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地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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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09-26 05:56 조회3,466회 댓글0건본문
지난 9월 22일 토요일에는 2시에 퇴근해서 처와 자식놈들을 데리고 姓地순례를 다녀왔습
니다. 姓氏의 유허지, 세거지 등을 찾아본다는 뜻에서 "姓地순례" 라 이름붙여 보았습니
다.
▣ 청원군 강내면 궁현리
청주시내에서 출발해서 충북대학교 뒷길로 조치원 방향으로 달려서 청원군 강내면 궁현리를 보려고 하다가 지나쳤습니다. 시골도로를 달리다보니 드문드문 마을마다 입구에는 느티나무 고목이 서 있고 그 아래에는 헌 장판을 깔아놓은 평상이 있고, 마을 어른들이 고스톱도 치고 대화를 나누는 정겨운 장면이 스쳐 지나갑니다. 지나친 궁현리에는 독립유공자인 (익원공파) 金在衡(김재형, 1890-1966)의 기적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청원의인풍 (1991.2., 청주문화원)>
金在衡 紀蹟碑
독립유공자 김재형(1890-1966)의 기적비는 1984년 청원군 강내면 궁현리에 세웠으며 비문은 청주대학교 총장 金明會가 짓고 글씨는 趙壽衡이 썼다.
★고조(불화변)桓(환)- 증조 胤正(윤정)- 조 大欽(대흠)- 고 元默(원묵)
★김명회 : 익원공파
▣ 연기군 동면 내판리
조치원 방향으로 계속 가다보면 시내 못미쳐 좌회전 방향으로 동면, 내판리 이정표가 보입니다. 좌회전에서 계속 달리면 동면 소재지인 내판리가 나오고,
동면 소재지를 지나 조금 더 가면 좌회전 쪽으로 내판리2,3,4,5구 이정표가 나오고, 좌회전 해서 들어가면 연동중학교가 시원스럽게 위치하고 있습니다. 학교정문 입구에 김재붕 현종께서 지은 학교설립기념비가 있는데 학교설립에 공헌한 분들 이름중에 김재붕, 김재덕, 김서회, 김창회가 보입니다. 이곳 내판리는 연기군지에 보면 안동김씨가 많이 살고 있는 마을입니다.
다시 되돌아 나와서 동면 소재지를 막 벗어나는 지점에 안동김씨 김백열 효자문이 있습니다. 김백열이라는 분이 구안동인지, 신안동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대종회보 제55호, 1997년 1월>
在鵬씨 충청남도 문화상 수상
95년도에는 연기군민대상 수상
안렴사공 19대손인 在鵬씨께서는 지난 1996년도 충청남도 문화상 수상자 선정에서 학술부문에 선정되어 1996년 12월 2일 충남도청 대회의실에서 수상식을 가졌는데 많은 유명인사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제40회충청남도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또 96년 12월 7일에는 서울신문사에서 주최하고 문화체육부에서 후원한 향토문화대상 전통문화 부문에 선정되어 수상하였으며, 95년도에는 지역문화 창달에 기여한 공이 커 연기군민대상을 받은 사실도 있다. 이 분의 약력과 공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약력
1922년 8월 9일생
1943년 3월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
1945년 11월 조치원 공립고등여학교 교사
1947년 4월 대전공립공업중학교 교사
1989년 9월 ∼현재 충청남도 문화재 전문위원
1990년 3월 ∼현재 연기군 향토유적보호위원회 위원
1993년 1월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공적개요
30여 년간을 향리에 묻혀 오직 민족사와 향토사 연구에 전념하여 오면서 광개토대왕의 비문연구 및 신라, 고구려, 일본에 끼친 백제사 연구와 연기향토사 연구논문 등 40여편을 발표하여 민족사관의 주체성 확립과 향토사 정립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으며,
노령에도 불구하고 충남도 문화재 전문위원, 연기군 향토사 연구소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으로 재직하면서 왕성한 연구활동으로 후학의 귀감이 됨
<연기군청 홈페이지 (http://gun.yeongi.chungnam.kr/)>
김백열 효자문
소재지: 연기군 동면 내판리
시대: 조선시대
안동인.자는 여행이며 동면 내판리에서 태어났다. 5살의 어린 나이에 부친이 병이들어 자리에 눕자 지성으로 간호하던중 하루는 꿈에 신인이 나타나 곶감이 부친의 병에 특효가 있다고 알려주자 다음날 이를 구하여 드리니 차도가 있어 몇일만에 병이 나았다 한다.
이 소문이 세상에 알려지자 하늘에서 낸 효자라하여 고종27년 (1890)에 동몽교관 조봉대부의 벼슬과 정려를 내렸다 한다. 이정려는 동면 내판리 하리에 있다.
▣ 연기군 서면 국촌리
조치원 시내에 들어와서 공주방면으로 달리다가 군부대 앞에서 우회전해서 들어가면 연기군 서면 국촌리에 닿게 되는데 이곳에 김방경 장군의 둘째아들 김흔장군의 연기대첩을 기리는 [김흔장군연기대첩사적비]가 도로가에 우뚝 서 있습니다. 사적비 내용은 [김흔장군과 연기대첩] 으로 본 게시판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전의면 양곡리
다시 조치원으로 나와서 조치원 외곽을 끼고 조치원-천안간 도로를 시원스럽게 달렸습니다. 내리쬐는 따가운 가을햇살을 피하려 선글라스를 끼고 보니 시원스런 도로의 흑백 윤곽이 마치 물감을 금방 칠한 듯 원색물결입니다. 97년도에 북유럽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선그라스를 끼고 바라보던 풍경과 흡사하여 순간적으로 외국여행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전의면 양곡리를 지나쳐서 소정면소재지인 소정리에 도착해서 면사무소에 들어가 나무그늘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지나친 전동면 미곡리에는 전서공파 묘역이 있는데 묘역 맨 위에 장령공 金玖(김구)의 단이 있고, 그 아래로 주욱 내려오면서 전서공 김성목, 학당 김휴의 묘소가 널찍하게 자리하고 있고 김휴의 묘 옆에는 [고려검교 김휴사적비]가 있습니다. 묘역 아래쪽에는 후손들의 공적비 (김태일, 김재욱, 김재산, 김태정) 들이 도열해 있고. 마을 초입에는 오래되어 많이 마모된 듯한 김휴 유허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의면 양곡리에는 김익정,김사준 쌍효자문이 있습니다.
