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송은 김광수(金光粹) --國朝人物考에서(소개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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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1-09-18 17:20 조회2,067회 댓글0건본문
방대한 자료 소개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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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줄 안렴사공(?) 낭장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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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건강 하시길......
: 松隱 金光粹선조는 도평의공의 후손이십니다.
:
: 계대를 살펴보면
:
: 충렬공(김방경)--판서공(김선)--양간공(김승택)--안렴사공(김면)--도평의공(김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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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자첨(감목공=안동사촌 입향조)--김효온--김극해(지례현감)--송은(김광수)입니다.
:
: 김광수(송은)선조의 더욱 자세한 자료는 김정중씨가 쓴 내고향사촌(게시판번호 121)및
:
: 게시판번호130(사촌입향후 대소 과거 입격자), 141,150(독화신국전희음) 170(경심잠 해설)등
:
: 김정중씨가 쓴 글을 참조하십시요 ..(게시판 아래란에 작성자를 김정중으로 선택하면 정중님의
:
: 모든 글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참 대단하니 꼭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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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조인물고는 조선시대의 유명한 인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인데 그중에 송은 김광수 선조님
:
: 기록이 있어 여기에 적어어봅니다.
:
: 이 글은 공의 외손이신 서애 유성룡선생께서 지으신 공의 묘표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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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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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은 김광수 묘표(松隱 金光粹 墓表)
:
: 공(公)의 휘(諱)는 광수(光粹)요, 자(字)는 국화(國華)이며, 김(金氏)는 본래 신라(新羅)
: 왕실(王室)의 성(姓)이다. 고려 때 휘 방경(方慶)이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이 되어
: 큰 공훈(功勳)을 세상에 세웠는데, 공이 바로 그 후손이다. 증조(曾祖)는 함길도 감목관
: (咸吉道監牧官) 김자첨(金子瞻)이요, 조부(祖父)는 사직(司直) 金孝溫이며, 고(考)
: 휘 극해(克諧)는 문과(文科)에 올라 벼슬이 지례현감(知禮縣監)에 이르렀다.
: 공은 천성이 욕심이 없고 맑았으며 풍채가 단정하고 깨끗하며 부귀 영달에 전혀 뜻을
: 두지 않았는데, 일찍이 친구 사이에 시(詩)에 능하다고 알려졌다. 홍치(弘治=明 孝宗의 年號)
: 신유년(申酉년=1501년, 연산군 7년)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_)한뒤로는 과거 공부를
: 포기하고 의성(義城)의 북촌(北村)에 들어가 살면서 더는 벼슬길에 나아가는 데 뜻을 두지
: 않았다. 집 가에 왜송(矮松)이 한그루 있었는데, 푸르고 울창하여 두어 이랑의 그늘을
: 만들었으므로 공이 이를 사랑하였다. 이에 매일같이 술도 마시고 시도 읊으며 그 아래에서
: 한가히 지내며 스스로 송은처사(松隱處士)라 불렀다. 집안이 가난하여 의식(衣食)을 잇대기
: 어려웠으나 공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종일토록 조금도 불평 없이 만족하게 지냈는데,
: 당시 이웃 마을에 사는 현우(賢愚)와 소장(少長)을 막론하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즐겨 나아가
: 본을 뜨려 하였다. 공의 효성과 우애는 타고 나서 지례공(知禮公)이 일찍이 돌아가자 수십 년
: 어머니를 모시면서 안색을 살피고 뜻을 받드는 일을 모두 다 하였으며, 한 아우가 안동(安東)에
: 살면서 오기로 약조한 날이면 매번 문에 기대어 기다리며 날이 저물도록 먹지 않다가 반드시
: 더불어 같이 밥을 먹곤 하였다. 평생 입으로 재산을 경영하는 데 대한 말은 하지 않았고,
: 오직 옛사람의 아름다운 말과 선행(善行)을 노래로써 읊고 칭송하여 마지 않았다.
: 그러므로 비복(婢僕)들도 익히 듣고 능히 전하기까지 하였다. 아! 공은 독행군자(篤行君子)라
: 할만하다. 비록 옛날의 곤궁(困窮)하면서도 고상(高尙)한 뜻을 기른 선비라 하더라도 어찌
: 이보다 더하겠는가?
