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오은대관下 08 ---고려명신전 (1822, 남공철)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3-02-03 01:01 조회1,632회 댓글0건본문
5-1-9 고려명신전 (1822, 남공철)
▣ 고려명신전 (1822, 남공철)
김사렴
김사렴은 평장사 방경의 후손이다. 젊어서 학문에 뜻을 두어 지식과 문재가 뛰어나더니 공민왕 초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안렴사에 이르렀다.
정몽주, 이색과 친교가 깊고 모두들 임금에게 직간을 잘 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신돈이 정권을 전단할 때 왕을 비롯하여 공경대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우러러 섬기었다. 공민왕 14년에 신돈에게 벽상삼한 삼중대광 집현전 태학사 수정리순론섭리보세공신의 작호를 내리고 왕이 자주 그 집에 행차하여 공치기와 연등놀이 연회를 갖고 상을 주되 은병, 안장, 능라금주, 천수필식을 주며 즐기었다.
사렴이 임금에게 상서해 가로되 "신돈은 바르고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이니 후에 반듯이 정치를 문란케 하여 고려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나아가서 종묘제전을 끊이게 할 위험인물이라" 상주하였다.
이때에 마침 좌사간 대부 정추와 우정언 이존오는 신돈에 관한 언론이 빌미가 되어 정추는 동래로 귀양가고 이존오는 장사감무로 좌천되니 조야가 벌벌 떨고 감히 신돈의 말을 입에 담지 못하는 터인데도 오직 사렴만이 이와 같이 직언으로 성토하였기로 그 명성이 나라 안에 진동하였다.
태조대왕이 등극하자 사렴은 청주에 피해 숨어 살며 한양을 향하여 앉지도 아니하고 매양 읊조리되 "열녀는 지아비를 두 번 바꾸지 아니하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 하느니라" 하였다.
태조가 사렴에게 사간원 좌사간 벼슬을 주고 여러번 불렀으되 끝내 나가지 아니하고 급기야 도산으로 들어가 더욱 문호를 굳게 닫고 빈객을 사절하면서 회한으로 여생을 살았다.
죽음에 임하여 여러 자손에게 이르되 "나는 려조의 대대로 내려오는 충신으로서 이미 임금을 구하고 나라를 붙잡지 못하였으며 또한 나라가 망함에 몸을 순국치 못하였으니 천하의 죄인이라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들어가서 선대왕과 선인을 뵈올까 보냐" 하였다.
"내가 죽거든 깊은 산중에 묻고 봉분을 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며 자손중에 이미 벼슬했던 자는 다시 사환에 나가지 말라" 유언하였다.
숙종 4년 이고장 선비들의 공의로 송천서원을 세우고 향사하니라.
▣ 안렴사공 신도비명 (1840이전, 남공철)
公轍이 일찍이 高麗名臣傳을 짓는데 吉再와 趙 (조견)과 南乙珍(남을진)과 元天錫(원천석)과 徐甄(서견) 및 公의 史實을 모아 逸民篇에 편입하였는데
再는 문하주서로서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선선에 들어가 은거하고
의 이름은 개견변( )을 땃는데 자신이 나라가 망하여도 죽지 못하였으니 개와 같다고 하여 자로 이름을 짓고 머리를 가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여생을 마치었고
乙珍은 태조와는 潛邸時(잠저시)로부터 親舊임으로 왕이 된 뒤에 반드시 데려 오고져 하여 누차 벼슬을 주고 불렀으나 나가지 않으니 왕이 그 뜻을 嘉尙히 여겨 그 살고 있는 고을을 봉하여 沙川伯을 삼고
天錫과 甄은 혹은 원주에 살고 혹은 衿川에 살더니 당시의 사람들이 망명한 죄로 벌을 주자하니 왕이 이르되 "백이숙제와 같은 인물이니 사면하고 불문에 부치라"고 하였으며
또 두문동의 諸賢 약간인을 모아 아울러 부록에 편집하였다.
▣ 대동기문 (1925)
■新完譯 大東奇聞 上,中,下 (2000, 이민주 역, 명문당)
下 p347 金士廉
김사렴은 안동 사람이니 평장사 방경의 자손이다. 젊었을 때 학문에 뜻을 두어 文詞에 풍부했다. 공민왕 초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안렴사에 이르고 정몽주, 이색 등과 가깝게 사귀어 모두 곧게 간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신돈이 用事할 때 임금께 글을 올려 말하기를
"돈은 바른 사람이 아니니 뒤에 반드시 정치가 어지러워져서 고려의 사직이 장차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했는데 태조가 즉위하자 사렴은 드디어 청주에 숨어서 일찍이 漢南을 향해서 앉지 않고 매양 스스로 외우기를
"열녀는 두 지아비를 고치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했다.
