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Re:순흥안씨와 우리가문 -백범과 안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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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1-29 18:25 조회1,693회 댓글0건본문
백범선생님의 장남은 김인(金仁)이며 익원공의 22세손입니다.
김인의 배위는 안미생여사인데 바로 안명근의 따님입니다.
안명근은 안중근의사의 동생이며 아버지는 안태훈으로 백범이 가르침을 받은 분입니다.
익원공 22세인 金仁 씨는 일명 泰仁, 호 동산으로
1918년 무오 10월 12일생이며
1945년 을유 3월 29일에 돌아가셔
중국에서 1947년 7월 7일 유해봉안하여
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내곡동 묘좌에 모셨다
1999년 대전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하였습니다.
배위는 안미생여사이며, 순흥안씨입니다. 친정아버지는 안정근, 조부는 안태훈선생입니다.
1917년 정미 8월 15일생이시며,
슬하에 무남독녀 김孝子, 1943년생입니다.
이렇게 백범과 안정근은 사돈지간입니다.
안정근(安定根)(디지탈한국에서 전재)
1885(고종 22)∼1949. 독립운동가. 이명은 청(淸)·정근(正根). 황해도 신천출신.
1918년 11월 중국 길림지역에서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무오대한독립선언서
(戊午大韓 獨立宣言書)에 서명하고, 일제의 전제적 학대와 압박에서 벗어날 것을 선포하였다.
같은해 상해로 가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창당에 여운형(呂運亨)·조동호(趙東祜) 등과 참여하여,
이사장으로 서병호(徐丙浩)를 추대하였으며, 김구(金九)와 함께 이사에 피임되었다.
1919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내조사원제(國內調査員制)를 실시할 때 황해도 신천군의
조사원으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같은해 상해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의 정기총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21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파원으로 왕덕삼(王德三)과 함께 간도지역에 파견되어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간의 군사통일조정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노령 니코리스크에서 중로연합선전부(中露聯合宣傳部)를 조직하여 선전지부장이 되어
간도지방에 있는 일본군경에 대한 정찰 및 전투를 감행하였다.
1921년 간도와 훈춘(琿春)에서 휘하에 15명을 데리고 무장한 뒤 돈화현(敦化縣)과 연길현(延吉縣)
삼도구(三道溝) 지방에서 독립운동의 선전 및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같은해 7월
상해에서 조직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조직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의 방략과 편견 등을 조정하는 데
주력하였다.
1922년 상해에서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설립하여 중국민과의 친화를 도모하며
《독립신문 獨立新聞》을 발행하고 독립운동의 선전과 군자금 모금을 위주로 한 활동를 전개하였다.
그해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같은해
신한청년당의 수뇌부들이 공산당으로 변신하여 당내부에 분열이 생기자, 대한민국임시정부계열인
김구와 김인전(金仁全)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탈당하였다.
그뒤 1926년부터 1936년에 이르는 기간은 조국광복에 대비하여 조선사업(造船事業)으로 위장하고
공작선(工作船) 건조에 진력하였으나, 일제의 극심해진 탄압으로 인하여 홍콩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1939년 6월 뇌병으로 인하여 중국 각지를 이주하면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상해에서 죽었다.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김항용 -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
▣ 김주회 - 백범선생의 며느리 안미생 여사도 순흥안씨 였군요. 그리고 안태훈, 안중근 관련내용도 처음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은회 -
▣ 김윤식 - 감사합니다. 옛 인연이 근세에 다시 이어졌군요. 주회 대부님께서 앞에 올리신 글에 안희제 선생의 함자도 보여 반가웠는데, 솔내 대부님 올리신 글을 통해 사연을 알게 되니 또한 반갑습니다.
▣ 김윤만 -
김인의 배위는 안미생여사인데 바로 안명근의 따님입니다.
안명근은 안중근의사의 동생이며 아버지는 안태훈으로 백범이 가르침을 받은 분입니다.
익원공 22세인 金仁 씨는 일명 泰仁, 호 동산으로
1918년 무오 10월 12일생이며
1945년 을유 3월 29일에 돌아가셔
중국에서 1947년 7월 7일 유해봉안하여
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내곡동 묘좌에 모셨다
1999년 대전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하였습니다.
배위는 안미생여사이며, 순흥안씨입니다. 친정아버지는 안정근, 조부는 안태훈선생입니다.
1917년 정미 8월 15일생이시며,
슬하에 무남독녀 김孝子, 1943년생입니다.
이렇게 백범과 안정근은 사돈지간입니다.
안정근(安定根)(디지탈한국에서 전재)
1885(고종 22)∼1949. 독립운동가. 이명은 청(淸)·정근(正根). 황해도 신천출신.
1918년 11월 중국 길림지역에서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무오대한독립선언서
(戊午大韓 獨立宣言書)에 서명하고, 일제의 전제적 학대와 압박에서 벗어날 것을 선포하였다.
같은해 상해로 가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창당에 여운형(呂運亨)·조동호(趙東祜) 등과 참여하여,
이사장으로 서병호(徐丙浩)를 추대하였으며, 김구(金九)와 함께 이사에 피임되었다.
1919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내조사원제(國內調査員制)를 실시할 때 황해도 신천군의
조사원으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같은해 상해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의 정기총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21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파원으로 왕덕삼(王德三)과 함께 간도지역에 파견되어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간의 군사통일조정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노령 니코리스크에서 중로연합선전부(中露聯合宣傳部)를 조직하여 선전지부장이 되어
간도지방에 있는 일본군경에 대한 정찰 및 전투를 감행하였다.
1921년 간도와 훈춘(琿春)에서 휘하에 15명을 데리고 무장한 뒤 돈화현(敦化縣)과 연길현(延吉縣)
삼도구(三道溝) 지방에서 독립운동의 선전 및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같은해 7월
상해에서 조직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조직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의 방략과 편견 등을 조정하는 데
주력하였다.
1922년 상해에서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설립하여 중국민과의 친화를 도모하며
《독립신문 獨立新聞》을 발행하고 독립운동의 선전과 군자금 모금을 위주로 한 활동를 전개하였다.
그해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같은해
신한청년당의 수뇌부들이 공산당으로 변신하여 당내부에 분열이 생기자, 대한민국임시정부계열인
김구와 김인전(金仁全)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탈당하였다.
그뒤 1926년부터 1936년에 이르는 기간은 조국광복에 대비하여 조선사업(造船事業)으로 위장하고
공작선(工作船) 건조에 진력하였으나, 일제의 극심해진 탄압으로 인하여 홍콩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1939년 6월 뇌병으로 인하여 중국 각지를 이주하면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상해에서 죽었다.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김항용 -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
▣ 김주회 - 백범선생의 며느리 안미생 여사도 순흥안씨 였군요. 그리고 안태훈, 안중근 관련내용도 처음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은회 -
▣ 김윤식 - 감사합니다. 옛 인연이 근세에 다시 이어졌군요. 주회 대부님께서 앞에 올리신 글에 안희제 선생의 함자도 보여 반가웠는데, 솔내 대부님 올리신 글을 통해 사연을 알게 되니 또한 반갑습니다.
▣ 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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