*방경- (1/5)선- (2/4)승용- (2/2)장령공 구- (1/2)전서공 성목- 학당 김휴- 김익정,김익렴
<연기군청 홈페이지 (http://gun.yeongi.chungnam.kr/)>
김휴 유허비
소 재 지 :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시 대 : 고려시대
안동인으로 자는 연부 정몽주 선생의 문하생이며 고려 공민왕때 검역 근시라는 벼슬 자리에 올랐다.
이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를때 호군의 명을 받았으나 연로한 아버지 (고려 공조판서를 지낸바 있는 감성목)을 모시기 위하여 직을 사양하고 송도에서 여러 신하들과 통곡으로 작별하고 현재의 연기군 전의면 운주산 아래 거처할 장소를 구하여 은거하였다.
태조는 다시 가선검교 한성좌윤 이라는 벼슬을 내려 그를 불렀으나 그는 끝내 나가지 않이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더욱 닦아 후세 양성에 전력 하였으며 그의 문하생 중에서 충효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니 그의 덕망과 지조가 훌륭하다 하여 유림명인들이 유허비를 세웠는데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에 있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그가 은거하고 있던 전동면 미곡리를 그의 호를 따라 학당리라 일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학당(學堂)골 김휴(金休)
본(本)이 안동(安東)으로 서기 1350년(고려충정2)고향에서 출생했다. 정몽주(鄭夢周) 선생의 문하생(門下生)으로 고려 공민왕땐 검교근시(檢校近侍)라는 벼슬에 있었고 고려가 실가되자 이태조 등국시 호군(護軍)에 명을 받았으나 연로하신 아버지(고려공조전서 성목:成牧)을 모 시고자 송도(松都)에서 여러 신하들과 통곡으로 작별하고 오늘의 전의(全義)운주산 아래 병 거지(屛居地)를 정하여 은거하자 태조가 하선검교 한성좌운(漢城左尹)이라는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그는 끝내 나가지 않았다.
그는 초야(草野)에 묻혀 있으면서 학문을 더욱 빛나게 닦아 그의 문하생으로 충효자를 많이 배출하였으니 그의 덕망과 지조가 훌륭하다 하여 유림명인(儒林名人)들이 유허비를 세웠고 운주산 아래서 살았으니 지금의 전동면 미곡리를 그의 호(號)를 따라 학당리(學堂里)라 일 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참고문헌 : 碑文, 族譜
김익정.김사준 쌍효자문
소재지 : 연기군 전의면 양곡리
시 대 : 조선시대
김익정은 이태조 5년(1396)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삼사를 역임하시고 사헌부대사헌에 재직중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부모의 상을 3년씩 6년간을 시묘하였다.
그후 태종의 부르심을 받고 다시 정사에 진출 이조참판으로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국민훈학강학을 독려하여 민족중흥을 진작하였으며 공은 또한 천성이 겸손하였고 학문이 탁월하고 덕행이 후덕하여 세인들이 충효명문이라 순배하였으며 세조조에 정려를 명받았다.
충신명문이 충신을 낳는다고 공의 손자인 수령은 대제학을 역임하였고 성종조에 좌이공신으로 복창군까지 봉하였으며 호는 문도공 이다. 또한 김사준은 총명예지하여 효행과 유덕을 닦았다.
부친의병에 연근이 특효라하여 엄동설한에 얼음을 깨어 하루같이 드리니 효험이 있어 병이 나을때까지 복용시켜 주었으며 부친이 75세의 장수를 누리었다.명종조에 효자로 정려를 명하였다.(참고문헌 : 정려기)
▣ 연기군 소정면 소정리
소정면 소정리는 70년대 후반기와 80년대 전반기에 우리나라 경제정책의 기본틀을 세우고 80년대 후반기의 [단군이래 최대의 경제호황]이라는 경제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고 1983년 미얀마 아웅산에서 순국한 전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 (안렴사공파) 金在益 박사의 고향입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金在益
1938-1983 경제학자 경제관료. 서울출생. 1960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을 졸업하고 1962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한 다음 1968년까지 미국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고, 다시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1973년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74년까지 한국은행 조사역,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강사 등을 거친뒤 경제기획원 비서실장을 시작으로 한국경제의 근간을 다루는 경제기획원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75년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관, 1976년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1980년 경제기획원 경제협력차관보 등을 역임하였다.
제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되어 한국경제의 성장과 안정은 저금리 저물가정책을 기조로 하여야 한다는 평소 그의 경제관을 경제정책에 반영하였으며 그의 경제정책은 이후 계속 한국경제계획의 기저가 되었다.
대통령 전두환의 미얀마예방을 수행하였다가 1983년 10월 9일 아웅산사태로 순직하였다. <朴相哲>
<시대의 선각자, 김재익>
고 김재익 박사의 부인인 이순자 교수가 엮은 [시대의선각자 김재익] (1998, 운송출판사) 라는 책자에 기록되어 있는 가족관련 기록을 발췌하여 보았습니다.
1938년 11월 26일 서울에서 부친 金應默과 모친 姜炳周 사이에서 9남매의 막내로 출생
그는 충남 연기군 전의읍 소정리 소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6.25는 그의 가정에 치명타를 입힌다. 아버지를 잃게 되고 형제들은 풍지박산된다. 서울대에서 강의를 하던 형과 당시에 대학에 다녔던 두 형들 모두 행방불명이 된다. 6.25는 모든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김재익의 가정에 유달리 가혹한 시련을 안겨 주었다.
서울로 이사와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산다. 그래도 그는 밝고 명랑하고 구김살 없이 소년시절을 보낸다. 종교적으로는 독실한 가톨릭 가정이었다. 그의 누님 두 분이 수녀였다. 큰 누님 김재순은 수녀로서 성심여대 총장을 지냈고, 둘째 누님 김재숙은 성심수녀원 원장을 지냈다. 독실한 천주교인어어서 그랬는지 그는 성직자의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그가 얼마나 뛰어났으면 스탠포드대학에서 후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세미나 룸 하나를 김재익 룸으로 명명하였겠는가.
전 대통령은 김재익의 사람됨이나 경제이론 면에서 나라의 보배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문상차 미망인 李淳子 여사를 만났을 때 국보적 존재를 잃었다고 하면서 애도의 정을 표시하였다.
홀어머니 밑에 9남매 막내료
김재익은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60년 봄 당시 취직시험으론 가장 어렵다던 한국은행 공채시험에 당당 수석합격한다.