태조가 사렴을 배하여 좌사간을 삼아 여러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드디어 陶山으로 들어가 더욱 문을 닫고 손님을 끊고서 졸할 때에 임하여 여러 아들들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나는 고려조의 옛 신하로서 이미 임금을 도와서 나라를 보존하지 못했고 나라가 망하자 또 능히 몸이 殉國하지 못했으니 천하의 죄인이라.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서 先王와 先人을 뵙겠느냐. 내가 죽거든 깊은 산 속에 장사 지내고 흙을 쌓아 올리거나 돌을 세우지 말고 자손 중에 이미 벼슬한 자라도 다시는 벼슬하지 말라."
했다.
숙종4년에 고향의 선비들이 松泉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냈다. <高麗名臣傳>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사렴 (金士廉 )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평장사(平章事)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문장에 능하였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 벼슬이 안렴사(按廉使)에 이르렀다.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과 교분이 두터웠을 뿐만 아니라 직간으로도 유명하였다. 신돈(辛旽)이 집권하였을 때 공경대부들이 모두 신돈을 받들고 왕이 총애하자, 상소하여 신돈이 반드시 뒤에 정사를 어지럽히고 사직을 망하게 할 것이라고 간하였다.
당시 정추(鄭樞)·이존오(李存吾) 등이 신돈을 탄핵하다 쫓겨난 뒤여서, 조야가 감히 신돈의 일을 말하지 못하였는데 홀로 이를 논하여 직언했다는 소리가 높았다. 고려가 망하자 청주에 은퇴, 태조가 여러 차례 좌사간에 임명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도산(陶山)으로 옮겨 은거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名臣傳.
▣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김사렴(金士廉)
생몰년 미상.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안동. 평장사(平章事)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문장에 능하였다. 공민왕 때에 과거에 급제, 벼슬이 안렴사(按廉使)에 이르렀다.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과 교분이 두터웠을 뿐만 아니라 직간으로도 유명하였다.
신돈(辛旽)이 집권하였을 때 공경대부들이 모두 신돈을 받들고 왕이 총애하자, 상소하여 신돈이 반드시 뒤에 정사를 어지럽히고 사직을 망하게 할 것이라고 간하였다. 당시 정추(鄭樞)·이존오(李存吾) 등이 신돈을 탄핵하다 쫓겨난 뒤여서, 조야가 감히 신돈의 일을 말하지 못하였는데 홀로 이를 논하여 직언했다는 소리가 높았다.
고려가 망하자 청주에 은퇴, 태조가 여러 차례 좌사간에 임명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도산(陶山)으로 옮겨 은거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名臣傳. 〈朴天圭〉
▣ 김재이 -
▣ 솔내영환 -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 고려명신전 (1822, 남공철)
김사렴
김사렴은 평장사 방경의 후손이다. 젊어서 학문에 뜻을 두어 지식과 문재가 뛰어나더니 공민왕 초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안렴사에 이르렀다.
정몽주, 이색과 친교가 깊고 모두들 임금에게 직간을 잘 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신돈이 정권을 전단할 때 왕을 비롯하여 공경대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우러러 섬기었다. 공민왕 14년에 신돈에게 벽상삼한 삼중대광 집현전 태학사 수정리순론섭리보세공신의 작호를 내리고 왕이 자주 그 집에 행차하여 공치기와 연등놀이 연회를 갖고 상을 주되 은병, 안장, 능라금주, 천수필식을 주며 즐기었다.
사렴이 임금에게 상서해 가로되 "신돈은 바르고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이니 후에 반듯이 정치를 문란케 하여 고려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나아가서 종묘제전을 끊이게 할 위험인물이라" 상주하였다.
이때에 마침 좌사간 대부 정추와 우정언 이존오는 신돈에 관한 언론이 빌미가 되어 정추는 동래로 귀양가고 이존오는 장사감무로 좌천되니 조야가 벌벌 떨고 감히 신돈의 말을 입에 담지 못하는 터인데도 오직 사렴만이 이와 같이 직언으로 성토하였기로 그 명성이 나라 안에 진동하였다.
태조대왕이 등극하자 사렴은 청주에 피해 숨어 살며 한양을 향하여 앉지도 아니하고 매양 읊조리되 "열녀는 지아비를 두 번 바꾸지 아니하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 하느니라" 하였다.
태조가 사렴에게 사간원 좌사간 벼슬을 주고 여러번 불렀으되 끝내 나가지 아니하고 급기야 도산으로 들어가 더욱 문호를 굳게 닫고 빈객을 사절하면서 회한으로 여생을 살았다.
죽음에 임하여 여러 자손에게 이르되 "나는 려조의 대대로 내려오는 충신으로서 이미 임금을 구하고 나라를 붙잡지 못하였으며 또한 나라가 망함에 몸을 순국치 못하였으니 천하의 죄인이라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들어가서 선대왕과 선인을 뵈올까 보냐" 하였다.
"내가 죽거든 깊은 산중에 묻고 봉분을 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며 자손중에 이미 벼슬했던 자는 다시 사환에 나가지 말라" 유언하였다.
