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은 <강화도와 충렬공의 달> - 강화도 간척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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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2-04 02:53 조회1,925회 댓글0건본문
2월은 <강화도와 충렬공의 달> - 강화도 간척역사
2001년 6월 30일 방영된 KBS1TV 역사스페셜 <800년전, 강화도의 대부분은 바다였다.>를 보면 강화도의 간척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고려시대 간척 관련 내용만 발췌하여 보았습니다.
800년전, 강화도의 대부분은 바다였다.
1. 제 목: 120개의 대제방, 강화 평야는 바다였다.
2. 담당 PD: 류지열 PD
3. 방송 일시: 2001년 6월 30일 (토) 20:00-21:00..... KBS 1TV
4. 주요내용
강화군 석모도에 자리한 송가평은 2백만평에 달하는 대평야다.
섬 안에 있는 평야라고 하기엔 누가봐도 그 넓이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송가평같은 대평야가 강화도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섬 안에 이런 거대한 평야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송가평에서 취재진이 발견한 것은 조선시대 대제방의 흔적이었다.
고려시대부터 강화도에 쌓은 제방은 무려 120개.
120개의 제방으로 바다를 막고 그 땅을 농지로 개간한 것이다.
강화는 그야말로 간척에 의해 새로 태어난 인공섬이다.
이번 주 역사스페셜에서는 수많은 제방이 축조되기 전 강화의 옛 모습을 복원해
보고 지금과 같이 달라진 이유를 알아본다.
5. 세부내용
1) 강화도 면적의 1/3은 간척지이다.
조선후기 지도를 보면 마니산 일대는 바다에 둘러쌓인 섬으로 나와있다.
석모도 역시 세 개의 섬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렇게 강화도는 수많은 제방을 쌓으면서 지형이 크게 변한 것이다.
취재팀은 토양분석과 고도측정등을 통해 강화도 전체 면적의 1/3이
예전엔 바다였음을 밝혀냈다.
2) 조선시대 제방공사는 과학적인 토목공사의 총화이다.
조선시대 이루어진 제방공사, 그 당시 기술은 과연 어느 수준이었을까?
조선시대 강화도 선두포 제방공사를 소상히 기록한 단암주의를 보면
發牌冶匠造作器械(발패야장조작기계)
라고하여 기구를 제작해서 공사에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아니라 썰물때도 4-5m 수심을 유지하는 갯벌에서 조수가 들어오는 입구에
한 대를 쌓아 조수의 흐름을 감소시키는 과학적인 공법을 이용하였다.
그 과학적인 토목 공사의 현장을 생생한 그래픽으로 복원해본다.
3) 120개의 제방, 왜 강화도에 집중됐나?
강화에 제방을 세운 것은 고려시대 부터이다.
몽골과의 전쟁중 고려는 강화로 천도하는데 이때 유입된 인구는 20만 정도.
갑자기 인구가 늘어나면서 심각한 식량난에 부딪힌 고려정부는 그 해결책으로
간척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강화도에 본격적으로 제방이 세워진 것은 조선후기 숙종대.
강화도는 보장처(왕실 피난처)로서 그 입지를 굳히고 숙종은 강화도에 49개의
돈대를 설치했다.
돈대가 있는 곳은 반드시 제방이 있었으니 이 돈대와 돈대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제방인 것이다.
강화에 집중된 120개의 대제방은 강화의 식량난을 해결하고
강화를 왕실 보장처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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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번엔 120개가 넘는 제방이 강화도에 몰려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두사람 계단 오르고 6 (2-3 초후)>---
지난 1970년 강화도 북산 중턱에서 오래된 건
<고려궁지 9>--- 물 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굴결과 이곳은 700
여년 전 고려의 왕궁터로 밝혀졌다
<터 팬 14>--- 개성의 궁궐을 그대로 본 따서 만들었다는 강화
의 고려 궁궐. 강화는 39년간 고려의 임시수도
였다
<전쟁자료화면 10>--- 1231년 몽골의 1차 침략이후 고려왕조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몽골에 대한 장기항전에
들어갔다
<갑곶해협 15>--- 수도 개경과 가까울 뿐만 아니라 험난한 해협이
가로지르고 있는 강화도는 해전에 약한 몽골의
기마병을 막기에는 안성마춤인 곳이었다
<윤용혁 교수 인터뷰>--- 강화 천도할 때의 개성인구가 10만호였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10만호를 10만명으로
생각하는 의견도 있고 문자그대로 10만호라고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어쨌든 강화천도에 상
당히 많은 인구가 일시에 강화섬에 유입된 것
이 사실입니다. 적어도 일 이십만 정도는 유입
이 됐다 이렇게 봐도 좋지 않겠는가 이렇게 했
을 때에 대단히 여러 가지 생활상의 문제가 제
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생각이 들고
<이규보 묘 9>--- 고려왕실과 함께 건너온 당대의 문장가 이규보
는 이곳 강화에서 생을 마쳤다.
