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오은대관下 07 ---오은김선생 請諡上言草 (1818 이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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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2-03 00:58 조회1,882회 댓글0건본문
▣ 고충지 (1982, 안렴사공파종회)
청시상언 경위
서기 1818년 (순조18 戊寅) 2월에 鄕儒 이의병 선생이 장두에서 순조가 수원에 거동하는 행차 앞에서 상소하여 시호 하사하기를 소청했다.
사림들의 사모하는 마음 몇백 세를 내려가도 잊어지지 않고 유전하고 있어서 그의 충절이 씻어지지 않을 것이다.
5-1-8 오은김선생 請諡上言草 (1818 이의병)
생략하옵고 충정을 표창하고 절의를 장려하는 것은 국가에 있어서의 범전이요 어진이를 높이고 의절있는 이를 사모하는 것은 儒生들의 공정한 예론이라.
진실로 충효대절이 있어서 고금에 쟁쟁하게 빛나며 그 난 곳에서는 올바를 자세로 공경하여 예할 것이고, 국가에서는 반드시 표창하여 風聲을 세울 것이니, 신의 몸들은 가만히 엎드려 고려 안렴사 신 김사렴을 생각하여 보건대 려말 때 문충공 신 정몽주와 문정공 신 이색으로 더불어 도의로 사귄 친구요 또 정추 이존오를 더불어 직간 잘 하기로 유명하여 한때 여러 현인들의 사적이 려사에 가지런히 실려 있습니다.
대개가 공양왕때 아조 개국공신들이 分遣(분견)되어 나갈 적에 조견과 김사렴이 영남과 호서로 각각 봉명하고, 안렴사로 있을 때 려조가 혁명됨에 미치니 조견은 돌아가서 과천 관악에 숨고 김사렴은 청주 오근촌에 은퇴하여 이 두분의 處義한 것이 대략 서로 같았습니다.
이태조 천조하면서 사렴을 좌사간으로 삼고 여러번 불렀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오근리 도산에 들어가 숨어 있고 싸리문을 굳게 닫고 세상과 끊고 종신토록 나오지 아니하며 아들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나는 려조적 옛 신하로 세대 정승으로 임금을 도와 나라를 붙들지 못하였고 능히 순직도 못했으니 천하의 죄인이요 만고의 불충이라. 무슨 면목으로 죽어서 선왕과 선인을 지하에서 뵈이리요.
나 죽은 후에 심산에 묻고 봉분도 말고 표석도 세우지 말아서 산과 같이 편편히 하여 이 뒤 사람들이 김사렴의 묘라고 알지 못하게 하라. 또 나의 자손으로 려조에 벼슬한 사람은 이조에 벼슬하지 말라"
고 하였으니 그 옛 임금님을 위하여 절의와 자제에게 교훈을 준 것이 모두 온전하여 고려사와 서원읍지에 그 본말이 소상하게 실려 있습니다.
그 뒤에 試士官이 와서 遺命平塚(유명평총) 4자와 一片陶山 萬古首陽 (일편도산 만고수양) 이라 한 8자로 시제를 삼아서 백대 뒤에도 그 공정한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여 본도 儒生들이 肅廟戊子(숙묘무자=1708)에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고 그 이듬 이듬해인 辛卯년에(=1711) 도내 유생 ★이택하와 여러분들이 글을 올려 請額(청액)하여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라는 명령까지 있었는데 마침 조정에 일이 있어서 시행을 못하였습니다.
만일 그 淸風苦節(청풍고절)을 논한다면 족히 백이숙제와 같다 해도 부끄럽지 않고 정몽주, 이색, 정추, 이존오, 조견에게 비해 보아도 다 같은 그 분들인데 특히 자손의 잔미함과 士論의 침체로 인하여 초라한 헌 사당에 恩賜(은사)하신 액자를 못 달고 그의 式典도 못 거행하였으니 이게 어찌 聖朝의 欠典(흠전)이 아니며 유림들에 한탄함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몸들은 본조 4백여년내 여조를 위하여 절의를 남긴 분에게 표창한 의식을 삼가 생각하여 보면 아름답게 하지 않은 것이 없이 정몽주 같이 이하 조견 여러분에 이르기까지 다 이미 표정하여 제사를 지내게 했고 두문동 70여인에 이르기까지 다 비석을 세워 절의를 표하게 하였으나 유독 김사렴 한 사람만이 여기에 빠져서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몸들은 감히 천리길에 짚신감 발로 서로 이끌고 와 법가 앞에서 부르며 부르짖어 엎드려 비옵건대 천지 부모님께서는 굽어 살피사 김사렴에게 賜諡(사시)의 명을 내리옵소서
당저무인2월 능행시 (1818년, 순조30년 무인 2월)
장두 신 이의병
▣ 김재이 -
▣ 솔내영환 - 이 시장의 상소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봉상시에 접수되었나요?. 그후는? 궁굼합니다.