성장시절의 그후의 생애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김재익은 1938년 11월 26일 충남 연기군 전의면에서 부친 안동김씨 金應默과 모친 姜炳周와의 사이에 6남 3녀중 막내로 출생한다. 부친은 김재익의 어린 시절에 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서울로 이사온 김재익 형제들은 홀어머니의 양육을 받으며 어렵게 살았다. 가난 속에서도 김재익은 구김살 없이 밝은 웃음을 일ㅈ지 않으며 성장했다. 서울 삼청국민학교와 경기중고를 다닐 때 늘상 모범생이었다.
김재익은 한국은행에 재직중인 62년 봄 혜화동 성당에서 李淳子씨와 결혼, 그뒤 韓會(63년생), 承會(71년생) 등 두 아들을 두었다.
이에 따라 김재익은 스탠포드로 옯겨가 본격적인 학구생활에 들어갔다. 부인 이순자도 하와이대에서 취득한 도서관학 석사학위를 인정받아 스탠포드대 도서관에 취직했다.
▣ 천안 삼거리공원
천안 삼거리 공원에 들렸는데 그곳에 있는 [2·9의거 기념비]에 의거에 참여한 분들 이름중에 金敏應이라고 있는데 應자항렬 제학공파인 듯 합니다.
▣ 목천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 전시관을 둘러보다 보면 [김이언,김구 의병진의 활동지역(평북 초산군)], [김구 서명 태극기], [광남군이광악선무공신교서-김시민 휘자], 익원공 김사형이 만든 [혼리강리역대국도지도]이 있고, 외곽 순환로를 돌다보면 [김구 어록비]와 [김시민 어록비]를 볼 수 있습니다.
<천안시청 홈페이지 (http://city.chonan.chungnam.kr/)>
광남군이광악선무공신교서
[보물 제952호]
[소재지] 천안시 목천면 남화리 230
[수 량]1책
[규 모] 41x22.3,34x22.3cm
[개 요] 임진왜란때 큰공을 세운 이들에게 내려진 훈호는 선무, 호성 두가지로 나뉘고 있는데 선무공신은 원병과 양곡을 요청하러 명에 왕래한 사신이고 서울에서 의주까지 왕을 시종 수행하며 공을 세운 사람은 호성공신으로 책봉하였다. 이 교서는 선조37년(1604) 10월에 내린 것이다.
이광악(1557-1608)은 선조17년(1584)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동 25년에 곤양군수가 되었다. 이때 왜란이 일어나자 선봉에 나서 왜군과 싸웠고, 진주성이 포위되자 목사 김시민을 도와 진주성을 방어하였고, 김시민이 전사한 뒤에는 여러 장수를 독려하여 진주대첩에 큰 공을 세웠다.
▣ 병천면 가전리
병천 방향으로 달리다가 병천 4km 못미쳐에서 [김시민장군 유적]이라는 문화재안내판이 보이고 우회전하여 조용한 시골길을 달려 김시민 장군의 사사처와 김시민장군 유적지 안내판이 있는 가전리 잣밭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내일 추모행사가 열린다는 대형 현수막과 넓은 터에 천막이 세워져 있습니다.
마을 뒷산으로는 제학공파 묘역이 있는데 맨 위에 壽亨(수형)의 묘가 위치하고 있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안동김씨세천비] 가 있다.
가전리 마을 입구를 벗어나 조금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백전천 도정교를 건너 도정산 쪽으로 올라가면 [정경부인창평이씨사적], [좌찬성상락군김공충갑유적비], 재실인 도정강사가 이어져 있고 맨 위에 도정사가 있는데 이곳에 김영돈, 김진, 김익달의 설단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 김시민 장군과 관련해서는 김시민 장군 홈페이지 (http://www.kimsimin.or.kr/)와 KBS역사스페셜(http://www.kbs.co.kr/history/review.htm) "99.3.13 진주대첩"을 보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천안시청 홈페이지>
가전리
목천군 근동면 지역인데 1895년 지방행정 편제 때 갈전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
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상백전리, 하백전리, 용연리, 가암리, 서원리 일부를 병
합하여 가암리의 가자와 백전리의 전자를 따서 가전리라 하고 갈전면에 편입되었
다. 1942년 갈전면이 병천면으로 명칭이 바뀌어 지므로 병천면 가전리가 되었
다.
거북바위 : 구암(龜岩), 잣밭 앞에 있는 바위. 큰 바위가 둘이 겹쳐서 거북이 모
양으로 서 있고,그 옆에 수백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데 바이 동쪽에 김씨
세거(金氏世居), 북쪽에 백전동천(栢田洞天)이라 새겼다.
명종때 명신 김충갑(金忠甲)이 그의 장인 이성춘(李成春)의 재산을 이어
받아 이 마을에 살면서 그호를 구암(龜岩)이라 하였다.
느티나무 : 거북바위 옆에 있는 큰 느티나무.
(전설) : 큰 느티나무 아래에 전에는 큰 못이 있었는데 이무기가 살면서 이근처
의 짐승들을 많이 해치므로 김충갑의 아들 충무공 김시민이 아홉 살 때
동네 아이들을 시켜 느티나무에 오르게 하고, 이무기가 아이들의 그림자
를 보고 물 가운데에서 머리를 들고 아이들을 향하여 올라 오는 것을 활
로 쏘아 서른 세발을 맞추어 죽였는데 그 피가 십여일이나 붉게 흘러 나
왔다고 한다. 이런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후손인 김재홍씨가 사사처란
비를 세워 놓았다.
강당산 : 돌모루 앞에 있는 산. 그 밑에 도정강사(挑汀講舍)가 있었다.
강당골 : 창평 이씨 묘와 제학공의 제단이 있는데 창평이씨는 충무공 김시민의
외조부이며 제학공은 안동 김씨의 중시조이다.
이 자리가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이며 명나라 명사 두사총(杜師聰)이 소
점인데 말이 물을 마시는 형이라 하며 은(銀) 세말을 폐백으로 주었다고
전하여 온다.
충열사터(忠烈祠터) : 가전리 249번지 돌모루에 있는 충열사터.
정랑 조명, 충무공 김시민, 죽계 김계종을 배향했는데 고종 5년 1864년
폐지되었다.
▣ 병천 아우내장터
병천소재지에 들어와 아우내 순대 집에 저녁을 시켜 놓고 아우내 장터 구경을 하는데
장터 네거리에 세워져 있는 김남응(應자항렬 제학공파인 듯) 짓고 김진상이 쓴 [아우내 장터] 비를 보니까 3·1만세운동때 이곳 아우내 장터에서 순국하신 분들 명단에 金九應(제학공파)와 김구응의 모 최씨가 들어있다.
<야후백과사전>
김구응 金球應 [?~1919]
독립운동가.