<비석 틸다운 10>--- 당시 이규보가 남긴 글은 새로운 수도에서 부딪
쳐야했던 생활고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글 나오고 17>--- 저는 송곳하나 세울만한 땅이 없이 녹봉만을
의지해오다가 녹봉마저 뜸하여 끼니를 거르기
일쑤이며 늙은 몸이 쓸모가 없어져 탄마저 구
하지 못하고 추위에 떨기가 일쑤였습니다.
---------------------------------------------
<윤용혁 교수 인터뷰>--- 조금이라도 이런 문제를 완화하기 위한 측면이
강화도에서 새로운 경작지를 개간하는 것. 그
가운데는 간척을 통해서 경작지를 확보하는 이
런 작업이 상당히 적극적으로 추진이 됐었고
그래서 40년 동안 강화도에 있으면서 강화도
지형이 크게 바뀔 정도로 많은 간척이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
<고려사 절요 18>--- 고려사절요는 당시 정부가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
한 방안으로 제포와 와포에 둑을 쌓아 좌둔전
을 만들고 이포와 초포에 둑을 쌓아 우둔전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항공촬영 우둔전으로 11>--- 취재팀은 고려시대에 쌓은 둑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바다 팬 성벽 12>--- 강화군 불은면.
우둔전 바깥 해안쪽에서 취재팀이 발견한 것은
해안을 따라 서있는 성벽이었다
<남궁순 설명하고 9 (3-4 초 후)>---
고려시대 이곳에 외성을 쌓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대신 조선시대의
<돌 만지는 손 9>--- 성벽만이 쓰러질 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보고)
<성벽 팬 9>--- 고려시대 해안가에 쌓은 이 외성은 단순히 방어
벽만은 아니었다
<윤용혁 인터뷰 >--- 내성 중성 외성해가지고 3중으로 성을 쌓은
것으로돼 있고 그가운데 외성이 바닷가로 해안
을 따라서 쌓은 성이 외성입니다만은 원래 강
화도의 지형이 해안 굴곡이 아주 심한 지형인
데 외성을 쌓게되면 자연히 해수유입을 차단하
는 그런 효과를 가져오게 돼서 그래서 자연히
외성을 구축하는 것은 방어시설 설비를 위해서
도 상당히 중요하고 동시에 외성을 구축함으로
써 간척이 부수적으로 가능해지는 효과를 가져
온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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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이 - 정말 좋은 자료 정말 감사합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찾고자 했던 자료입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당시 방영 테이프를 갖고 계신 분이 계신지요
▣ 솔내영환 -
2001년 6월 30일 방영된 KBS1TV 역사스페셜 <800년전, 강화도의 대부분은 바다였다.>를 보면 강화도의 간척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고려시대 간척 관련 내용만 발췌하여 보았습니다.
800년전, 강화도의 대부분은 바다였다.
1. 제 목: 120개의 대제방, 강화 평야는 바다였다.
2. 담당 PD: 류지열 PD
3. 방송 일시: 2001년 6월 30일 (토) 20:00-21:00..... KBS 1TV
4. 주요내용
강화군 석모도에 자리한 송가평은 2백만평에 달하는 대평야다.
섬 안에 있는 평야라고 하기엔 누가봐도 그 넓이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송가평같은 대평야가 강화도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섬 안에 이런 거대한 평야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송가평에서 취재진이 발견한 것은 조선시대 대제방의 흔적이었다.
고려시대부터 강화도에 쌓은 제방은 무려 120개.
120개의 제방으로 바다를 막고 그 땅을 농지로 개간한 것이다.
강화는 그야말로 간척에 의해 새로 태어난 인공섬이다.
이번 주 역사스페셜에서는 수많은 제방이 축조되기 전 강화의 옛 모습을 복원해
보고 지금과 같이 달라진 이유를 알아본다.
5. 세부내용
1) 강화도 면적의 1/3은 간척지이다.
조선후기 지도를 보면 마니산 일대는 바다에 둘러쌓인 섬으로 나와있다.
석모도 역시 세 개의 섬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렇게 강화도는 수많은 제방을 쌓으면서 지형이 크게 변한 것이다.
취재팀은 토양분석과 고도측정등을 통해 강화도 전체 면적의 1/3이
예전엔 바다였음을 밝혀냈다.
2) 조선시대 제방공사는 과학적인 토목공사의 총화이다.
조선시대 이루어진 제방공사, 그 당시 기술은 과연 어느 수준이었을까?
조선시대 강화도 선두포 제방공사를 소상히 기록한 단암주의를 보면
發牌冶匠造作器械(발패야장조작기계)
라고하여 기구를 제작해서 공사에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아니라 썰물때도 4-5m 수심을 유지하는 갯벌에서 조수가 들어오는 입구에
한 대를 쌓아 조수의 흐름을 감소시키는 과학적인 공법을 이용하였다.
