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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82) 신탁통치와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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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1-20 23:28 조회1,5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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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선생님의 일생을 통하여 근세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모스코바 삼상회의와 신탁통치



1945년도 저물어 가는 12월28일의 일이었다. 5년간의 신탁통치와 그 기간에 필요한 임시정부를



미소 주둔군사령관으로 구성된 공동위원회(共同委員會)가 한국의 정당과 협의하여 수립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오자 백범은 곧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반대결의를 하고 각 정당 대표와 종교 언론



관계자를 모아 반탁운동을 새로운 독립운동으로 선포하면서 30일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했는데 이것은 이미 추진하던 특별정치위원회의 대안이기도 했다.



백범이 선봉에 선 전국적인 반탁열기와 반탁정변에 놀란 것은 미군정 당국과 인민공화국을 이끌던



좌파였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장군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전부터 신탁통치가 알려지면서 한국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한 바 있지만 백범의 임시정부가 주권행사를 선언하고 나설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하지는 임정요인을 감금 추방할 대책을 세우기도 했다.



반탁운동에 동참하고 있던 좌파가 놀란 것은 임시정부가 주권행사를 선언하고 나서면 그들의



인민공화국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아니더라도 반탁운동을 통해 백범과 그의 임시정부가



전국민적으로 부상하여 인민공화국이 무척 격하되고 있었다. 그래서 인민공화국 중앙위원회는 1월l일



임시정부에 대해 두 정부를 해체하고 통합할 것을 제의하고 이튿날 10시까지 회담할 것을 요구했다.



그것이 거절당하자 좌파는 북한의 찬탁정국에 맞추어 2일 신탁통치찬성으로 돌변하고 3일 찬탁대회를



열었으며 백범을 공격하고 나섰다. 이에 찬탁반탁정국은 좌우익의 대립구도로 대치되어갔고 그 가운데



백범은 반탁과 우익의 영수로 자리 잡혀져 갔다. 백범 김구의 인품은 소박하면서도 다양성을 포용할



아량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고. 사상은 근거하면서도 자주적 민족주의를 추구했고. 독립운동의



경력으로 보면 시종 임시정부를 지킨 유일한 지도자라는 점이 특징이다. 그래서 대표적 독립운동자로



국민의 존경을 받고있었다. 그러나 인격과 사상과 경륜이 뛰어난 백범이지만. 미소의 대립이



냉전체제로 치달아 남북의 국토분단으로 전이됨에 따라 정국도 좌우구도로 고착되어 가는 것을



약소민족의 지도자로서 극복하기란 용이하지 않았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잘 읽었습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반백 년이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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