활동분야 : 독립운동
출생지 : 충남 천안
주요수상 : 대통령표창(1977)
충청남도 천안 출생. 1919년 3·1운동 때 천안 아우내[竝川]시장에서 유관순(柳寬順)과 함께군중의 선봉에서 만세시위를 이끌다가 일본경찰에게 살해되고, 달려온 노모(老母) 채씨(蔡氏)도 칼에 맞아 숨졌다.
1977년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 병천면 도원리
병천에서 북면 쪽으로 한 10리쯤 가면 노은정이 있는 도원리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곳에는 노은정 유허지, 노은정, 노은정 안내판 등이 있습니다. 안렴사공파 파조이신 김사렴 할아버지의 신도비문을 찬하신 남공철은 노은정을 지으신 김상기 공의 외현손입니다. (김상기의 딸이 남공철의 증조할머니임)
*김상기- 여+남00- 남00(외손)- 남00(외증손)- 남공철(외현손)
<천안노은정 안내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55호
소재지 :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도원리
이 건물은 조선숙종(1675-1720)때의 학자인 老隱 金相器가 숙종15년(1689)에 이곳 경치좋은 광기천에 정자를 지은후 자신의 호를 따라 노은정이라 하였다.
처음에는 동쪽 뒷산 동성산 정상에 정자를 지으려고 상량까지 하였는데 밤사이 재목들이 이곳으로 옮겨지기를 여러차례 거듭되어 지금의 위치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정자는 정면2칸, 측면2칸이며 자연 암반 위에 원형기둥을 세워 지은 굴도리집이다. 추녀마루가 지붕중앙에 모인 사모지붕으로 올릴 때 지붕틀을 구성하는 독특한 건물구조 기법을 볼 수 있어 중요하다.
<천안시청 홈페이지>
도원리
목천군 근동면 지역으로 처음에 도원(挑元)이라 하였는데 세마(洗馬) 김만중(金
萬重)이 병자호란의 강화를 싫어하여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와서 살면서 진나라
사람들이 도원에 가서 피난한 뜻에 따라 호를 도원(挑元)이라 하고 동네이름도
호를 따라 도원(挑源)으로 바꾸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평기리,
도원리, 광기리, 덕신리, 가정리, 반계리, 명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도원리라 하
고 갈전면에 편입되었다. 1942년 갈전면이 병천면으로 개칭되므로 병천면 도원
리가 되었다.
노은정(老隱亭) : 검계가에 있는 정자. 큰 바위에 아담한 정자가 놓여 있고 그
아래는 냇물이 깊이 패여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숙종 때 학자 김상기
(金相器)가 벼슬을 하려고 스물네차례나 응시하였으나 모두 낙방이 되고
노년에 모든 세상일을 잊으려고 이 정자를 짓고 큰 바위에 노은정(老隱
亭) 석자를 새겼다.
삭성대(削成臺) : 노은정 아래에 있는 바위를 깍아서 대를 만든 듯 한 바위가 냇
가에 있는데 우암 송시열이 삭성대 석자를 새겼다.
지금은 땅속에 묻혀 있다.
노은정 : 가정이라고도 하며 노은정에 있는 마을.
도영암(倒影岩) : 삭성대 옆에 있는 바위.
바위가 비스듬이 서 있어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도영암 석자를 새겼다
고 한다.
범박골 : 주물로 물건을 만들기 위하여 틀을 질흙으로 만들어 철일을 보조하던
곳. 사정대 안동김씨 김옥(金 )이 활을 쏘고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라 한
다.
노은정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355호]
[소재지] 천안시 병천면 도원리 산19번지
[구 조] 목조기와
[규 모] 사각형(4mx4m)1동
[개 요] 노은정은 1689년 조선조 숙종때 학자 김상기(본관이 안동이며 자는 정보, 호는 노은)가 건립한 우리시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이다. 노은정은 주위경관이 수려하고 아름다움이 뛰어난 곳으로 정자를 건립한 김상기가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위해 힘쓰며 영조의 스승 경한재, 군수 김광수 함께 도학으로 벗을 하며 지내던 곳으로 1853년 중수이후 몇차례 중수하였다.
노은정은 300년전의 우리나라 전통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건물로써 기둥은 둥근형이며 재질은 괴목 혹은 싸리나무라고도 한다. 마루는 우물 마루를 깔았으며 정자의 각 기둥에는 수침을 막는 돌기 등을 사용해 안전을 도모했고, 정자 주변은 수령 300년의 고목 등이 정자를 에워싸고 있으며 정자의 아래는 화강암이 지반으로 받들고 있으며 그 아래에 있는 도영암삭성대에는 송우암선생의 친필이 각명되었다.
노은정
노은정은 1689년( ) 노은(老隱) 김상기(金相器)공이 지으신 도원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명소이다.
공의 자는 ( ) 본관은 안동으로 1639년( )에 충북 청원에서 아버지 휘 자 ( )와 어머니 행주기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여 숙부이신 휘 자 ( )에게 입양하셨다. 공의 집안은 대대로 명문거족으로 고려명장 시호 충렬공 휘方慶의 대손이고 이태조가 조선을 세우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고려의 충절을 끝까지 지킨 안렴사 오은(梧隱) 휘士廉의 대손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하시어 신동이라 불렸고 숙종때는 대학자로 명성을 떨치시니 세상 사람들은 공을 시 장군이라 불렀다. 공의 이같은 학식과 인품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조정에서는 정오품의 통덕랑을 내렸으나 공은 이를 사양하고 오직 시 문학에만 전념하시니 선비들로부터 더욱 추앙을 받으셨다. 특히 영조대왕의 스승이신 곽시징 선생, 목천군수 김광수 선생과는 친교가 두터우셨다.
공은 생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시며 후진양성에 힘을 아끼지 않으셨다. 50세 되던 해 정자를 짓고 현판과 바위 위에 노은정이란 이름을 친필로 쓰시고 스스로 노은거사라 하였다. 1708년(숙종34년) 9월 18일에 7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으며 배위는 공인 남양홍씨로 헌납 우민의 따님이며 슬하에 4남 5녀를 두셨다.
공의 높은 학문과 선비로서의 고결한 인품을 사모하여 정조때의 명문장가로 이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을 지낸 외현손 남공철(南公轍)은 노은정 현판에 공의 행적을 기린 글을 남기셨고 공의 손자 휘 석범(錫範)은 노은정기를 지으셨다.