: 공의 선취(先取) 남씨(南氏)는 아들 김당(金당)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은 김순(金珣)에게
: 출가하였다. 후취(後娶) 순천장씨(順天長氏)는 밀직부사(密直副使) 장홍(長弘)의
: 후예(後裔)로서 첨정(僉正) 장일신(長日新)의 딸이다. 딸 다섯을 낳으니 맏이는
: 신택(申澤)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김처선(金處善)에게 출가하였는데 충순위(忠順衛)요,
: 다음은 김온(金溫)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유중영(柳仲영)에게 출가하였는데
: 관찰사(觀察使)요, 다음은 이영(李영)에게 출가하였는데 훈도(訓導)이다. 김당은 딸 하나를
: 낳으니 권덕린(權德麟)에게 시집갔고, 아들은 김세우(金世佑)이다. 김순은 두 아들을 낳으니
: 김생하(金生河), 김생명(金生溟)이요, 사위는 강여개(姜汝皆)이다. 신택은 두 아들을 낳으니,
: 신대년(申大年),신대유(申大有)요,세 사위는 김목(金牧),문희정(文希禎),조희조(趙希祖)이다.
: 충순위는 세 아들을 낳으니 김응하(金應夏), 김응상(金應商), 김응주(金應周)이요, 김온은
: 한 아들을 낳으니 김명견(金命堅)이다. 관찰사는 두 아들을 낳으니 류운용(柳雲龍),
: 류성룡(柳成龍)인데 관찰사이며 세사위는 이윤수(李潤遂), 김종무(金宗武), 정호인(鄭好人)이다.
: 훈도는 딸 하나를 낳으니 사위는 김탄(金坦)이다. 내외손(內外孫)은 남녀 백여 인이다.
: 장부인(張夫人)은 어질고 식견과 사려가 있어 공과 더물어 곤궁하게 살면서 거친 음식은
: 먹었지만 역시 스스로 즐거워하며 고된 생활을 싫어하는 뜻이 없었다.
:
: 공은 성화(成化;明 憲宗의 年號) 무자년(戊子년;1468년,世祖14년)에 태어나
: 가정(嘉正;明 世宗의 年號) 계해년(癸亥年;1563년,明宗18年)에 돌아가니
: 향년(享年)96세이었다. 임종(臨終)에 목욕하고 궤( )에 기대어 손가락을
: 꼽으며 말하기를 "족(足)하다" 하고는 조금 뒤 홀연히 서거(逝去)하였는데,
: 피부는 살았을 때와 같았다. 장 부인은 공보다 몇해 앞서 가정(嘉正)
: 기미년(己未년;1559,明宗14년)에 졸(卒)하니, 88세였다. 대곡산(大谷山)
: 건좌 손향(乾座巽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공이 서거한 뒤 그 산기슭에
: 나아가 같은 묘역(墓域)에 봉분(封墳)을 달리한 제도(制度)로 만들었다.
: 그 22년 후에 외손(外孫)류성룡(柳成龍)이 조정의 명을 받들고 관찰사로서
: 남쪽으로 내려와 공의 묘(墓)에 나아가 제(祭)를 올렸는데 그 묘도(墓道)에
: 비(碑)가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리었고 데상에 알려지지 않은 덕(덕)과 빛[光]이
: 따라서 후세(後世)에 전하지 않고 민멸될까 크게 두려워하여,드디어 짧은 빗돌을
: 그 앞에 세우고 대략 이상과 같이 그 후면(後面)에 서술(敍述)하니, 아마도 백세(百歲)
: 뒤에도 이로 인하여 공의 대개(大개)를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다.
: 柳成龍 지음
: (國朝人物考에서 인용)
:
: *편집자 해설
:
: 류성용은 송은 김광수의 외손자이다.
:
: 유성룡(柳成龍)
: 1542(중종 37)∼1607(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 의성출생.
