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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강화도와 충렬공(3) 양도면 집중탐구 [고려왕릉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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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2-06 19:01 조회1,6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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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능(坤陵)



인천 강화군 양도면(良道面) 길정리(吉亭里). 사적 제371호. 고려 강종(康宗)의 비(妃) 원덕태후(元德太后)의 능.곤능(坤陵)



사적37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고려 제 22 대 강종(康宗)왕비 원덕태후(元德太后)의능이다. 소재지는 양도면 길정리에 있다





http://msrv.yahoo.co.kr/enc/image/25/19725.jpg (사진 보세요,클릭)





가릉



인천 강화군 양도면(良道面) 능내리(陵內里). 사적 제370호. 고려 제24대 원종(元宗)의 비(妃) 순경태후(順敬太后)의 능.고려 24대 원종(元宗)의 비(妃)인 순경태후(順慶太后)의 능으로 양도면 길정리에 위치하고 있다. 당초의 이 묘소는 고려 후기의 왕실 묘제를 따라 혼유석외 각종 석조물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오랜세월이 흐르는 동안 봉분은 붕괴되고 석조물은 파괴되어 없어진채 1975년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 강화군이 정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사적370호로 되어 있다.



http://msrv.yahoo.co.kr/enc/image/26/19726.jpg (사진보실려면, 클릭)







석릉 碩陵



개요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良道面) 길정리(吉亭里)에 있는 고려 희종(熙宗)의 능.

지정번호 : 사적 제369호

소장/소재지 : 인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시대 : 고려시대

크기 : 지정면적 2,498㎡

종류 : 능



내용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사적 제369호. 지정면적 2,498m2. 희종은 1204년에 즉위, 권신 최충헌(崔忠獻)을 제거하기 위하여 모의하다가 실패하여, 1211년 강화도 교동(喬桐)으로 유배되었고, 1237년 용유도(龍遊島)에서 죽어 이곳 석릉에 안장되었다.



이 능은 남한지역에 남은 단 5기의 고려 왕릉■왕비능 중의 하나이며, 능묘 조성 당시에는 고려 후기의 왕실문제에 따른 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 등 각종 석조물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폐허화된 것을 경기도기념물 제4호로 지정하여 1974년 정화하였다.



사적369호인 이능은 양도면 길정리 진강산(鎭江山) 동쪽에 위치한 고려시대 희종왕능(熙宗王陵) 이다. 회종왕은 1204년부터 1211년까지 8년간 재위하던 중 최충헌(崔忠獻)의 횡포를 막기 위하여 모의하다가 실패하여 강화교동(喬桐)으로 유배 되었으며 1237년에 용유도(龍游島)애서 승하 하였다. 특히 희종 임금님은 손돌 뱃사공과 손돌목에 얽힌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 우리 강화도와는 인연이 깊은 왕이시다.







홍능(弘陵)



홍능(弘陵) 사적 22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고려 제 23 대 고종(高宗)능으로 강화읍 국화리 고려산 동남쪽 청소년 야영장 입구에 보존되어있다. 고종은 강종(康宗)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원덕태후 유씨이며 왕비는 제 21대 희종 임금의 딸 안혜(安惠)였다. 1232년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도로 천도하고 강화도를 요새화하여 39 년간 줄기차게 항전하였다. 특히 부처님의 도움으로 몽고병을 물리치고 온 국민의 정신적인 단합을 촉구하는 유명한 팔만대장경을 전란중에 강화도에서 만들어 냈다. 고종임금은 제일 오랫동안 재위하셨으며 강화도에서 난중에 승하하셨다.



소능(紹陵)



내가면 덕산(德山)초피봉 서록에 고려의 능소(陵所)가 있었다는데 필시 초피봉(椒皮峯)과 봉금산(鳳錦山) 그사이로 전하여 지고 있다.



그고개를 소능고개라부르니 후에 와전되어 수렁이고개로 불러왓다. 살피건데 희종왕비(熙宗王妃) 임씨(任氏)의 능소 일 것이다. 희종(熙宗)은 용유도(龍遊島) 법천장사(法天精舍)에서 승하하여 석능(碩陵)에 모시고 그후 10년만에 희종왕비께서 돌아가시니 강화 소능에 장사한 것이다. 근세에 이르러 호릿꾼이 글총하여 보물은 다 도난당한 것이며 그곳이 평지로 되었으니 알길이 없다.



선원면연리에 있는 고려 가왕능은 강화도로 천도한 고종(高宗)이 타계할 경우 이곳에 능묘를 설치코자 만든 것으로 길이 3m 높이 0.9m의 석실로 되어 있고 석등(石燈) 및 옥반(玉盤) 등을 배치했으나 오행설에 배치되었다 하여 그대로 남아있었다 한다. 1910년경에 도굴되어 유실되고 석실마저 매립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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