노은정은 북쪽으로 우뚝 솟은 적성산의 푸른 정기와 동성산맥의 줄기찬 기상을 이어받고 앞으로 유유히 흐르는 광기천의 맑은 물이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이 뛰어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철마다 학생들의 자연학습 도장 되고 있다.
공과 노은정에 대한 이야기는 300년 전에 발행된 [대록지]와 근세에 발행한 [팔도유람기] [지명총람] [이것이 한국이다] [천원군지] 등에 소개되고 있다.
이에 후손들은 공의 얼이 담긴 자랑스런 유산을 잊을 길이 없어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고 자손 만대에 전하여 가문의 영광과 긍지로 삼으려 한다.
1990년 3월
9대손 성회(聖會) 글을 짓고 씀
후손일동 세움
뜻을 모아 주신 분
홍식 완회 영식 용훈 수회 성회
원묵 인회 용갑 성묵 태용 재호
주회 종식 용선 정묵 명식 재홍
외 19명
老隱亭(노은정) 문화재 지정 경축식
<대종회보 제58호, 1997. 10>
지난 9월 28일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도원리 노은정 현지에서 안렴사공 11대손 휘相器 선조가 건립한 老隱亭이 1997년 8월 5일자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55호로 지정을 받아 천안시 병천지역 기관장과 안동김씨 종친회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날 경축식은 정자를 건립한 휘상기 할아버님의 9대손 聖會 (대종회 이사) 종친의 사회로 경과보고와 감사패 전달, 문화재 지정서 전달, 문화재관리인 위촉, 경축사, 내빈 축사 순으로 진행되었다.
경축사는 김상기 할아버님 11대손 김홍식, 내빈 축사는 대종회 상훈 회장을 대리하여 두회 부회장이 했으며, 감사패는 목천의 향토사학자 李元杓(이원표) 선생, 병천의 입향조 참봉공파의 군자감정공 종중 金永植 종손이, 노은정 문화재 지정에 지대한 공로로 감사패를 받았고, 문화재 지정서는 병천면 金天應 면장이 김홍식 종친에게, 문화재관리 책임자로 金容勳씨에게 각각 수여했다.
특히 이날 노은정 문화재 지정 경축식에는 천안시의원 황규민 의원, 한국고서협회 김재갑 회장, 성환동성중학교 金南應 교장, 천안시 향토사학자이며 성환동성중학교 교사인 황석유 선생, 군사공파 재석 회장, 안렴사공파 章會회장, 익원공파 영준 부회장 등 경향각지에서 불원천리하고 축하해 주셨다.
니다. 姓氏의 유허지, 세거지 등을 찾아본다는 뜻에서 "姓地순례" 라 이름붙여 보았습니
다.
▣ 청원군 강내면 궁현리
청주시내에서 출발해서 충북대학교 뒷길로 조치원 방향으로 달려서 청원군 강내면 궁현리를 보려고 하다가 지나쳤습니다. 시골도로를 달리다보니 드문드문 마을마다 입구에는 느티나무 고목이 서 있고 그 아래에는 헌 장판을 깔아놓은 평상이 있고, 마을 어른들이 고스톱도 치고 대화를 나누는 정겨운 장면이 스쳐 지나갑니다. 지나친 궁현리에는 독립유공자인 (익원공파) 金在衡(김재형, 1890-1966)의 기적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청원의인풍 (1991.2., 청주문화원)>
金在衡 紀蹟碑
독립유공자 김재형(1890-1966)의 기적비는 1984년 청원군 강내면 궁현리에 세웠으며 비문은 청주대학교 총장 金明會가 짓고 글씨는 趙壽衡이 썼다.
★고조(불화변)桓(환)- 증조 胤正(윤정)- 조 大欽(대흠)- 고 元默(원묵)
★김명회 : 익원공파
▣ 연기군 동면 내판리
조치원 방향으로 계속 가다보면 시내 못미쳐 좌회전 방향으로 동면, 내판리 이정표가 보입니다. 좌회전에서 계속 달리면 동면 소재지인 내판리가 나오고,
동면 소재지를 지나 조금 더 가면 좌회전 쪽으로 내판리2,3,4,5구 이정표가 나오고, 좌회전 해서 들어가면 연동중학교가 시원스럽게 위치하고 있습니다. 학교정문 입구에 김재붕 현종께서 지은 학교설립기념비가 있는데 학교설립에 공헌한 분들 이름중에 김재붕, 김재덕, 김서회, 김창회가 보입니다. 이곳 내판리는 연기군지에 보면 안동김씨가 많이 살고 있는 마을입니다.
다시 되돌아 나와서 동면 소재지를 막 벗어나는 지점에 안동김씨 김백열 효자문이 있습니다. 김백열이라는 분이 구안동인지, 신안동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대종회보 제55호, 1997년 1월>
在鵬씨 충청남도 문화상 수상
95년도에는 연기군민대상 수상
안렴사공 19대손인 在鵬씨께서는 지난 1996년도 충청남도 문화상 수상자 선정에서 학술부문에 선정되어 1996년 12월 2일 충남도청 대회의실에서 수상식을 가졌는데 많은 유명인사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제40회충청남도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또 96년 12월 7일에는 서울신문사에서 주최하고 문화체육부에서 후원한 향토문화대상 전통문화 부문에 선정되어 수상하였으며, 95년도에는 지역문화 창달에 기여한 공이 커 연기군민대상을 받은 사실도 있다. 이 분의 약력과 공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약력
1922년 8월 9일생
1943년 3월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
1945년 11월 조치원 공립고등여학교 교사
1947년 4월 대전공립공업중학교 교사
1989년 9월 ∼현재 충청남도 문화재 전문위원
1990년 3월 ∼현재 연기군 향토유적보호위원회 위원
1993년 1월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공적개요
30여 년간을 향리에 묻혀 오직 민족사와 향토사 연구에 전념하여 오면서 광개토대왕의 비문연구 및 신라, 고구려, 일본에 끼친 백제사 연구와 연기향토사 연구논문 등 40여편을 발표하여 민족사관의 주체성 확립과 향토사 정립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으며,
노령에도 불구하고 충남도 문화재 전문위원, 연기군 향토사 연구소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으로 재직하면서 왕성한 연구활동으로 후학의 귀감이 됨
<연기군청 홈페이지 (http://gun.yeongi.chungnam.kr/)>
김백열 효자문
소재지: 연기군 동면 내판리
시대: 조선시대
안동인.자는 여행이며 동면 내판리에서 태어났다. 5살의 어린 나이에 부친이 병이들어 자리에 눕자 지성으로 간호하던중 하루는 꿈에 신인이 나타나 곶감이 부친의 병에 특효가 있다고 알려주자 다음날 이를 구하여 드리니 차도가 있어 몇일만에 병이 나았다 한다.