: 공작(公綽)의 손자로, 황해도관찰사 중영(仲#영45)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 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하였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 1. 관직
: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가 되고, 다음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 1568년(선조 1) 대교, 다음해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부수찬·지제교로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 그뒤 정언·병조좌랑·이조좌랑·부교리·이조정랑·교리·전한·장령·부응교·검상·사인·응교 등을 역임한 뒤, 1578년 사간이 되었다.
: 이듬해 직제학·동부승지·지제교로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을 겸하고,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1580년에는 부제학에 올랐다.
: 1582년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하여 왕명을 받고 〈황화집서 皇華集序〉를 찬진(撰進)하였다.
: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 備邊五策〉을 지어 올렸으며, 그해 함경도관찰사에 특제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어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 다음해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제학을 겸하였으며, 다음해 왕명으로 〈정충록발 精忠錄跋〉을 지었고, 또 그 다음해에 《포은집 圃隱集》을 교정하였다.
: 1588년 양관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해 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왕명을 받아 〈효경대의발 孝經大義跋〉을 지어 바쳤다.
: 2. 가축옥사때 자핵
: 이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게 되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직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疏)를 올려 자핵(自劾)하였다.
: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이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어 죽게 된 최영경(崔永慶)을 구제하려는 소를 초안하였으나 올리지 못하였다.
: 다음해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여 역시 이조판서를 겸하였으며, 이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동인 중의 온건파인 남인(南人)에 속하여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北人)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 3. 임진왜란 대비
: 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형조정랑 권율(權慄)과 정읍현감 이순신(李舜臣)을 각각 의주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하였으며,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을 이일(李鎰)로 교체할 것을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하였다.
: 1592년 3월에 일본사신이 우리 경내에 이르자, 선위사(宣慰使)를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아 일본사신은 그대로 돌아갔다.
: 그해 4월에 판윤 신립(申砬)과 군사(軍事)에 관하여 논의하며 일본의 침입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였다.
: 4. 임란시의 군무총괄
: 4월 14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뒤 충청·경상·전라 삼도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 이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으며,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하여 서로(西路)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권율과 이빈(李$빈01)으로 하여금 파주산성을 지키게 하고 제장(諸將)에게 방략을 주어 요해(要害)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 그해 4월 이여송이 일본과 화의하려 하자 그에게 글을 보내 화의를 논한다는 것은 나쁜 계획임을 역설하였다.
: 또 군대양성과 함께 절강기계(浙江器械)를 본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의 수축을 건의하여 군비확충에 노력하였으며,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
: 10월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변응성(邊應星)을 경기좌방어사로 삼아 용진(龍津)에 주둔하게 함으로써 반적(叛賊)들의 내통을 차단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며,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 紀效新書》를 강해(講解)하였다.
: 또, 호서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할 것과 조령(鳥嶺)에 관둔전(官屯田)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등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보완을 위하여 계속 노력하였다.
: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하여졌다.
: 5. 학문과 저술
:
: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이리뒷산에 있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 저서로는 《서애집 西厓集》·《징비록 懲毖錄》·《신종록 愼終錄》·《영모록 永慕錄》·《관화록 觀化錄》·《운암잡기 雲巖雜記》·《난후잡록 亂後雜錄》·《상례고증 喪禮考證》·《무오당보 戊午黨譜》·《침경요의 鍼經要義》 등이 있고, 편저로는 《대학연의초 大學衍義抄》·《황화집 皇華集》·《구경연의 九經衍義》·《문산집 文山集》·《정충록》·《포은집》·《퇴계집》·《효경대의 孝經大義》·《퇴계선생연보》 등이 있다.
: 그런데 그의 저서에 대하여 문인 정경세(鄭經世)가 〈서애행장 西厓行狀〉에서 “평생 지은 시문이 임진병화 때 없어졌으며, 이제 문집 10권과 《신종록》·《영모록》·《징비록》 등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대부분이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 《징비록》과 《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참고문헌
: 明宗實錄,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淸選考, 增補文獻備考, 西厓年譜草本, 柳成龍(李載浩, 韓國人物大系 3, 博友社, 1972)
: 西厓柳成龍의 社會經濟觀(李樹健, 西厓硏究 2, 西厓柳成龍先生紀念事業會, 1979)
: 壬辰倭亂과 柳西厓의 自主國防策(李載浩, 歷史敎育論集 11, 1987). 〈李章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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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룡자료=(디지털한국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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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줄 안렴사공(?) 낭장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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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건강 하시길......
