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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오은대관下 03 ---고려사(김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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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1-26 00:09 조회1,5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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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제46권 - 세가 제46 > 공양왕 2 > 공양왕 신미 3년(1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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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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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에 전 전라도 도관찰사 ★김사안(金士安)이 죽었다. 조정에서는 3일간의 사업을 정지하였으며 충강(忠康)이란 시호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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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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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일에 이(태조)와 정몽주 및 ★김사형(金士衡)을 인물 추변 도감(人物推辨都監)의 제조관(提調官)으로 임명하였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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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후는 처음에는 복창(福昌) 부원군의 봉호를 받았다가 나중에 상락후(上洛侯)의 봉호를 받았다. 공민왕 10년에 나이 70세로 죽었는데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받았다. 그의 성품은 엄격하고 굳세고 침착하고 신중하였으며 일가 친척과 옛친지들 가운데 군색한 자가 있으면 모두 구제하여 주었다.

그 손자들인 ★김사안(士安), ★김사형(士衡)의 나이 20세를 넘었는데 어떤 사람이 김영후더러 말하기를 “왜 그들을 위하여 관직을 얻어 주지 않는가?”라고 하니 “자제가 과연 현명하다면 국가에서 스스로 선발해서 쓸 것이며 만일 현명하지 못하다면 관직을 주어서 얻게 하더라고 그것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그의 아들 ★김천은 관직이 밀직부사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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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제115권 - 열전 제28 >

신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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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이 죽은 후 명나라 황제는 매양 집정 대신(執政大臣)을 불렀으나 모두 두려워 하여 감히 가지 못하였다. 이색이 재상으로 되자 그는 말하기를 “이제 우리 나라에 죄가 있으니 왕이나 집정 대신이 직접 입조(入朝)하지 않으면 해명할 수 없다. 그런데 왕은 어려서 갈 수 없으니 이것은 늙은 이 몸의 책임이다.”라 하고 곧 자진해 명나라에 가기를 청하였다. 우리 태조는 칭찬해 말하기를 “강개(慷慨)하다. 이 노인이여”라고 하였다. 왕을 위시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이색이 늙고 병중이므로 굳이 말렸다. 그러나 이색은 말하기를 “나는 평민 출신으로 벼슬이 재상에 달하였으니 항상 죽음으로 이에 보답하려 하였더니 이제 죽을 곳을 얻게 되었다. 설사 도중에서 죽을지라도 시체를 가지고 중간(中間) 역할을 놀아서 나라에서 위임된 바가 황제꼐 전달될 수만 있다면 비록 죽어도 오히러 산 셈으로 될 것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이숭인(李崇仁), ★김사안(金士安)과 함께 명나라 서울에 가서 신년을 축하하고 또한 우리 왕을 감국(監國)으로 할 것을 청하였다. 이색은 우리 태조의 위신과 덕망이 날로 높아가고 전국의 민심이 그에게로 돌아가고 있으므로 그가 돌아오기 전에 혹 사변이 있을가 염려해 그 아들 하나를 동행할 것을 청하자 우리 태조는 우리 태종(李芳遠)으로 서장관(書狀官)을 삼게 하였다. 명나라에 들어가서 노상에서 어떤 한 점잖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이색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나라 최영은 정병 10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성계가 그를 파리잡듯 쉽게 잡았으니 그대의 나라 백성들은 이성계의 무한히 큰 그 덕을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명나라 황제는 평소에 이색의 명성을 듣고 있었으므로 3~4차나 접견하면서 매우 친절하게 대우하였다. 그리고 조용히 묻기를 “그대는 원나라에서 한림(翰林) 벼슬을 하였으니 응당 한어(漢語)를 알 것이다.”라고 하자 이색은 곧 한어로 갑자기 대답하기를 “청컨대 왕을 직접 입조(入朝)케 하기 바란다.”라고 하였는바 황제가 알아 듣지 못하고 “무슨 말인가.”라고 하였으므로 곁에 있던 예부관(禮部官)이 말을 옮겨 전하였다. 이색은 오래 중국에 가지 않았으므로 말이 매우 어색하였던 것이다. 황제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한어는 납합출(納哈出)과 비슷하다.”라고 하였다.

돌아올 때에 발해(渤海)에 이르러 객선 2척과 동행하였다. 반양산(半洋山)까지 오자 돌개바람이 세차게 불어 두 객선은 다 침몰하고 우리 태종이 탄 배도 거의 구제할 수 없게 되었다. 일행이 모두 놀라 겁을 먹고 엎치락 뒤치락하였으나 태종은 신색이 태연 자약하였다. 이색이 돌아와서 남에게 말하기를 “황제의 심중에는 일정한 주견이 없었다. 나는 황제가 필시 이 문제를 물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황제는 그것은 묻지 않았고 황제가 묻는 것은 모두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라고 하였다. 당시의 세평은 이것을 비난해 “대 성인의 도량을 속유(俗儒)가 말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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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사의(左司議) 오사충(吳思忠)과 문하사인(門下舍人) 조박(趙璞) 등이 상소하기를 “판 문하부사 이색은 우리 현릉(玄陵)을 섬겨 학자의 영수로서 재상의 지위를 차지하였습니다. 현릉이 돌아가시고 후계자가 없으니 권세를 잡은 이인임(李仁任)은 스스로 정권을 독점할 야심으로 어린 임금을 세우려 애썼고 이색은 그 발기에 찬동해 신우를 세웠습니다. 여러 장군이 회군해 왕씨를 세우려 하였을 때에 대장 조민수(曹敏修)는 이인임의 인척(姻戚)이었으므로 신우의 아들 신창(辛昌)을 세워 계승시키고자 하여 그 흉책을 이색에게 의논하자 이색 역시 신창을 마음에 두고 있던 터이므로 마침내 합의되어 그를 세웠습니다. 이색의 아들 이종학(李種學)은 외척(外戚)에게 선전하기를 ‘모든 신하들이 의논해 종실을 세우려 하였으나 결국 세자를 세운 것은 내 아버지의 힘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색은 명나라에서 돌아오자 이숭인, ★김사안 등과 함께 신우를 여흥부(驢興府)로 방문할 것을 약속하고 이색은 앞질러 혼자 가서 만났습니다. 그가 혼자 만나 본 때에 한 말이 공사(公事)였는지, 혹은 사사(私事)였는지는 알 수 없는 바입니다.