이 소문이 세상에 알려지자 하늘에서 낸 효자라하여 고종27년 (1890)에 동몽교관 조봉대부의 벼슬과 정려를 내렸다 한다. 이정려는 동면 내판리 하리에 있다.
▣ 연기군 서면 국촌리
조치원 시내에 들어와서 공주방면으로 달리다가 군부대 앞에서 우회전해서 들어가면 연기군 서면 국촌리에 닿게 되는데 이곳에 김방경 장군의 둘째아들 김흔장군의 연기대첩을 기리는 [김흔장군연기대첩사적비]가 도로가에 우뚝 서 있습니다. 사적비 내용은 [김흔장군과 연기대첩] 으로 본 게시판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전의면 양곡리
다시 조치원으로 나와서 조치원 외곽을 끼고 조치원-천안간 도로를 시원스럽게 달렸습니다. 내리쬐는 따가운 가을햇살을 피하려 선글라스를 끼고 보니 시원스런 도로의 흑백 윤곽이 마치 물감을 금방 칠한 듯 원색물결입니다. 97년도에 북유럽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선그라스를 끼고 바라보던 풍경과 흡사하여 순간적으로 외국여행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전의면 양곡리를 지나쳐서 소정면소재지인 소정리에 도착해서 면사무소에 들어가 나무그늘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지나친 전동면 미곡리에는 전서공파 묘역이 있는데 묘역 맨 위에 장령공 金玖(김구)의 단이 있고, 그 아래로 주욱 내려오면서 전서공 김성목, 학당 김휴의 묘소가 널찍하게 자리하고 있고 김휴의 묘 옆에는 [고려검교 김휴사적비]가 있습니다. 묘역 아래쪽에는 후손들의 공적비 (김태일, 김재욱, 김재산, 김태정) 들이 도열해 있고. 마을 초입에는 오래되어 많이 마모된 듯한 김휴 유허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의면 양곡리에는 김익정,김사준 쌍효자문이 있습니다.
*방경- (1/5)선- (2/4)승용- (2/2)장령공 구- (1/2)전서공 성목- 학당 김휴- 김익정,김익렴
<연기군청 홈페이지 (http://gun.yeongi.chungnam.kr/)>
김휴 유허비
소 재 지 :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시 대 : 고려시대
안동인으로 자는 연부 정몽주 선생의 문하생이며 고려 공민왕때 검역 근시라는 벼슬 자리에 올랐다.
이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를때 호군의 명을 받았으나 연로한 아버지 (고려 공조판서를 지낸바 있는 감성목)을 모시기 위하여 직을 사양하고 송도에서 여러 신하들과 통곡으로 작별하고 현재의 연기군 전의면 운주산 아래 거처할 장소를 구하여 은거하였다.
태조는 다시 가선검교 한성좌윤 이라는 벼슬을 내려 그를 불렀으나 그는 끝내 나가지 않이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더욱 닦아 후세 양성에 전력 하였으며 그의 문하생 중에서 충효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니 그의 덕망과 지조가 훌륭하다 하여 유림명인들이 유허비를 세웠는데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에 있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그가 은거하고 있던 전동면 미곡리를 그의 호를 따라 학당리라 일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학당(學堂)골 김휴(金休)
본(本)이 안동(安東)으로 서기 1350년(고려충정2)고향에서 출생했다. 정몽주(鄭夢周) 선생의 문하생(門下生)으로 고려 공민왕땐 검교근시(檢校近侍)라는 벼슬에 있었고 고려가 실가되자 이태조 등국시 호군(護軍)에 명을 받았으나 연로하신 아버지(고려공조전서 성목:成牧)을 모 시고자 송도(松都)에서 여러 신하들과 통곡으로 작별하고 오늘의 전의(全義)운주산 아래 병 거지(屛居地)를 정하여 은거하자 태조가 하선검교 한성좌운(漢城左尹)이라는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그는 끝내 나가지 않았다.
그는 초야(草野)에 묻혀 있으면서 학문을 더욱 빛나게 닦아 그의 문하생으로 충효자를 많이 배출하였으니 그의 덕망과 지조가 훌륭하다 하여 유림명인(儒林名人)들이 유허비를 세웠고 운주산 아래서 살았으니 지금의 전동면 미곡리를 그의 호(號)를 따라 학당리(學堂里)라 일 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참고문헌 : 碑文, 族譜
김익정.김사준 쌍효자문
소재지 : 연기군 전의면 양곡리
시 대 : 조선시대
김익정은 이태조 5년(1396)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삼사를 역임하시고 사헌부대사헌에 재직중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부모의 상을 3년씩 6년간을 시묘하였다.
그후 태종의 부르심을 받고 다시 정사에 진출 이조참판으로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국민훈학강학을 독려하여 민족중흥을 진작하였으며 공은 또한 천성이 겸손하였고 학문이 탁월하고 덕행이 후덕하여 세인들이 충효명문이라 순배하였으며 세조조에 정려를 명받았다.
충신명문이 충신을 낳는다고 공의 손자인 수령은 대제학을 역임하였고 성종조에 좌이공신으로 복창군까지 봉하였으며 호는 문도공 이다. 또한 김사준은 총명예지하여 효행과 유덕을 닦았다.
부친의병에 연근이 특효라하여 엄동설한에 얼음을 깨어 하루같이 드리니 효험이 있어 병이 나을때까지 복용시켜 주었으며 부친이 75세의 장수를 누리었다.명종조에 효자로 정려를 명하였다.(참고문헌 : 정려기)
▣ 연기군 소정면 소정리
소정면 소정리는 70년대 후반기와 80년대 전반기에 우리나라 경제정책의 기본틀을 세우고 80년대 후반기의 [단군이래 최대의 경제호황]이라는 경제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고 1983년 미얀마 아웅산에서 순국한 전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 (안렴사공파) 金在益 박사의 고향입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金在益
1938-1983 경제학자 경제관료. 서울출생. 1960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을 졸업하고 1962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한 다음 1968년까지 미국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고, 다시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1973년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74년까지 한국은행 조사역,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강사 등을 거친뒤 경제기획원 비서실장을 시작으로 한국경제의 근간을 다루는 경제기획원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75년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관, 1976년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1980년 경제기획원 경제협력차관보 등을 역임하였다.