: 松隱 金光粹선조는 도평의공의 후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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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대를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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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공(김방경)--판서공(김선)--양간공(김승택)--안렴사공(김면)--도평의공(김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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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자첨(감목공=안동사촌 입향조)--김효온--김극해(지례현감)--송은(김광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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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수(송은)선조의 더욱 자세한 자료는 김정중씨가 쓴 내고향사촌(게시판번호 121)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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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판번호130(사촌입향후 대소 과거 입격자), 141,150(독화신국전희음) 170(경심잠 해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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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중씨가 쓴 글을 참조하십시요 ..(게시판 아래란에 작성자를 김정중으로 선택하면 정중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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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글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참 대단하니 꼭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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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조인물고는 조선시대의 유명한 인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인데 그중에 송은 김광수 선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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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이 있어 여기에 적어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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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공의 외손이신 서애 유성룡선생께서 지으신 공의 묘표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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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은 김광수 묘표(松隱 金光粹 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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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公)의 휘(諱)는 광수(光粹)요, 자(字)는 국화(國華)이며, 김(金氏)는 본래 신라(新羅)
: 왕실(王室)의 성(姓)이다. 고려 때 휘 방경(方慶)이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이 되어
: 큰 공훈(功勳)을 세상에 세웠는데, 공이 바로 그 후손이다. 증조(曾祖)는 함길도 감목관
: (咸吉道監牧官) 김자첨(金子瞻)이요, 조부(祖父)는 사직(司直) 金孝溫이며, 고(考)
: 휘 극해(克諧)는 문과(文科)에 올라 벼슬이 지례현감(知禮縣監)에 이르렀다.
: 공은 천성이 욕심이 없고 맑았으며 풍채가 단정하고 깨끗하며 부귀 영달에 전혀 뜻을
: 두지 않았는데, 일찍이 친구 사이에 시(詩)에 능하다고 알려졌다. 홍치(弘治=明 孝宗의 年號)
: 신유년(申酉년=1501년, 연산군 7년)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_)한뒤로는 과거 공부를
: 포기하고 의성(義城)의 북촌(北村)에 들어가 살면서 더는 벼슬길에 나아가는 데 뜻을 두지
: 않았다. 집 가에 왜송(矮松)이 한그루 있었는데, 푸르고 울창하여 두어 이랑의 그늘을
: 만들었으므로 공이 이를 사랑하였다. 이에 매일같이 술도 마시고 시도 읊으며 그 아래에서
: 한가히 지내며 스스로 송은처사(松隱處士)라 불렀다. 집안이 가난하여 의식(衣食)을 잇대기
: 어려웠으나 공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종일토록 조금도 불평 없이 만족하게 지냈는데,
: 당시 이웃 마을에 사는 현우(賢愚)와 소장(少長)을 막론하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즐겨 나아가
: 본을 뜨려 하였다. 공의 효성과 우애는 타고 나서 지례공(知禮公)이 일찍이 돌아가자 수십 년
: 어머니를 모시면서 안색을 살피고 뜻을 받드는 일을 모두 다 하였으며, 한 아우가 안동(安東)에
: 살면서 오기로 약조한 날이면 매번 문에 기대어 기다리며 날이 저물도록 먹지 않다가 반드시
: 더불어 같이 밥을 먹곤 하였다. 평생 입으로 재산을 경영하는 데 대한 말은 하지 않았고,
: 오직 옛사람의 아름다운 말과 선행(善行)을 노래로써 읊고 칭송하여 마지 않았다.
: 그러므로 비복(婢僕)들도 익히 듣고 능히 전하기까지 하였다. 아! 공은 독행군자(篤行君子)라
: 할만하다. 비록 옛날의 곤궁(困窮)하면서도 고상(高尙)한 뜻을 기른 선비라 하더라도 어찌
: 이보다 더하겠는가?
