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점할아버지 이야기(8)<현실외교가 그리고 북벌의 허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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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3-01-12 07:05 조회1,624회 댓글0건본문
자점할아버지 이야기(8)
【인조와 자점할아버지는 현실에 바탕을 둔 對淸(대청) 실리 외교 자세를 지향한 반면 효종과 산인들은
명나라에 대한 명분과 의리론을 내세우며 북벌을 계획하게 되고 끝내 자점할아버지를 제거하기 위하여
역모사건으로 몰고 갔습니다.】
--즉 인조는 대청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끌어갈 수 있는 김자점을 영의정에 기용하여 정국을 이끌어 간
반면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은 반청 성향이 강한 인물로써 효종의 이러한 의도를 간파한
좌의정 이경석은 김상헌과 함께 김집 · 송준길 · 송시열 · 권시 · 이유태 등을 불러들이자고 건의 하였다.
(승정원일기 효종 즉위년 5월14일) 대청외교를 주재하였던 김자점의 입지를 위축시킴으로써 왕의 통치력
을 강화하려는 효종은 이경석의 건의를 수용하였고, 효종의 반청 성향은 의리론을 강조해 오던 산림의
정치적 입지를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주1)
--또한 인조는 건강 악화로 정무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자 공신의 일원인 영의정 김자점과 병조판서
이시백(주2)을 누구보다 신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자에게 강조하면서 앞으로 정국 운영에 이들의 도움
을 받으라고 지시하였다.(인조실록 권50, 인조 27년 3월 을해조)
주(1) : 조선중기 정치권력구조연구 p125/정홍준/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주(2) : 이시백은 인조반정 이등공신으로 인조반정 일등공신 이귀의 아들이며, 자점할아버지 맏며느리의
- - - -(김련의 처) 친정 아버지이다.
【자점할아버지를 역모로 몰고간 효종과 산인들의 대의명분인 북벌은 역사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헛된 꿈
에 지나지 않았다.】
--효종의 북벌계획에 명분과 책략을 제공한 인물이 바로 효종의 스승이었던 우암 송시열이었다. 송시열
은 조선조 최대의 정치가이자 당쟁가이다. 학문적으로는 율곡 이이와 沙溪(사계) 金長生(김장생)의 학통
을 이어받은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송시열은 이조판서의 직위에 있었으나 사실상 온 나라 정사가 그의
뜻대로 움직였다. 효종은 송시열에게 전권을 주었고, 그는 효종의 이런 신임을 바탕으로 정력적으로 북벌
을 추진했다. 실제로 조선조 전체를 통틀어 봐도 효종과 송시열만큼 가까웠던 군신 관계는 찾기 어렵다.
두 사람의 관계는 세조와 한명회 사이를 뛰어 넘는 것이었다. 세조와 한명회는 정권 획득이라는 당면한
정치적 목표가 같았을 뿐이지만, 효종과 송시열은 이를 넘어 반청과 북벌이라는 정치 사상과 철학까지도
같은 그야말로 동지였던 것이다.
--효종과 송시열은 모든 국력을 군비 확충에 쏟았다. 심지어 네델란드인 하멜 등이 표류하여 오자 그들
의 과학 지식을 이용하기 위해 이들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조총, 화포 등 신무기를 개발하게 했을 정도
였다. 그러나 효종과 송시열의 북벌을 위한 이런 군비 확충은 결과적으로 국왕과 서인들의 정권유지를
위한 무력인 친위군과 수도 경비를 위한 군사력을 강화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효종과 송시열이 확충한
군사력은 왕권 안정과 사대부 양반 지주체제를 유지하는데만 효과를 발휘했던 것이다.
--효종의 북벌계획은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 정세상 실현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즉 효종이 즉위한 1650년
이후 청군은 1662년 청에 투항한 명장 출신 오삼계가 버마까지 진격해 영명왕을 살해함으로써 명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킬 정도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청나라에 맞서 북벌을 단행하여 망한 명나라를
다시 세워줄 힘이 있으면 조선이나 다시 세우는데 써야 했다.
--두 번의 전란을 겪은 조선은 황폐해 졌으며백성들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효종과 송시열이 할 일은
북벌이란 꿈속에서 군비를 확충하는 것과 함께 도탄에 빠진 농촌 경제를 재건하는 일이어야 했다.
송시열이 양반 관료의 이해를 대변해 대동법 실시를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북벌은 처음부
터 잘못된 꿈이었다. 비록 나중에는 대동법에 찬성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대부를 중심에 두는 그의
사상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더구나 양반들은 군역의 의무를 지지 않는 나라의 군대를 가지고 북벌
을 단행할 수는 없었다. 사대부를 위해 농민들이 왜 자신들의 피를 바치겠는가?
--북벌은 효종과 송시열의 헛된 꿈이었던 셈이다.
<출전 :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석필/이덕일/1997>
▣ 김윤식 - !!!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 김영윤 - 충분히 수긍이 가는 사실입니다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 김발용 - 잘 읽었습니다. 이제는 자점선조님을 보는 눈이 많이 바뀌였습니다.
▣ 김주회 - 잘 읽었습니다.
