서 조회에 들어갈 때마다 손으로 그 띠를 만졌다.
그때 세종이 용비어천가를 지으라고 유신(儒臣)들에게 명하면서 선조(先朝) 때의 일을 자세하게 아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김돈이 곧 공을 천거하여 대답하였다.
드디어 역말을 달려서 불러 공이 백의(白衣 관직이 없음을 말함)로 대궐에 들어왔는데, 재상들이
모두 후배로서 다투어 절하고 뵈니, 공은 다만 손을 저어 그치게 하고 말하기를, "누구는 소시에
영특하였고, 모모는 신실하였으므로, 내가 장차 영장(令長)이 될 그릇이라고 생각하였더니
과연 그렇구나." 하고, 그 거만함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용재총화》ㆍ《소문쇄록》
○ 공(이숙번)이 서울에 돌아오니, 문하에 있던 사람들이 다 와서 뵈었다. 이징옥(李澄玉)과 조
비형(曹備衡)은 이미 재상을 지냈고 한 사람은 정승인데, 공이 의자를 남향으로 설치하여 앉고,
남은 사람은 모두 남쪽에 평좌(平坐)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문하에 있던 사람이다." 하였다.
사위 김모가 보고 놀라 말하기를, "엣 이럴 수가 있습니까, 반드시 패가(敗家)하고 말 것입니다.
정승은 임금도 예우하는 터인데 감히 이렇게 하십니까." 하였더니, 그제서야 그들과 마주
평좌하였으니, 귀양살이를 겪고 나서도 오만하기가 오히려 이러하였다.
용비어천가 짓기를 마치고 귀양갔던 곳으로 도로 보내도록 하였는데, 김돈이 아뢰기를,
"이미 불러 올렸으니 특별히 그대로 두는 것이 마땅할 듯 합니다." 하니, 세종이 이르기를,
"숙번은 선조(先朝) 때에 죄를 얻은 사람이라 내 마음대로 불러서 쓸 수가 없다." 하고, 곧 귀양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여, 김돈은 끝내 그 금띠를 감히 받지 못하고 돌려보냈다. 공이 비록
귀양살이를 하였으나 먹고 입고 지내는 것을 사치스럽게 하여 그 첩이, "좀 절약하지 않으면 이 뒤를
잇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더니, 공이 노하여 목을 베라고 하였다. 호기스럽고 사나움이
이와 같았다. 《소문쇄록》
○ 공(이숙번)은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 윤자당(尹子當)과 어미는 같고 아비는 다른 형제이다.
자당의 어머니 남씨가 젊었을 적에 과부가 되어 함양에 있었는데, 자당이 일곱 살 때에 어미를 따라
무당 집에 가서 운수를 물었다. 무당이 말하기를, "부인은 걱정하지 마시오. 이 아기는 귀히 될 상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아우의 힘으로 귀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남씨가 말하기를, "과부의 자식이 어찌
아우가 있을 것이오." 하였더니, 뒤에 남씨가 이씨 집에 가서 아들을 낳은 것이 공이었으며,
자당도 또한 공의 힘으로 공신을 봉하는데 참여하게 되었다. 《용재총화》
▣ 김주회 -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그런 일이 있었군요. 태종때 이숙번이와 세조때 홍윤성은 성격이 비슷한데가 있었나 봅니다.
▣ 김항용 - 귀양지에서 죽은 줄만 알았지 용비어천가를 지을 때 이숙번이 김돈 할아버지와 그런 교류가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이숙번의 오만함이 끝내 화만을 불렀습니다.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흘러 다녀서 그 원류를 확인하여 보았습니다.
내용의 근원은 연려실기술에 있는 내용으로 용재총화와 소문쇄록에 있은 글을 인용된 것입니다.
그 글을 옮겨 보겠습니다.
고전국역총서 > 연려실기술 > 연려실기술 제2권 > 태종조 고사본말 太宗朝故事本末
태종조의 명신(名臣)
이숙번(李叔蕃)
이숙번은, 본관은 안성(安城)이다. 태조 계유(태조 2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좌명공신으로
안성군(安城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우찬성에 이르렀다. 대간의 탄핵으로 함양(咸陽)으로
귀양갔는데, 그곳에서 죽었다.