: 공의 선취(先取) 남씨(南氏)는 아들 김당(金당)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은 김순(金珣)에게
: 출가하였다. 후취(後娶) 순천장씨(順天長氏)는 밀직부사(密直副使) 장홍(長弘)의
: 후예(後裔)로서 첨정(僉正) 장일신(長日新)의 딸이다. 딸 다섯을 낳으니 맏이는
: 신택(申澤)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김처선(金處善)에게 출가하였는데 충순위(忠順衛)요,
: 다음은 김온(金溫)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유중영(柳仲영)에게 출가하였는데
: 관찰사(觀察使)요, 다음은 이영(李영)에게 출가하였는데 훈도(訓導)이다. 김당은 딸 하나를
: 낳으니 권덕린(權德麟)에게 시집갔고, 아들은 김세우(金世佑)이다. 김순은 두 아들을 낳으니
: 김생하(金生河), 김생명(金生溟)이요, 사위는 강여개(姜汝皆)이다. 신택은 두 아들을 낳으니,
: 신대년(申大年),신대유(申大有)요,세 사위는 김목(金牧),문희정(文希禎),조희조(趙希祖)이다.
: 충순위는 세 아들을 낳으니 김응하(金應夏), 김응상(金應商), 김응주(金應周)이요, 김온은
: 한 아들을 낳으니 김명견(金命堅)이다. 관찰사는 두 아들을 낳으니 류운용(柳雲龍),
: 류성룡(柳成龍)인데 관찰사이며 세사위는 이윤수(李潤遂), 김종무(金宗武), 정호인(鄭好人)이다.
: 훈도는 딸 하나를 낳으니 사위는 김탄(金坦)이다. 내외손(內外孫)은 남녀 백여 인이다.
: 장부인(張夫人)은 어질고 식견과 사려가 있어 공과 더물어 곤궁하게 살면서 거친 음식은
: 먹었지만 역시 스스로 즐거워하며 고된 생활을 싫어하는 뜻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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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 성화(成化;明 憲宗의 年號) 무자년(戊子년;1468년,世祖14년)에 태어나
: 가정(嘉正;明 世宗의 年號) 계해년(癸亥年;1563년,明宗18年)에 돌아가니
: 향년(享年)96세이었다. 임종(臨終)에 목욕하고 궤( )에 기대어 손가락을
: 꼽으며 말하기를 "족(足)하다" 하고는 조금 뒤 홀연히 서거(逝去)하였는데,
: 피부는 살았을 때와 같았다. 장 부인은 공보다 몇해 앞서 가정(嘉正)
: 기미년(己未년;1559,明宗14년)에 졸(卒)하니, 88세였다. 대곡산(大谷山)
: 건좌 손향(乾座巽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공이 서거한 뒤 그 산기슭에
: 나아가 같은 묘역(墓域)에 봉분(封墳)을 달리한 제도(制度)로 만들었다.
: 그 22년 후에 외손(外孫)류성룡(柳成龍)이 조정의 명을 받들고 관찰사로서
: 남쪽으로 내려와 공의 묘(墓)에 나아가 제(祭)를 올렸는데 그 묘도(墓道)에
: 비(碑)가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리었고 데상에 알려지지 않은 덕(덕)과 빛[光]이
: 따라서 후세(後世)에 전하지 않고 민멸될까 크게 두려워하여,드디어 짧은 빗돌을
: 그 앞에 세우고 대략 이상과 같이 그 후면(後面)에 서술(敍述)하니, 아마도 백세(百歲)
: 뒤에도 이로 인하여 공의 대개(大개)를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다.
: 柳成龍 지음
: (國朝人物考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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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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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성용은 송은 김광수의 외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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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룡(柳成龍)
: 1542(중종 37)∼1607(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 의성출생.
: 공작(公綽)의 손자로, 황해도관찰사 중영(仲#영45)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 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하였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 1. 관직
: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가 되고, 다음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 1568년(선조 1) 대교, 다음해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부수찬·지제교로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 그뒤 정언·병조좌랑·이조좌랑·부교리·이조정랑·교리·전한·장령·부응교·검상·사인·응교 등을 역임한 뒤, 1578년 사간이 되었다.
