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백범(89)서윤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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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2-11 00:06 조회1,522회 댓글0건본문
3월 체육인물
서윤복 (1923 ~ )
1923년 1월 9일 서울생
육상인
학력
43 경성상업실천학교 졸업
49 고려대 제일전문부 졸업
57년 고려대 상과 상학사
경력
47년 미국 보스턴마라톤대회 우승
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 참가
54년 숭문중고 육상감독-서무과, 육상연맹 이사
57년 미국보스턴마라톤대회 한국선수단 감독
58년 아시아경기대회 한국선수단 육상감독
61년 서울운동장장
64년 제18회 동경올림픽 마라톤 코치
72년 육상연맹 전무이사
77년 육상마라톤강화위원회 부위원장
78년 대한체육회 이사
78년 육상연맹 부회장, 동양실업 판매감사, 한국마라톤후원회 상무이사
80년 마라톤 후원회 상무이사
80 - 90년 서울시체육회 이사
82년 서울국제마라톤 조직위 사무총장, 육상연맹 부회장
84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한국단장
86년 아시안게임 한국남자 감독
87년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한국단장
88년 서울올림픽 한국남자 감독, 한국육상진흥회 이사
93년 대한육상경기연맹 비상임 고문
상훈
헬름스체육상(1947), 대한민국 문화포장(1962), 대통령표창(1963), 체육회 공로상, 국민훈장동백장(1971),
녹조근정훈장(1977), 체육훈장거상장(1986), 서울시 문화상(1987)
1923년 1월 9일 서울시 은평구 용암동에서 출생한 그는 숭문중학과 경성상업실천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49년부터 60년까지 숭문중고등학교에서 육상감독으로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61년부터 77년까지는 서울운동장 장을 역임하였고, 1978년부터 현재까지 한국마라톤후원회 이사로 있다.
재학시부터 육상선수로 활약한 그는 1946년 5월 제1회 조선마라톤선수권대회에서 2시간 39분 30초, 동년 9월 제1회 전국육상선수권대회에서 2시간 43분 25초, 동년 10월 제27회 전국체육대회에서 2시간 391ㅜㄴ 40초로 우승하였다.
19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경기대회에 참가하였고, 제61회 보스톤마라톤대회 감독(1957), 제3회 아시아경기대회에 육상부 감독(1958)으로 참가하였고, 동경올림픽 육상부 감독(1964), 서울아시아경기대회 남자부 감독(1986), 서울올림픽경기대회 남자감독(1988)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 부회장, 대한체육회 이사, 전국체육대회위원회 위원장 등 각종 직책을 통하여 육상경기 및 스포츠발전을 위해 공헌하였다.
서훈으로는 대한체육회 경기공로상(1970), 국민훈장 동백장(1971), 녹조근정훈장(1977), 체육훈장 거상장(1986), 서울시 문화상(1987) 등이 있다.
서윤복
길가다 달리기를 하는 아이들만 봐도 절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 사람. 62년을 육상과 함께 동고동락해온 사람. 해방 후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세계에 우리나라를 알린 최초의 사람. 바로 서윤복이라는 이름 석자였다. 대한육상경기연맹 서윤복 고문에게는 집안 곳곳에 고이 간직한 육상 트로피며 메달을 무시로 매만지는 버릇이 있다.
서울 잠실동 진주아파트, 그의 집안은 온통 육상관련 물품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다. 이곳저곳 걸려 있는 선수시절 액자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서윤복 고문의 과거사들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운동장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는 서윤복.
서 고문이 육상에 문을 두드린 시기는 보통학교 5학년 때인 1936년 그이 나이 14세 때다. 이때는 손기정선수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던 해이기도하다. 그 당시는 육상부라는 것이 특별히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는 숭문중학교에 진학, 본격적인 육상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중.장거리를 선택한다.
그가 목표로 했던 것은 1940년 올림픽에서의 우승,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올림픽은 무산됐고 일순간에 그의 실망도 컸다. 그것도 잠시, 그는 세계 최고 선수가 되겠다는 각오로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렸다.