숙종 4년 이고장 선비들의 공의로 송천서원을 세우고 향사하니라.
▣ 안렴사공 신도비명 (1840이전, 남공철)
公轍이 일찍이 高麗名臣傳을 짓는데 吉再와 趙 (조견)과 南乙珍(남을진)과 元天錫(원천석)과 徐甄(서견) 및 公의 史實을 모아 逸民篇에 편입하였는데
再는 문하주서로서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선선에 들어가 은거하고
의 이름은 개견변( )을 땃는데 자신이 나라가 망하여도 죽지 못하였으니 개와 같다고 하여 자로 이름을 짓고 머리를 가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여생을 마치었고
乙珍은 태조와는 潛邸時(잠저시)로부터 親舊임으로 왕이 된 뒤에 반드시 데려 오고져 하여 누차 벼슬을 주고 불렀으나 나가지 않으니 왕이 그 뜻을 嘉尙히 여겨 그 살고 있는 고을을 봉하여 沙川伯을 삼고
天錫과 甄은 혹은 원주에 살고 혹은 衿川에 살더니 당시의 사람들이 망명한 죄로 벌을 주자하니 왕이 이르되 "백이숙제와 같은 인물이니 사면하고 불문에 부치라"고 하였으며
또 두문동의 諸賢 약간인을 모아 아울러 부록에 편집하였다.
▣ 대동기문 (1925)
■新完譯 大東奇聞 上,中,下 (2000, 이민주 역, 명문당)
下 p347 金士廉
김사렴은 안동 사람이니 평장사 방경의 자손이다. 젊었을 때 학문에 뜻을 두어 文詞에 풍부했다. 공민왕 초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안렴사에 이르고 정몽주, 이색 등과 가깝게 사귀어 모두 곧게 간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신돈이 用事할 때 임금께 글을 올려 말하기를
"돈은 바른 사람이 아니니 뒤에 반드시 정치가 어지러워져서 고려의 사직이 장차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했는데 태조가 즉위하자 사렴은 드디어 청주에 숨어서 일찍이 漢南을 향해서 앉지 않고 매양 스스로 외우기를
"열녀는 두 지아비를 고치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했다.
태조가 사렴을 배하여 좌사간을 삼아 여러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드디어 陶山으로 들어가 더욱 문을 닫고 손님을 끊고서 졸할 때에 임하여 여러 아들들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나는 고려조의 옛 신하로서 이미 임금을 도와서 나라를 보존하지 못했고 나라가 망하자 또 능히 몸이 殉國하지 못했으니 천하의 죄인이라.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서 先王와 先人을 뵙겠느냐. 내가 죽거든 깊은 산 속에 장사 지내고 흙을 쌓아 올리거나 돌을 세우지 말고 자손 중에 이미 벼슬한 자라도 다시는 벼슬하지 말라."
했다.
숙종4년에 고향의 선비들이 松泉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냈다. <高麗名臣傳>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사렴 (金士廉 )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평장사(平章事)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문장에 능하였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 벼슬이 안렴사(按廉使)에 이르렀다.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과 교분이 두터웠을 뿐만 아니라 직간으로도 유명하였다. 신돈(辛旽)이 집권하였을 때 공경대부들이 모두 신돈을 받들고 왕이 총애하자, 상소하여 신돈이 반드시 뒤에 정사를 어지럽히고 사직을 망하게 할 것이라고 간하였다.
당시 정추(鄭樞)·이존오(李存吾) 등이 신돈을 탄핵하다 쫓겨난 뒤여서, 조야가 감히 신돈의 일을 말하지 못하였는데 홀로 이를 논하여 직언했다는 소리가 높았다. 고려가 망하자 청주에 은퇴, 태조가 여러 차례 좌사간에 임명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도산(陶山)으로 옮겨 은거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名臣傳.
▣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김사렴(金士廉)
생몰년 미상.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안동. 평장사(平章事)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문장에 능하였다. 공민왕 때에 과거에 급제, 벼슬이 안렴사(按廉使)에 이르렀다.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과 교분이 두터웠을 뿐만 아니라 직간으로도 유명하였다.
신돈(辛旽)이 집권하였을 때 공경대부들이 모두 신돈을 받들고 왕이 총애하자, 상소하여 신돈이 반드시 뒤에 정사를 어지럽히고 사직을 망하게 할 것이라고 간하였다. 당시 정추(鄭樞)·이존오(李存吾) 등이 신돈을 탄핵하다 쫓겨난 뒤여서, 조야가 감히 신돈의 일을 말하지 못하였는데 홀로 이를 논하여 직언했다는 소리가 높았다.
고려가 망하자 청주에 은퇴, 태조가 여러 차례 좌사간에 임명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도산(陶山)으로 옮겨 은거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名臣傳. 〈朴天圭〉
▣ 김재이 -
▣ 솔내영환 -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