《고려사》 제115권 - 열전 제28 >

이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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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용(金九容),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북원(北元) 사절을 물리칠 것을 제의하였다가 죄를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고 귀양갔으나 이어 석방되어 성균 사성(成均司成)으로 임명되었다가 우사의대부(右司儀大夫)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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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김사안(金思安)과 함께 중국에 가서 신년을 축하하고 돌아와서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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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인은 비록 재능이 있으나 조행에 있어서 물론 과실이 많으니 권근이 이숭인을 구호하기 위한 이 변론도 아주 공평하다고는 할 수 없다. 권근은 일찍이 “이색이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김사안을 따라갔던 상인(商人) 백거마(白巨麻)가 많은 금, 은을 휴대하고 갔던바 이숭인이 그 액수를 제한케 한 것을 백거마가 원망해 일을 날조한 것이다.”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신창이 권근의 상소문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회부해 심의하게 한바 사사에서는 문하부(門下府)로 이송하고 문하부에서 헌사(憲司)로 통첩하였다. 헌사에서 이숭인과 동행한 통사(通事) 송희정(宋希正)에게 물은즉 송희정이 말하기를 ”이숭인은 은과 모시 및 삼베를 휴대하고 가서 시장에서 채단(彩段) 16필, 비단 20여 필, 무명 5필, 색실(色絲) 5∼6근을 샀다.”라고 하였다. 또 개인의 종 백인(白仁)이란 자를 심문한바 역시 송희정의 말과 같았다. 간관(諫官)이 상소해 권근을 논죄하기를 “우리들이 상소해 이숭인을 논죄하고 전하는 헌사에 명령해 신문하게 하자 이숭인은 도주해 피신하였습니다. 그리고 첨서 밀직 권근은 상소해 극력 이숭인의 무죄를 변호하고 나아가서는 그가 현철하다고 찬양하였으며 동시에 이숭? 括?논죄한 자를 추궁할 것을 제의한만큼 우리들은 변명하지 않을 수 없으니 사정을 통찰하기 바랍니다.









《고려사》 제137권 - 열전 제50 > 신우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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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하시중 이색, 첨서 밀직사사 이숭인(李崇仁), 동지밀직 ★김사안(金士安)을 명나라로 보내 새해를 경축하고 겸하여 명나라 관리를 파견하여 국정(國政)을 감독할 것과 청년 자제의 명나라 유학을 허가할 것을 청하였다. 국정 감독을 청하는 표문에 이르기를

“국가를 보전하는 길은 대국을 섬기는 데 있으며 원방의 속국을 돕는 길은 국정 감독을 주는 데 있다. 이에 충심(忠心)을 피력하여 당신에게 말하려 한다. 우리 나라는 변방의 한쪽 구석에 처하여 있어서 비록 당신의 성위(聲威)와 교화가 점차 미치고는 있으나 아직 예의의 습관에는 어둡다. 바라건대 감독관을 보내 당신의 교화(敎化)를 입게 하기를 바란다.

당신은 천지를 포용하는 도량과 만방을 동일하게 보니 관후한 인덕(仁德)으로써 관리를 배치하여 이 먼 나라를 편안케 하여 주기를 바란다.

나는 삼가 제후의 직분을 지켜 과오가 없기를 기하면서 당신의 만수 무강을 축원한다”라고 하였다.

자제들의 유학을 청하는 표문에 이르기를

“제왕(帝王)의 인재 양성은 훌륭한 치적(治積)을 높이려는 것이요 자제의 유학은 중화의 풍속에 대한 사모이다. 고명한 당신에게 요청을 말하게 되니 황송한 생각이 더욱 깊다.

생각건대 나의 할아버지 공민왕 전이 홍무 5년에 서면으로 자제들을 유학 보낼 것을 청하여 당신의 승낙을 받았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므로 생도들이 입학하려 가지 못하였다.

바라건대 당신은 내가 당신의 덕화(德化)를 사모하는 성의를 양찰하고 나에게 선조의 유지를 계승하도록 허락함으로써 몽매한 우리 후대들이 귀국의 문명한 대열에 들어서게 하여 주기를 바란다.

나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의 혜택을 누리면서 당신의 만수 무강을 축원한다”라고 하였다.











▣ 김항용 -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 김윤만 -

▣ 솔내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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