: 이듬해 직제학·동부승지·지제교로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을 겸하고,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1580년에는 부제학에 올랐다.
: 1582년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하여 왕명을 받고 〈황화집서 皇華集序〉를 찬진(撰進)하였다.
: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 備邊五策〉을 지어 올렸으며, 그해 함경도관찰사에 특제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어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 다음해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제학을 겸하였으며, 다음해 왕명으로 〈정충록발 精忠錄跋〉을 지었고, 또 그 다음해에 《포은집 圃隱集》을 교정하였다.
: 1588년 양관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해 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왕명을 받아 〈효경대의발 孝經大義跋〉을 지어 바쳤다.
: 2. 가축옥사때 자핵
: 이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게 되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직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疏)를 올려 자핵(自劾)하였다.
: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이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어 죽게 된 최영경(崔永慶)을 구제하려는 소를 초안하였으나 올리지 못하였다.
: 다음해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여 역시 이조판서를 겸하였으며, 이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동인 중의 온건파인 남인(南人)에 속하여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北人)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 3. 임진왜란 대비
: 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형조정랑 권율(權慄)과 정읍현감 이순신(李舜臣)을 각각 의주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하였으며,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을 이일(李鎰)로 교체할 것을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하였다.
: 1592년 3월에 일본사신이 우리 경내에 이르자, 선위사(宣慰使)를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아 일본사신은 그대로 돌아갔다.
: 그해 4월에 판윤 신립(申砬)과 군사(軍事)에 관하여 논의하며 일본의 침입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였다.
: 4. 임란시의 군무총괄
: 4월 14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뒤 충청·경상·전라 삼도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 이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으며,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하여 서로(西路)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권율과 이빈(李$빈01)으로 하여금 파주산성을 지키게 하고 제장(諸將)에게 방략을 주어 요해(要害)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 그해 4월 이여송이 일본과 화의하려 하자 그에게 글을 보내 화의를 논한다는 것은 나쁜 계획임을 역설하였다.
: 또 군대양성과 함께 절강기계(浙江器械)를 본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의 수축을 건의하여 군비확충에 노력하였으며,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
: 10월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변응성(邊應星)을 경기좌방어사로 삼아 용진(龍津)에 주둔하게 함으로써 반적(叛賊)들의 내통을 차단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며,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 紀效新書》를 강해(講解)하였다.
: 또, 호서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할 것과 조령(鳥嶺)에 관둔전(官屯田)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등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보완을 위하여 계속 노력하였다.
: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하여졌다.
: 5. 학문과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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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이리뒷산에 있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 저서로는 《서애집 西厓集》·《징비록 懲毖錄》·《신종록 愼終錄》·《영모록 永慕錄》·《관화록 觀化錄》·《운암잡기 雲巖雜記》·《난후잡록 亂後雜錄》·《상례고증 喪禮考證》·《무오당보 戊午黨譜》·《침경요의 鍼經要義》 등이 있고, 편저로는 《대학연의초 大學衍義抄》·《황화집 皇華集》·《구경연의 九經衍義》·《문산집 文山集》·《정충록》·《포은집》·《퇴계집》·《효경대의 孝經大義》·《퇴계선생연보》 등이 있다.
: 그런데 그의 저서에 대하여 문인 정경세(鄭經世)가 〈서애행장 西厓行狀〉에서 “평생 지은 시문이 임진병화 때 없어졌으며, 이제 문집 10권과 《신종록》·《영모록》·《징비록》 등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대부분이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 《징비록》과 《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참고문헌
: 明宗實錄,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淸選考, 增補文獻備考, 西厓年譜草本, 柳成龍(李載浩, 韓國人物大系 3, 博友社, 1972)
: 西厓柳成龍의 社會經濟觀(李樹健, 西厓硏究 2, 西厓柳成龍先生紀念事業會, 1979)
: 壬辰倭亂과 柳西厓의 自主國防策(李載浩, 歷史敎育論集 11, 1987). 〈李章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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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룡자료=(디지털한국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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