▣ 솔내 - 이렇게 노력하시는 분 때문에 우리 안김의 미래는 찬란할 것입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인조와 자점할아버지는 현실에 바탕을 둔 對淸(대청) 실리 외교 자세를 지향한 반면 효종과 산인들은
명나라에 대한 명분과 의리론을 내세우며 북벌을 계획하게 되고 끝내 자점할아버지를 제거하기 위하여
역모사건으로 몰고 갔습니다.】
--즉 인조는 대청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끌어갈 수 있는 김자점을 영의정에 기용하여 정국을 이끌어 간
반면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은 반청 성향이 강한 인물로써 효종의 이러한 의도를 간파한
좌의정 이경석은 김상헌과 함께 김집 · 송준길 · 송시열 · 권시 · 이유태 등을 불러들이자고 건의 하였다.
(승정원일기 효종 즉위년 5월14일) 대청외교를 주재하였던 김자점의 입지를 위축시킴으로써 왕의 통치력
을 강화하려는 효종은 이경석의 건의를 수용하였고, 효종의 반청 성향은 의리론을 강조해 오던 산림의
정치적 입지를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주1)
--또한 인조는 건강 악화로 정무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자 공신의 일원인 영의정 김자점과 병조판서
이시백(주2)을 누구보다 신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자에게 강조하면서 앞으로 정국 운영에 이들의 도움
을 받으라고 지시하였다.(인조실록 권50, 인조 27년 3월 을해조)
주(1) : 조선중기 정치권력구조연구 p125/정홍준/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주(2) : 이시백은 인조반정 이등공신으로 인조반정 일등공신 이귀의 아들이며, 자점할아버지 맏며느리의
- - - -(김련의 처) 친정 아버지이다.
【자점할아버지를 역모로 몰고간 효종과 산인들의 대의명분인 북벌은 역사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헛된 꿈
에 지나지 않았다.】
--효종의 북벌계획에 명분과 책략을 제공한 인물이 바로 효종의 스승이었던 우암 송시열이었다. 송시열
은 조선조 최대의 정치가이자 당쟁가이다. 학문적으로는 율곡 이이와 沙溪(사계) 金長生(김장생)의 학통
을 이어받은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송시열은 이조판서의 직위에 있었으나 사실상 온 나라 정사가 그의
뜻대로 움직였다. 효종은 송시열에게 전권을 주었고, 그는 효종의 이런 신임을 바탕으로 정력적으로 북벌
을 추진했다. 실제로 조선조 전체를 통틀어 봐도 효종과 송시열만큼 가까웠던 군신 관계는 찾기 어렵다.
두 사람의 관계는 세조와 한명회 사이를 뛰어 넘는 것이었다. 세조와 한명회는 정권 획득이라는 당면한
정치적 목표가 같았을 뿐이지만, 효종과 송시열은 이를 넘어 반청과 북벌이라는 정치 사상과 철학까지도
같은 그야말로 동지였던 것이다.
--효종과 송시열은 모든 국력을 군비 확충에 쏟았다. 심지어 네델란드인 하멜 등이 표류하여 오자 그들
의 과학 지식을 이용하기 위해 이들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조총, 화포 등 신무기를 개발하게 했을 정도
였다. 그러나 효종과 송시열의 북벌을 위한 이런 군비 확충은 결과적으로 국왕과 서인들의 정권유지를
위한 무력인 친위군과 수도 경비를 위한 군사력을 강화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효종과 송시열이 확충한
군사력은 왕권 안정과 사대부 양반 지주체제를 유지하는데만 효과를 발휘했던 것이다.
--효종의 북벌계획은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 정세상 실현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즉 효종이 즉위한 1650년
이후 청군은 1662년 청에 투항한 명장 출신 오삼계가 버마까지 진격해 영명왕을 살해함으로써 명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킬 정도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청나라에 맞서 북벌을 단행하여 망한 명나라를
다시 세워줄 힘이 있으면 조선이나 다시 세우는데 써야 했다.
--두 번의 전란을 겪은 조선은 황폐해 졌으며백성들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효종과 송시열이 할 일은
북벌이란 꿈속에서 군비를 확충하는 것과 함께 도탄에 빠진 농촌 경제를 재건하는 일이어야 했다.
송시열이 양반 관료의 이해를 대변해 대동법 실시를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북벌은 처음부
터 잘못된 꿈이었다. 비록 나중에는 대동법에 찬성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대부를 중심에 두는 그의
사상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더구나 양반들은 군역의 의무를 지지 않는 나라의 군대를 가지고 북벌
을 단행할 수는 없었다. 사대부를 위해 농민들이 왜 자신들의 피를 바치겠는가?
--북벌은 효종과 송시열의 헛된 꿈이었던 셈이다.
<출전 :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석필/이덕일/1997>
▣ 김윤식 - !!!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 김영윤 - 충분히 수긍이 가는 사실입니다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 김발용 - 잘 읽었습니다. 이제는 자점선조님을 보는 눈이 많이 바뀌였습니다.
▣ 김주회 - 잘 읽었습니다.
▣ 솔내 - 이렇게 노력하시는 분 때문에 우리 안김의 미래는 찬란할 것입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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