제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되어 한국경제의 성장과 안정은 저금리 저물가정책을 기조로 하여야 한다는 평소 그의 경제관을 경제정책에 반영하였으며 그의 경제정책은 이후 계속 한국경제계획의 기저가 되었다.
대통령 전두환의 미얀마예방을 수행하였다가 1983년 10월 9일 아웅산사태로 순직하였다. <朴相哲>
<시대의 선각자, 김재익>
고 김재익 박사의 부인인 이순자 교수가 엮은 [시대의선각자 김재익] (1998, 운송출판사) 라는 책자에 기록되어 있는 가족관련 기록을 발췌하여 보았습니다.
1938년 11월 26일 서울에서 부친 金應默과 모친 姜炳周 사이에서 9남매의 막내로 출생
그는 충남 연기군 전의읍 소정리 소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6.25는 그의 가정에 치명타를 입힌다. 아버지를 잃게 되고 형제들은 풍지박산된다. 서울대에서 강의를 하던 형과 당시에 대학에 다녔던 두 형들 모두 행방불명이 된다. 6.25는 모든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김재익의 가정에 유달리 가혹한 시련을 안겨 주었다.
서울로 이사와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산다. 그래도 그는 밝고 명랑하고 구김살 없이 소년시절을 보낸다. 종교적으로는 독실한 가톨릭 가정이었다. 그의 누님 두 분이 수녀였다. 큰 누님 김재순은 수녀로서 성심여대 총장을 지냈고, 둘째 누님 김재숙은 성심수녀원 원장을 지냈다. 독실한 천주교인어어서 그랬는지 그는 성직자의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그가 얼마나 뛰어났으면 스탠포드대학에서 후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세미나 룸 하나를 김재익 룸으로 명명하였겠는가.
전 대통령은 김재익의 사람됨이나 경제이론 면에서 나라의 보배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문상차 미망인 李淳子 여사를 만났을 때 국보적 존재를 잃었다고 하면서 애도의 정을 표시하였다.
홀어머니 밑에 9남매 막내료
김재익은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60년 봄 당시 취직시험으론 가장 어렵다던 한국은행 공채시험에 당당 수석합격한다.
성장시절의 그후의 생애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김재익은 1938년 11월 26일 충남 연기군 전의면에서 부친 안동김씨 金應默과 모친 姜炳周와의 사이에 6남 3녀중 막내로 출생한다. 부친은 김재익의 어린 시절에 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서울로 이사온 김재익 형제들은 홀어머니의 양육을 받으며 어렵게 살았다. 가난 속에서도 김재익은 구김살 없이 밝은 웃음을 일ㅈ지 않으며 성장했다. 서울 삼청국민학교와 경기중고를 다닐 때 늘상 모범생이었다.
김재익은 한국은행에 재직중인 62년 봄 혜화동 성당에서 李淳子씨와 결혼, 그뒤 韓會(63년생), 承會(71년생) 등 두 아들을 두었다.
이에 따라 김재익은 스탠포드로 옯겨가 본격적인 학구생활에 들어갔다. 부인 이순자도 하와이대에서 취득한 도서관학 석사학위를 인정받아 스탠포드대 도서관에 취직했다.
▣ 천안 삼거리공원
천안 삼거리 공원에 들렸는데 그곳에 있는 [2·9의거 기념비]에 의거에 참여한 분들 이름중에 金敏應이라고 있는데 應자항렬 제학공파인 듯 합니다.
▣ 목천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 전시관을 둘러보다 보면 [김이언,김구 의병진의 활동지역(평북 초산군)], [김구 서명 태극기], [광남군이광악선무공신교서-김시민 휘자], 익원공 김사형이 만든 [혼리강리역대국도지도]이 있고, 외곽 순환로를 돌다보면 [김구 어록비]와 [김시민 어록비]를 볼 수 있습니다.
<천안시청 홈페이지 (http://city.chonan.chungnam.kr/)>
광남군이광악선무공신교서
[보물 제952호]
[소재지] 천안시 목천면 남화리 230
[수 량]1책
[규 모] 41x22.3,34x22.3cm
[개 요] 임진왜란때 큰공을 세운 이들에게 내려진 훈호는 선무, 호성 두가지로 나뉘고 있는데 선무공신은 원병과 양곡을 요청하러 명에 왕래한 사신이고 서울에서 의주까지 왕을 시종 수행하며 공을 세운 사람은 호성공신으로 책봉하였다. 이 교서는 선조37년(1604) 10월에 내린 것이다.
이광악(1557-1608)은 선조17년(1584)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동 25년에 곤양군수가 되었다. 이때 왜란이 일어나자 선봉에 나서 왜군과 싸웠고, 진주성이 포위되자 목사 김시민을 도와 진주성을 방어하였고, 김시민이 전사한 뒤에는 여러 장수를 독려하여 진주대첩에 큰 공을 세웠다.
▣ 병천면 가전리
병천 방향으로 달리다가 병천 4km 못미쳐에서 [김시민장군 유적]이라는 문화재안내판이 보이고 우회전하여 조용한 시골길을 달려 김시민 장군의 사사처와 김시민장군 유적지 안내판이 있는 가전리 잣밭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내일 추모행사가 열린다는 대형 현수막과 넓은 터에 천막이 세워져 있습니다.
마을 뒷산으로는 제학공파 묘역이 있는데 맨 위에 壽亨(수형)의 묘가 위치하고 있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안동김씨세천비] 가 있다.
가전리 마을 입구를 벗어나 조금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백전천 도정교를 건너 도정산 쪽으로 올라가면 [정경부인창평이씨사적], [좌찬성상락군김공충갑유적비], 재실인 도정강사가 이어져 있고 맨 위에 도정사가 있는데 이곳에 김영돈, 김진, 김익달의 설단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 김시민 장군과 관련해서는 김시민 장군 홈페이지 (http://www.kimsimin.or.kr/)와 KBS역사스페셜(http://www.kbs.co.kr/history/review.htm) "99.3.13 진주대첩"을 보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천안시청 홈페이지>
가전리
목천군 근동면 지역인데 1895년 지방행정 편제 때 갈전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
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상백전리, 하백전리, 용연리, 가암리, 서원리 일부를 병
합하여 가암리의 가자와 백전리의 전자를 따서 가전리라 하고 갈전면에 편입되었
다. 1942년 갈전면이 병천면으로 명칭이 바뀌어 지므로 병천면 가전리가 되었
다.
거북바위 : 구암(龜岩), 잣밭 앞에 있는 바위. 큰 바위가 둘이 겹쳐서 거북이 모
양으로 서 있고,그 옆에 수백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데 바이 동쪽에 김씨
세거(金氏世居), 북쪽에 백전동천(栢田洞天)이라 새겼다.
