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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의 효자정과 김구 선생의 奇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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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3-02-13 05:42 조회1,5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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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우물과 약천.(p62)



--효자정(孝子井) : 소재 - 선원면 선행리. 후산(後山)에 있으니 효자(孝子)김창구( 金昌九가 애용하던



감천(甘泉)이다.





◎ 김구(金九) 선생의 기우(奇偶).(pp422-423)



--김구 선생은 고종 33년(1896) 3월에 민비(閔妃)를 시해한 보복으로 변복에 변성명을 하고 한국인을 괴



롭히고 있는 일본인 쓰지다(土田讓亮) 육군 중위를 살해하고 그해 5월 11일 체포되어 해주 감옥에 수감되



었다가 7월 25일 인천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런데 당시 강화에는 큰 인물 둘이 있었는데 양반에는 이건창



(李建昌)이고, 호협객으로 김주경(金周卿)이라 하였다. 김주경은 자를 경득(庚得, 일명 命泰)이라 하고



강화 평민의 자손이었다.



--병인양요 뒤에 대원군이 강화에 3천명의 무사를 양성하고 있을 때에 군향고(軍餉庫) 직이를 하였는데



그의 성격이 호방하여 투전에 명수였으며 투전으로 얻은 돈으로 강화 인천의 관리를 매수하는 한편 용맹



있는 불량배를 장악하고 있어 강화유수도 건들이지 못하였다.



--대원군이 이런 말을 듣고 김경득에게 군향고 직이라는 중임을 맡긴 것이다. 김경득은 감옥에 있는 김구



(金九)를 구출하려고 가산을 탕진해 가며 법부대신(法部大臣) 한규설(韓圭卨)을 찾아가 교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해적이 되려고 관용선(官用船)을 탈취 도망하려다 강화군수의 염탐으로 발각되자 중도에서



군수를 만나 실컷 두들겨 주고 소련 해삼위 방면으로 떠난다고 하고 종적을 감추었다. 김구 선생은 면회



하러온 그의 어머니에게 돈과 작은 창을 들여오도록 하여 옥사정을 매수하고 창으로 땅을 파서 1898년 3월



9일 죄수 4명을 탈옥시키고 유유히 옥문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김구는 옥살이 때의 동료를



찾고 또는 일경을 피하여 전국을 배회하다가 불도를 읽여 한 때는 시승(詩僧) 원종(圓宗)이라는 불명까지



가졌었다. 1900년 봄 김두례라고 변명하고 강화읍 남문안에 산다는 김주경(庚得)을 찾았으나 김경득은 3년



전에 이미 집을 떠나 소식조차 없다하면서 그의 셋째 아우 김진경이 따뜻하게 환대하여 그 집에서 쉬면서



아동 30명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훈학한지 3개월 안에 혁명의식에 동조하는 류인무(柳仁茂)에 의해



서울로 갔다가 충청도로 다시 전라도 무주로 갔다가 강화 버드라지 장곶(長串) 주윤호(朱潤鎬) 집에서 대접



을 받고 백동전 4천량을 얻어 전대에 넣어서 몸에 둘러감고 서울로 향하여 강화를 떠났다.(白凡逸志)





▣ 출전 : 증보 강화사/증보강화사편찬위원회/1983 ▣





▣ 김주회 - 윤만형님! 잘 보았습니다. 선원면 선행리 후산의 효자정! 기억하겠습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요즘 제가 너무 바쁜생활을 하는가 봅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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