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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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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3-02-15 07:04 조회1,5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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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성제단(廣城祭壇)





--신미양요(辛未洋擾) 때에 어재연(魚在淵) 중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魚在淳)이 동시에 순절한 군사를



제사지내는 단이다. 1872년 유수 김선필(金善弼)이 단을 모으고 순절한 날인 음 4월24일에 제사하며 비석을



세워 기념했다. 전망무사(戰亡武士)는 59위에 이른다. 이곳을 정화하고 기념비를 세웠는데 그 비문은 아래와



같다.



<강화 전적지 정화 기념비>



--강화는 한강 어귀에 있어 사면에 물이 둘리고 섬안에는 산악이 중첩하여 천연적인 요새라, 역대를 통하여



전란 때에는 피난처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 병화를 입어 편안한 날이 없었기에 이 언덕 저 갯가 풀 한포기



돌 한덩이에 역사의 사연이 서리고 미치지 않은 것이 없다. 고조선 이래로 조상들의 한 많은 유적중에서도



굳이 민족의 피가 어린 전적지를 헤아려 보면 칠백년 풍우가 스쳐간 고려 때 궁궐 옛터 고종 19년 서기



1232년 몽고의 침략으로 수도를 송도로 부터 강화로 옮겨 강도라 일컫고 원종 11년 서기 1270년 환도해



가기까지 무릇 39년동안 항몽의 근거지가 되었었고 문화의 샘터였기에 우리는 여기를 잊지 못한다.



강화성은 이곳에 천도했던 고려의 도성이었고 중성을 쌓은 뒤 해안선 따라 외성을 쌓았으나 인조 14년 서기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이 성을 지키지 못해 온갖 치욕을 맛보았었고 다시 그 뒤 고종 3년 병인 서기



1866년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갑곶진에 상륙을 개시하고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여 약탈을 자행하다



양헌수 장군이 지휘하는 정족산성의 전투에서 산포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퇴각했던 것이다. 5년이 지나



고종 8년 신미 서기 1871년 미국의 아세아함대가 통상을 표방하고 침입하여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등을



차례로 공격해 오자 우리는 최후까지 응전했으나 무력불급으로 어재연 장군 등 수백명 용사들이 순국했었다.



4년 지나 고종 12년 을해 서기 1875년 일본 군함 운양호가 초지진 포대를 공격한 뒤 이듬해 병자년에 이른바



강화도조약을 맺었으며 그로 인하여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었던 것이니 강화도야말로 민족 시련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이 유서깊은 역사적 옛터에 세월이 흘러 성곽은 흩어지고 집터에는 잡초만이 우거졌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강화의 전적지를 돌아보시고 여기는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호국의 기상을 이어받는



국민교육의 정신적 도장이 될 곳이라 정성들여 복원 정화하라는 분부를 내리시므로 그 뜻을 받들어 문화



공보부가 이 일을 마치니 이곳을 찾는 이들은 누구나 발길을 멈추고서 가슴에 국난 극복의 결의를 다짐하게



될 것이다.



---------------------------------------------------------1977년 월 일



--------------------------------------------------------이은상 짓고 김충현 쓰다.



<출전 : 증보 강화사/증보강화사편찬위원회/1983. pp823-824>





▣ 광성보(廣城堡)



--(전략)--필자는 지금 그 6월에 그 푸른 산 푸른 계곡 상록수 속에 그 때의 초가집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한미소전쟁(韓美小戰爭)의 고전장(古戰場)을 찾아간다. 이정표를 따라 곱게 포장된 아스팔트길을 달리니,



오른쪽으로 커다란 저수지같은 바다와 접할 수 있었다. 구불구불 제법 높은 구릉을 몇개 돌고 보니 멀리



높은 둔덕 위에 깨끗하게 바다와 접한 광성보(廣城堡)가 눈에 들어 온다.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성책(城柵)과 문루가 파괴된 후 폐허가 된 것을 1977년 광성돈(廣城墩), 안해루



(按海樓), 손돌목돈과 신미양요 때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어재연(魚在淵) 장군의 쌍충비각(雙忠碑閣),



순국 무명용사비가 모두 보수 정화되어 있었다.



--(중략)--



--초가집에 살고 싶다던 딜톤 대위의 두 번째 편지 귀절을 생각하며 필자는 포대의 연맥을 따라 산정에



오른다.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이며 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비 등이 있기 때문이다.



--그 아래 말끔이 다듬어진 무명 전망무사(戰亡武士)의 무덤인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 깨끗하게 단장



되어 있었다. 아마 펄밭에서 자결한 병사나 포대에서 타 죽은 병사들을 이곳에 옮겨 매장했던 것을 역시



1977년 강화 전사유적(戰史遺積)을 보수하면서 담을 두르고 정성들여 정화해 놓은 것이다. 무심히 지날



곳이 아니라 고개 숙여 경건한 참배를 드린다. 누군가가 꽃을 꽂아 놓았는지 상석 앞의 한 줌 나리 꽃이



시들시들했다. 누가 이름없는 이 전망무사들 무덤에 꽃을 꽂았을까 하여 내려오는 길에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서울 산다는 미국 소녀 몇이 꽂고 갔다는 것이었다.



--서울에 있는 미국인 학교에서는 반드시 이 고전장에 수학여행 오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한국에 사는 미국인들이나 여행자는 반드시 이곳을 찾아보고 그들 조상을 추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필자는 그들의 체질화된 내셔널리즘에 숙연해짐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적이었던 이 전망



무사의 무덤에 꽃을 바치는 예쁘디 예쁜 박애주의에 나도 몰래 미소를 짓는다.



--필자는 올라갔던 길을 되돌아오며 주말을 이용, 이 고전장을 찾아오는 미국인 가족을 스칠 때마다 그들의



부러운 내셔널리즘에 고개를 숙였다.



<출전 : 이규태 역사산책/이규태/신태양사/1987 pp142-146>





▣ 광성보(廣城堡)



--광성보(廣城堡)는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해안에 소재하고 있으며, 강화해협과 김포와 마주보고 있다.



고려시대의 성을 1618년(조선 광해군 10년)에 외성을 보수하고 1656년 광성보를 설치했다.--(중략)--



-- 신미양요 때 성책(城柵)과 문루가 파괴된 후 폐허가 된 것을 1977년 광성돈(廣城墩), 안해루(按海樓),



용두돈(龍頭墩)과 51명의 무명용사의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어재연(魚在淵) 장군 형제의 쌍충비각(雙



忠碑閣)들이 보수 정화되었다.--(후략)--



<출전 : 증보 강화사/증보강화사편찬위원회/1983. pp812-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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