○ 공(이숙번)은 큰 공을 세운 뒤로 공을 믿고 교만하여 계급이 같은 재상을 하인만도 못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임금이 불러도 병이 있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심부름 온 내시가 늘 이어서 끊이지
않았는데, 안방에서는 풍악소리가 떠들썩하였다. 혹 누구에게 벼슬을 시키고 싶으면 작은 종이에
성명을 써서 사람을 보내어 아뢰었기 때문에 친한 친구가 좋은 벼슬자리에 늘어섰었다.
돈의문(敦義門) 안에 크고 훌륭한 집을 짓고 지나가는 사람과 말소리를 듣기 싫다고 위에 아뢰어서
돈의문을 막고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것을 금하였으며, 사치와 참람함이 날로 심하다가 죄를 얻어
곤장을 맞고 함양 별장으로 귀양갔다.
세종 때에 순금 띠를 도승지 김돈(金墩)에게 주고 서울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김돈은
그 띠를 받고는 싶었으나 그의 청을 아뢰기가 어려워서 조회에 들어갈 때마다 손으로 그 띠를 만졌다.
그때 세종이 용비어천가를 지으라고 유신(儒臣)들에게 명하면서 선조(先朝) 때의 일을 자세하게 아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김돈이 곧 공을 천거하여 대답하였다.
드디어 역말을 달려서 불러 공이 백의(白衣 관직이 없음을 말함)로 대궐에 들어왔는데, 재상들이
모두 후배로서 다투어 절하고 뵈니, 공은 다만 손을 저어 그치게 하고 말하기를, "누구는 소시에
영특하였고, 모모는 신실하였으므로, 내가 장차 영장(令長)이 될 그릇이라고 생각하였더니
과연 그렇구나." 하고, 그 거만함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용재총화》ㆍ《소문쇄록》
○ 공(이숙번)이 서울에 돌아오니, 문하에 있던 사람들이 다 와서 뵈었다. 이징옥(李澄玉)과 조
비형(曹備衡)은 이미 재상을 지냈고 한 사람은 정승인데, 공이 의자를 남향으로 설치하여 앉고,
남은 사람은 모두 남쪽에 평좌(平坐)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문하에 있던 사람이다." 하였다.
사위 김모가 보고 놀라 말하기를, "엣 이럴 수가 있습니까, 반드시 패가(敗家)하고 말 것입니다.
정승은 임금도 예우하는 터인데 감히 이렇게 하십니까." 하였더니, 그제서야 그들과 마주
평좌하였으니, 귀양살이를 겪고 나서도 오만하기가 오히려 이러하였다.
용비어천가 짓기를 마치고 귀양갔던 곳으로 도로 보내도록 하였는데, 김돈이 아뢰기를,
"이미 불러 올렸으니 특별히 그대로 두는 것이 마땅할 듯 합니다." 하니, 세종이 이르기를,
"숙번은 선조(先朝) 때에 죄를 얻은 사람이라 내 마음대로 불러서 쓸 수가 없다." 하고, 곧 귀양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여, 김돈은 끝내 그 금띠를 감히 받지 못하고 돌려보냈다. 공이 비록
귀양살이를 하였으나 먹고 입고 지내는 것을 사치스럽게 하여 그 첩이, "좀 절약하지 않으면 이 뒤를
잇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더니, 공이 노하여 목을 베라고 하였다. 호기스럽고 사나움이
이와 같았다. 《소문쇄록》
○ 공(이숙번)은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 윤자당(尹子當)과 어미는 같고 아비는 다른 형제이다.
자당의 어머니 남씨가 젊었을 적에 과부가 되어 함양에 있었는데, 자당이 일곱 살 때에 어미를 따라
무당 집에 가서 운수를 물었다. 무당이 말하기를, "부인은 걱정하지 마시오. 이 아기는 귀히 될 상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아우의 힘으로 귀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남씨가 말하기를, "과부의 자식이 어찌
아우가 있을 것이오." 하였더니, 뒤에 남씨가 이씨 집에 가서 아들을 낳은 것이 공이었으며,
자당도 또한 공의 힘으로 공신을 봉하는데 참여하게 되었다. 《용재총화》
▣ 김주회 -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그런 일이 있었군요. 태종때 이숙번이와 세조때 홍윤성은 성격이 비슷한데가 있었나 봅니다.
▣ 김항용 - 귀양지에서 죽은 줄만 알았지 용비어천가를 지을 때 이숙번이 김돈 할아버지와 그런 교류가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이숙번의 오만함이 끝내 화만을 불렀습니다.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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