그러면서 해방은 이뤄졌고 조국의 산하는 태극기의 물결로 넘쳐 흘렀다. 1945년 10월 서울운동장. 축제의 분위기속에서 시작되어야 할 해방 경축 종합경기대회가 울음바다로 변해 버렷다.
당시 건국의 아버지 국부로 칭송받던 이승만 박사가 개회식에서 한 연설이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것이다.
“여러분! 조국을 위해 뛰어주십시오. 나는 해외각지를 전전하면서 나라를 찾아달라고 애원했지만 누구하나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먼 이국땅에서 가슴에 태극기를 품고 시련의 날들을 보냈지만 태극기 한번 펼쳐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나라를 찾았으니 가슴에 국혼을 품고 여러분들이 세계 각지에 휘날려 주십시오.”
당시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 당시는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기였습니다. 마라톤대회에 참석할 차편도 없었습니다. 보스톤에 갈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죠, 다행스럽게도 미 군용기를 얻어 타고 가까스로 보스톤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가 보스톤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하자 그 소식은 삽시간에 미국 전역에 퍼졌고 또한 동아일보에서도 대서특필 됐다.
“대회는 끝났지만 나는 조국으로 돌아올 마땅한 차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임영신여사의 도움으로 43일간 미국 생활을 끝내고 동남아와 일본을 거쳐 인천으로 들어오는 화물선을 얻어타고 출발 18일 만에 인천항에 도착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금석지감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요즘 선수들은 참 행복한 줄 알아야 해요.”
인천항은 그야말로 태극기의 물결과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이튿날 서울 중앙청에서의 환영식은 찬탁, 반탁의 소용돌이에 밀려 혼란스러웠고 급기야는 부산, 광주, 대구에서의 환영식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환영회가 있었다. 바로 서울 시민들의 환영식, 가가호호 30원씩 걷어 비원에서 환영회를 해줄 때였다. 비원으로 직접 나와 환영회를 주도한 이 박사는 “네가 해냈구나. 나는 몇 년 동안 독립운동을 했는데도 신문(동아일보)에 많이 나오지 못했는데 너는 2시간 25분 39초를 뛰고나 서 연일 신문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구나.” 라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서윤복 선수가 김구선생을 찾았을 때 그는 족패천하(발로 천하를 제패했다)라는 휘호를 써내려가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쁨도 잠시. 그에게는 지금도 잊지 못할 가슴 저린 아픔이 있다. 48년 런던올림픽에서의 저조한 성적이 그것이다. 1947년 보스톤 우승자가 1년도 채 안된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는 것이 무엇보다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 이후 1949년 봄 은퇴와 동시에 모교인 숭문중학교에 육상부를 설치, 지도자의 길을 걷는다. 그가 지도한 학생 중 송길윤은 그가 아끼는 제자였다.
송길윤은 제51회 보스턴마라톤대회에 나가 2위를 차지하며 한국의 위용을 전 세계에 알렸다.
마라톤 인생 서윤복, 마라톤은 그에게 있어 조국이었고, 삶 그 자체였다. 우승을 했으면서도 일장기를 가슴에 달아야만 했던 송기전 선수의 한을 서윤복은 풀어주고야 말았다. 아니 조국의 맺힌 한을 실타래 풀 듯 풀어주었던 것이다.
암울했던 일제 하에서도 불굴의 의지를 품고 달린 서윤복, 그가 이룩한 위업은 위축된 국민 모두의 가슴에 한없이 긍지를 심어준 일대 사건이었다.
이제 그 서윤복 선수가 75세라는 고령의 나이가 됐다. 지금도 선수라는 말을 더 듣고 싶어하는 영원한 마라토너 서윤복.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얘기는 개인의 대회 우승 얘기가 아닌 신화를 듣는 듯한 한편의 장대한 파노라마였다.