▣ 김은회 - 잘 보았습니다.
청시상언 경위
서기 1818년 (순조18 戊寅) 2월에 鄕儒 이의병 선생이 장두에서 순조가 수원에 거동하는 행차 앞에서 상소하여 시호 하사하기를 소청했다.
사림들의 사모하는 마음 몇백 세를 내려가도 잊어지지 않고 유전하고 있어서 그의 충절이 씻어지지 않을 것이다.
5-1-8 오은김선생 請諡上言草 (1818 이의병)
생략하옵고 충정을 표창하고 절의를 장려하는 것은 국가에 있어서의 범전이요 어진이를 높이고 의절있는 이를 사모하는 것은 儒生들의 공정한 예론이라.
진실로 충효대절이 있어서 고금에 쟁쟁하게 빛나며 그 난 곳에서는 올바를 자세로 공경하여 예할 것이고, 국가에서는 반드시 표창하여 風聲을 세울 것이니, 신의 몸들은 가만히 엎드려 고려 안렴사 신 김사렴을 생각하여 보건대 려말 때 문충공 신 정몽주와 문정공 신 이색으로 더불어 도의로 사귄 친구요 또 정추 이존오를 더불어 직간 잘 하기로 유명하여 한때 여러 현인들의 사적이 려사에 가지런히 실려 있습니다.
대개가 공양왕때 아조 개국공신들이 分遣(분견)되어 나갈 적에 조견과 김사렴이 영남과 호서로 각각 봉명하고, 안렴사로 있을 때 려조가 혁명됨에 미치니 조견은 돌아가서 과천 관악에 숨고 김사렴은 청주 오근촌에 은퇴하여 이 두분의 處義한 것이 대략 서로 같았습니다.
이태조 천조하면서 사렴을 좌사간으로 삼고 여러번 불렀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오근리 도산에 들어가 숨어 있고 싸리문을 굳게 닫고 세상과 끊고 종신토록 나오지 아니하며 아들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나는 려조적 옛 신하로 세대 정승으로 임금을 도와 나라를 붙들지 못하였고 능히 순직도 못했으니 천하의 죄인이요 만고의 불충이라. 무슨 면목으로 죽어서 선왕과 선인을 지하에서 뵈이리요.
나 죽은 후에 심산에 묻고 봉분도 말고 표석도 세우지 말아서 산과 같이 편편히 하여 이 뒤 사람들이 김사렴의 묘라고 알지 못하게 하라. 또 나의 자손으로 려조에 벼슬한 사람은 이조에 벼슬하지 말라"
고 하였으니 그 옛 임금님을 위하여 절의와 자제에게 교훈을 준 것이 모두 온전하여 고려사와 서원읍지에 그 본말이 소상하게 실려 있습니다.
그 뒤에 試士官이 와서 遺命平塚(유명평총) 4자와 一片陶山 萬古首陽 (일편도산 만고수양) 이라 한 8자로 시제를 삼아서 백대 뒤에도 그 공정한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여 본도 儒生들이 肅廟戊子(숙묘무자=1708)에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고 그 이듬 이듬해인 辛卯년에(=1711) 도내 유생 ★이택하와 여러분들이 글을 올려 請額(청액)하여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라는 명령까지 있었는데 마침 조정에 일이 있어서 시행을 못하였습니다.
만일 그 淸風苦節(청풍고절)을 논한다면 족히 백이숙제와 같다 해도 부끄럽지 않고 정몽주, 이색, 정추, 이존오, 조견에게 비해 보아도 다 같은 그 분들인데 특히 자손의 잔미함과 士論의 침체로 인하여 초라한 헌 사당에 恩賜(은사)하신 액자를 못 달고 그의 式典도 못 거행하였으니 이게 어찌 聖朝의 欠典(흠전)이 아니며 유림들에 한탄함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몸들은 본조 4백여년내 여조를 위하여 절의를 남긴 분에게 표창한 의식을 삼가 생각하여 보면 아름답게 하지 않은 것이 없이 정몽주 같이 이하 조견 여러분에 이르기까지 다 이미 표정하여 제사를 지내게 했고 두문동 70여인에 이르기까지 다 비석을 세워 절의를 표하게 하였으나 유독 김사렴 한 사람만이 여기에 빠져서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몸들은 감히 천리길에 짚신감 발로 서로 이끌고 와 법가 앞에서 부르며 부르짖어 엎드려 비옵건대 천지 부모님께서는 굽어 살피사 김사렴에게 賜諡(사시)의 명을 내리옵소서
당저무인2월 능행시 (1818년, 순조30년 무인 2월)
장두 신 이의병
▣ 김재이 -
▣ 솔내영환 - 이 시장의 상소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봉상시에 접수되었나요?. 그후는? 궁굼합니다.
▣ 김은회 -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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