그 과학적인 토목 공사의 현장을 생생한 그래픽으로 복원해본다.
3) 120개의 제방, 왜 강화도에 집중됐나?
강화에 제방을 세운 것은 고려시대 부터이다.
몽골과의 전쟁중 고려는 강화로 천도하는데 이때 유입된 인구는 20만 정도.
갑자기 인구가 늘어나면서 심각한 식량난에 부딪힌 고려정부는 그 해결책으로
간척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강화도에 본격적으로 제방이 세워진 것은 조선후기 숙종대.
강화도는 보장처(왕실 피난처)로서 그 입지를 굳히고 숙종은 강화도에 49개의
돈대를 설치했다.
돈대가 있는 곳은 반드시 제방이 있었으니 이 돈대와 돈대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제방인 것이다.
강화에 집중된 120개의 대제방은 강화의 식량난을 해결하고
강화를 왕실 보장처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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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번엔 120개가 넘는 제방이 강화도에 몰려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두사람 계단 오르고 6 (2-3 초후)>---
지난 1970년 강화도 북산 중턱에서 오래된 건
<고려궁지 9>--- 물 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굴결과 이곳은 700
여년 전 고려의 왕궁터로 밝혀졌다
<터 팬 14>--- 개성의 궁궐을 그대로 본 따서 만들었다는 강화
의 고려 궁궐. 강화는 39년간 고려의 임시수도
였다
<전쟁자료화면 10>--- 1231년 몽골의 1차 침략이후 고려왕조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몽골에 대한 장기항전에
들어갔다
<갑곶해협 15>--- 수도 개경과 가까울 뿐만 아니라 험난한 해협이
가로지르고 있는 강화도는 해전에 약한 몽골의
기마병을 막기에는 안성마춤인 곳이었다
<윤용혁 교수 인터뷰>--- 강화 천도할 때의 개성인구가 10만호였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10만호를 10만명으로
생각하는 의견도 있고 문자그대로 10만호라고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어쨌든 강화천도에 상
당히 많은 인구가 일시에 강화섬에 유입된 것
이 사실입니다. 적어도 일 이십만 정도는 유입
이 됐다 이렇게 봐도 좋지 않겠는가 이렇게 했
을 때에 대단히 여러 가지 생활상의 문제가 제
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생각이 들고
<이규보 묘 9>--- 고려왕실과 함께 건너온 당대의 문장가 이규보
는 이곳 강화에서 생을 마쳤다.
<비석 틸다운 10>--- 당시 이규보가 남긴 글은 새로운 수도에서 부딪
쳐야했던 생활고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글 나오고 17>--- 저는 송곳하나 세울만한 땅이 없이 녹봉만을
의지해오다가 녹봉마저 뜸하여 끼니를 거르기
일쑤이며 늙은 몸이 쓸모가 없어져 탄마저 구
하지 못하고 추위에 떨기가 일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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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혁 교수 인터뷰>--- 조금이라도 이런 문제를 완화하기 위한 측면이
강화도에서 새로운 경작지를 개간하는 것. 그
가운데는 간척을 통해서 경작지를 확보하는 이
런 작업이 상당히 적극적으로 추진이 됐었고
그래서 40년 동안 강화도에 있으면서 강화도
지형이 크게 바뀔 정도로 많은 간척이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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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절요 18>--- 고려사절요는 당시 정부가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
한 방안으로 제포와 와포에 둑을 쌓아 좌둔전
을 만들고 이포와 초포에 둑을 쌓아 우둔전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항공촬영 우둔전으로 11>--- 취재팀은 고려시대에 쌓은 둑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바다 팬 성벽 12>--- 강화군 불은면.
우둔전 바깥 해안쪽에서 취재팀이 발견한 것은
해안을 따라 서있는 성벽이었다
<남궁순 설명하고 9 (3-4 초 후)>---
고려시대 이곳에 외성을 쌓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대신 조선시대의
<돌 만지는 손 9>--- 성벽만이 쓰러질 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보고)
<성벽 팬 9>--- 고려시대 해안가에 쌓은 이 외성은 단순히 방어
벽만은 아니었다
<윤용혁 인터뷰 >--- 내성 중성 외성해가지고 3중으로 성을 쌓은
것으로돼 있고 그가운데 외성이 바닷가로 해안
을 따라서 쌓은 성이 외성입니다만은 원래 강
화도의 지형이 해안 굴곡이 아주 심한 지형인
데 외성을 쌓게되면 자연히 해수유입을 차단하
는 그런 효과를 가져오게 돼서 그래서 자연히
외성을 구축하는 것은 방어시설 설비를 위해서
도 상당히 중요하고 동시에 외성을 구축함으로
써 간척이 부수적으로 가능해지는 효과를 가져
온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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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이 - 정말 좋은 자료 정말 감사합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찾고자 했던 자료입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당시 방영 테이프를 갖고 계신 분이 계신지요
▣ 솔내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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