- 육상월드 발췌-
▣ 김윤만 - 선생님의 휘호 <족패천하> 지금도 전해지고 있을까요? 자못 궁금합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항용 - 감동의 이야기를 잘 읽었습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윤식 - 서윤복 선생은 참다운 체육인으로 자리 욕심 없이 검소하게 사셔서 체육계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령으로 쇠약해지셔서 거동은 거의 못 하시고, 때때로 사람도 잘 알아보지 못하시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서윤복 (1923 ~ )
1923년 1월 9일 서울생
육상인
학력
43 경성상업실천학교 졸업
49 고려대 제일전문부 졸업
57년 고려대 상과 상학사
경력
47년 미국 보스턴마라톤대회 우승
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 참가
54년 숭문중고 육상감독-서무과, 육상연맹 이사
57년 미국보스턴마라톤대회 한국선수단 감독
58년 아시아경기대회 한국선수단 육상감독
61년 서울운동장장
64년 제18회 동경올림픽 마라톤 코치
72년 육상연맹 전무이사
77년 육상마라톤강화위원회 부위원장
78년 대한체육회 이사
78년 육상연맹 부회장, 동양실업 판매감사, 한국마라톤후원회 상무이사
80년 마라톤 후원회 상무이사
80 - 90년 서울시체육회 이사
82년 서울국제마라톤 조직위 사무총장, 육상연맹 부회장
84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한국단장
86년 아시안게임 한국남자 감독
87년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한국단장
88년 서울올림픽 한국남자 감독, 한국육상진흥회 이사
93년 대한육상경기연맹 비상임 고문
상훈
헬름스체육상(1947), 대한민국 문화포장(1962), 대통령표창(1963), 체육회 공로상, 국민훈장동백장(1971),
녹조근정훈장(1977), 체육훈장거상장(1986), 서울시 문화상(1987)
1923년 1월 9일 서울시 은평구 용암동에서 출생한 그는 숭문중학과 경성상업실천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49년부터 60년까지 숭문중고등학교에서 육상감독으로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61년부터 77년까지는 서울운동장 장을 역임하였고, 1978년부터 현재까지 한국마라톤후원회 이사로 있다.
재학시부터 육상선수로 활약한 그는 1946년 5월 제1회 조선마라톤선수권대회에서 2시간 39분 30초, 동년 9월 제1회 전국육상선수권대회에서 2시간 43분 25초, 동년 10월 제27회 전국체육대회에서 2시간 391ㅜㄴ 40초로 우승하였다.
19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경기대회에 참가하였고, 제61회 보스톤마라톤대회 감독(1957), 제3회 아시아경기대회에 육상부 감독(1958)으로 참가하였고, 동경올림픽 육상부 감독(1964), 서울아시아경기대회 남자부 감독(1986), 서울올림픽경기대회 남자감독(1988)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 부회장, 대한체육회 이사, 전국체육대회위원회 위원장 등 각종 직책을 통하여 육상경기 및 스포츠발전을 위해 공헌하였다.
서훈으로는 대한체육회 경기공로상(1970), 국민훈장 동백장(1971), 녹조근정훈장(1977), 체육훈장 거상장(1986), 서울시 문화상(1987) 등이 있다.
서윤복
길가다 달리기를 하는 아이들만 봐도 절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 사람. 62년을 육상과 함께 동고동락해온 사람. 해방 후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세계에 우리나라를 알린 최초의 사람. 바로 서윤복이라는 이름 석자였다. 대한육상경기연맹 서윤복 고문에게는 집안 곳곳에 고이 간직한 육상 트로피며 메달을 무시로 매만지는 버릇이 있다.
서울 잠실동 진주아파트, 그의 집안은 온통 육상관련 물품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다. 이곳저곳 걸려 있는 선수시절 액자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서윤복 고문의 과거사들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운동장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는 서윤복.
서 고문이 육상에 문을 두드린 시기는 보통학교 5학년 때인 1936년 그이 나이 14세 때다. 이때는 손기정선수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던 해이기도하다. 그 당시는 육상부라는 것이 특별히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는 숭문중학교에 진학, 본격적인 육상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중.장거리를 선택한다.
그가 목표로 했던 것은 1940년 올림픽에서의 우승,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올림픽은 무산됐고 일순간에 그의 실망도 컸다. 그것도 잠시, 그는 세계 최고 선수가 되겠다는 각오로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렸다.
그러면서 해방은 이뤄졌고 조국의 산하는 태극기의 물결로 넘쳐 흘렀다. 1945년 10월 서울운동장. 축제의 분위기속에서 시작되어야 할 해방 경축 종합경기대회가 울음바다로 변해 버렷다.
