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김익정·김사준 쌍효자문(전서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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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3-02-12 09:08 조회1,416회 댓글0건본문
전에 게시판에 올랐던 자료입니다.
사진이 검색되었기에 다시 올립니다.
효자 김익정·김사준 쌍효자문(전서공파)
지정번호 향토유적 제16호
위 치 충남 연기군 전의면 양곡리 285
시 대 조선시대
설 명
이 정려는 효자 안동김씨 김익정과 그의 현손인 효자 김사준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김익정은 부모의 시묘살이를 각각 3년씩 행한 효자로 죽은지 20여년 후인 세조조에 명정을 받았으며, 김사준은 부친이 부스럼으로 고생할 때 연근을 구해드려 병을 낫게한 효자로 죽은 뒤 25여년 후인 명정조에 명정을 받았다. 그는 평생을 효행과 교육에만 전념하다가 1520년 81세의 장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디지탈 한국학
김익정(金益精){1}
?∼1436(세종 1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비(子斐). 아버지는 한성윤 휴(休).
1396년(태조 5) 식년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문하부의 요직을 지냈고, 1409년(태종 9) 장령이 되었다. 이해에 쇄권색(刷卷色)을 설치하자, 그 별감이 되었다.
그뒤 헌납·예문관직제학·승정원우대언을 역임하고, 세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나가 충청·전라·경기의 삼도 감사를 지냈다. 내직으로 돌아와서 1422년 승정원지신사가 되어 군정(軍政)의 확립을 건의하였으며, 1425년 대사헌에 올랐다.
1430년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었으며, 이듬해 인순부윤(仁順府尹)과 경창부윤(慶昌府尹)을 거쳐 이조참판·예조참판·형조참판을 지내고, 이조좌참판이 되었다.
1435년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죽었다. 근검하고 사치를 몰랐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은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영윤 -
▣ 김윤만 - 쌍효자문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잘 단장되어 있네요. 감사합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전서공파 자료가 올라오니 무척 반갑습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요즘 제가 너무 바쁜생활을 하는가 봅니다.
▣ 김태서 -
▣ 김항용 - 감사합니다. 홈에 올립니다.
사진이 검색되었기에 다시 올립니다.
효자 김익정·김사준 쌍효자문(전서공파)
지정번호 향토유적 제16호
위 치 충남 연기군 전의면 양곡리 285
시 대 조선시대
설 명
이 정려는 효자 안동김씨 김익정과 그의 현손인 효자 김사준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김익정은 부모의 시묘살이를 각각 3년씩 행한 효자로 죽은지 20여년 후인 세조조에 명정을 받았으며, 김사준은 부친이 부스럼으로 고생할 때 연근을 구해드려 병을 낫게한 효자로 죽은 뒤 25여년 후인 명정조에 명정을 받았다. 그는 평생을 효행과 교육에만 전념하다가 1520년 81세의 장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디지탈 한국학
김익정(金益精){1}
?∼1436(세종 1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비(子斐). 아버지는 한성윤 휴(休).
1396년(태조 5) 식년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문하부의 요직을 지냈고, 1409년(태종 9) 장령이 되었다. 이해에 쇄권색(刷卷色)을 설치하자, 그 별감이 되었다.
그뒤 헌납·예문관직제학·승정원우대언을 역임하고, 세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나가 충청·전라·경기의 삼도 감사를 지냈다. 내직으로 돌아와서 1422년 승정원지신사가 되어 군정(軍政)의 확립을 건의하였으며, 1425년 대사헌에 올랐다.
1430년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었으며, 이듬해 인순부윤(仁順府尹)과 경창부윤(慶昌府尹)을 거쳐 이조참판·예조참판·형조참판을 지내고, 이조좌참판이 되었다.
1435년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죽었다. 근검하고 사치를 몰랐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은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영윤 -
▣ 김윤만 - 쌍효자문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잘 단장되어 있네요. 감사합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전서공파 자료가 올라오니 무척 반갑습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요즘 제가 너무 바쁜생활을 하는가 봅니다.
▣ 김태서 -
▣ 김항용 - 감사합니다. 홈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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