당시 건국의 아버지 국부로 칭송받던 이승만 박사가 개회식에서 한 연설이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것이다.
“여러분! 조국을 위해 뛰어주십시오. 나는 해외각지를 전전하면서 나라를 찾아달라고 애원했지만 누구하나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먼 이국땅에서 가슴에 태극기를 품고 시련의 날들을 보냈지만 태극기 한번 펼쳐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나라를 찾았으니 가슴에 국혼을 품고 여러분들이 세계 각지에 휘날려 주십시오.”
당시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 당시는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기였습니다. 마라톤대회에 참석할 차편도 없었습니다. 보스톤에 갈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죠, 다행스럽게도 미 군용기를 얻어 타고 가까스로 보스톤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가 보스톤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하자 그 소식은 삽시간에 미국 전역에 퍼졌고 또한 동아일보에서도 대서특필 됐다.
“대회는 끝났지만 나는 조국으로 돌아올 마땅한 차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임영신여사의 도움으로 43일간 미국 생활을 끝내고 동남아와 일본을 거쳐 인천으로 들어오는 화물선을 얻어타고 출발 18일 만에 인천항에 도착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금석지감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요즘 선수들은 참 행복한 줄 알아야 해요.”
인천항은 그야말로 태극기의 물결과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이튿날 서울 중앙청에서의 환영식은 찬탁, 반탁의 소용돌이에 밀려 혼란스러웠고 급기야는 부산, 광주, 대구에서의 환영식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환영회가 있었다. 바로 서울 시민들의 환영식, 가가호호 30원씩 걷어 비원에서 환영회를 해줄 때였다. 비원으로 직접 나와 환영회를 주도한 이 박사는 “네가 해냈구나. 나는 몇 년 동안 독립운동을 했는데도 신문(동아일보)에 많이 나오지 못했는데 너는 2시간 25분 39초를 뛰고나 서 연일 신문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구나.” 라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서윤복 선수가 김구선생을 찾았을 때 그는 족패천하(발로 천하를 제패했다)라는 휘호를 써내려가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쁨도 잠시. 그에게는 지금도 잊지 못할 가슴 저린 아픔이 있다. 48년 런던올림픽에서의 저조한 성적이 그것이다. 1947년 보스톤 우승자가 1년도 채 안된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는 것이 무엇보다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 이후 1949년 봄 은퇴와 동시에 모교인 숭문중학교에 육상부를 설치, 지도자의 길을 걷는다. 그가 지도한 학생 중 송길윤은 그가 아끼는 제자였다.
송길윤은 제51회 보스턴마라톤대회에 나가 2위를 차지하며 한국의 위용을 전 세계에 알렸다.
마라톤 인생 서윤복, 마라톤은 그에게 있어 조국이었고, 삶 그 자체였다. 우승을 했으면서도 일장기를 가슴에 달아야만 했던 송기전 선수의 한을 서윤복은 풀어주고야 말았다. 아니 조국의 맺힌 한을 실타래 풀 듯 풀어주었던 것이다.
암울했던 일제 하에서도 불굴의 의지를 품고 달린 서윤복, 그가 이룩한 위업은 위축된 국민 모두의 가슴에 한없이 긍지를 심어준 일대 사건이었다.
이제 그 서윤복 선수가 75세라는 고령의 나이가 됐다. 지금도 선수라는 말을 더 듣고 싶어하는 영원한 마라토너 서윤복.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얘기는 개인의 대회 우승 얘기가 아닌 신화를 듣는 듯한 한편의 장대한 파노라마였다.
- 육상월드 발췌-
▣ 김윤만 - 선생님의 휘호 <족패천하> 지금도 전해지고 있을까요? 자못 궁금합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항용 - 감동의 이야기를 잘 읽었습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윤식 - 서윤복 선생은 참다운 체육인으로 자리 욕심 없이 검소하게 사셔서 체육계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령으로 쇠약해지셔서 거동은 거의 못 하시고, 때때로 사람도 잘 알아보지 못하시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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