명종때 명신 김충갑(金忠甲)이 그의 장인 이성춘(李成春)의 재산을 이어
받아 이 마을에 살면서 그호를 구암(龜岩)이라 하였다.
느티나무 : 거북바위 옆에 있는 큰 느티나무.
(전설) : 큰 느티나무 아래에 전에는 큰 못이 있었는데 이무기가 살면서 이근처
의 짐승들을 많이 해치므로 김충갑의 아들 충무공 김시민이 아홉 살 때
동네 아이들을 시켜 느티나무에 오르게 하고, 이무기가 아이들의 그림자
를 보고 물 가운데에서 머리를 들고 아이들을 향하여 올라 오는 것을 활
로 쏘아 서른 세발을 맞추어 죽였는데 그 피가 십여일이나 붉게 흘러 나
왔다고 한다. 이런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후손인 김재홍씨가 사사처란
비를 세워 놓았다.
강당산 : 돌모루 앞에 있는 산. 그 밑에 도정강사(挑汀講舍)가 있었다.
강당골 : 창평 이씨 묘와 제학공의 제단이 있는데 창평이씨는 충무공 김시민의
외조부이며 제학공은 안동 김씨의 중시조이다.
이 자리가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이며 명나라 명사 두사총(杜師聰)이 소
점인데 말이 물을 마시는 형이라 하며 은(銀) 세말을 폐백으로 주었다고
전하여 온다.
충열사터(忠烈祠터) : 가전리 249번지 돌모루에 있는 충열사터.
정랑 조명, 충무공 김시민, 죽계 김계종을 배향했는데 고종 5년 1864년
폐지되었다.
▣ 병천 아우내장터
병천소재지에 들어와 아우내 순대 집에 저녁을 시켜 놓고 아우내 장터 구경을 하는데
장터 네거리에 세워져 있는 김남응(應자항렬 제학공파인 듯) 짓고 김진상이 쓴 [아우내 장터] 비를 보니까 3·1만세운동때 이곳 아우내 장터에서 순국하신 분들 명단에 金九應(제학공파)와 김구응의 모 최씨가 들어있다.
<야후백과사전>
김구응 金球應 [?~1919]
독립운동가.
활동분야 : 독립운동
출생지 : 충남 천안
주요수상 : 대통령표창(1977)
충청남도 천안 출생. 1919년 3·1운동 때 천안 아우내[竝川]시장에서 유관순(柳寬順)과 함께군중의 선봉에서 만세시위를 이끌다가 일본경찰에게 살해되고, 달려온 노모(老母) 채씨(蔡氏)도 칼에 맞아 숨졌다.
1977년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 병천면 도원리
병천에서 북면 쪽으로 한 10리쯤 가면 노은정이 있는 도원리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곳에는 노은정 유허지, 노은정, 노은정 안내판 등이 있습니다. 안렴사공파 파조이신 김사렴 할아버지의 신도비문을 찬하신 남공철은 노은정을 지으신 김상기 공의 외현손입니다. (김상기의 딸이 남공철의 증조할머니임)
*김상기- 여+남00- 남00(외손)- 남00(외증손)- 남공철(외현손)
<천안노은정 안내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55호
소재지 :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도원리
이 건물은 조선숙종(1675-1720)때의 학자인 老隱 金相器가 숙종15년(1689)에 이곳 경치좋은 광기천에 정자를 지은후 자신의 호를 따라 노은정이라 하였다.
처음에는 동쪽 뒷산 동성산 정상에 정자를 지으려고 상량까지 하였는데 밤사이 재목들이 이곳으로 옮겨지기를 여러차례 거듭되어 지금의 위치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정자는 정면2칸, 측면2칸이며 자연 암반 위에 원형기둥을 세워 지은 굴도리집이다. 추녀마루가 지붕중앙에 모인 사모지붕으로 올릴 때 지붕틀을 구성하는 독특한 건물구조 기법을 볼 수 있어 중요하다.
<천안시청 홈페이지>
도원리
목천군 근동면 지역으로 처음에 도원(挑元)이라 하였는데 세마(洗馬) 김만중(金
萬重)이 병자호란의 강화를 싫어하여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와서 살면서 진나라
사람들이 도원에 가서 피난한 뜻에 따라 호를 도원(挑元)이라 하고 동네이름도
호를 따라 도원(挑源)으로 바꾸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평기리,
도원리, 광기리, 덕신리, 가정리, 반계리, 명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도원리라 하
고 갈전면에 편입되었다. 1942년 갈전면이 병천면으로 개칭되므로 병천면 도원
리가 되었다.
노은정(老隱亭) : 검계가에 있는 정자. 큰 바위에 아담한 정자가 놓여 있고 그
아래는 냇물이 깊이 패여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숙종 때 학자 김상기
(金相器)가 벼슬을 하려고 스물네차례나 응시하였으나 모두 낙방이 되고
노년에 모든 세상일을 잊으려고 이 정자를 짓고 큰 바위에 노은정(老隱
亭) 석자를 새겼다.
삭성대(削成臺) : 노은정 아래에 있는 바위를 깍아서 대를 만든 듯 한 바위가 냇
가에 있는데 우암 송시열이 삭성대 석자를 새겼다.
지금은 땅속에 묻혀 있다.
노은정 : 가정이라고도 하며 노은정에 있는 마을.
도영암(倒影岩) : 삭성대 옆에 있는 바위.
바위가 비스듬이 서 있어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도영암 석자를 새겼다
고 한다.
범박골 : 주물로 물건을 만들기 위하여 틀을 질흙으로 만들어 철일을 보조하던
곳. 사정대 안동김씨 김옥(金 )이 활을 쏘고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라 한
다.
노은정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355호]
[소재지] 천안시 병천면 도원리 산19번지
[구 조] 목조기와
[규 모] 사각형(4mx4m)1동
[개 요] 노은정은 1689년 조선조 숙종때 학자 김상기(본관이 안동이며 자는 정보, 호는 노은)가 건립한 우리시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이다. 노은정은 주위경관이 수려하고 아름다움이 뛰어난 곳으로 정자를 건립한 김상기가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위해 힘쓰며 영조의 스승 경한재, 군수 김광수 함께 도학으로 벗을 하며 지내던 곳으로 1853년 중수이후 몇차례 중수하였다.
노은정은 300년전의 우리나라 전통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건물로써 기둥은 둥근형이며 재질은 괴목 혹은 싸리나무라고도 한다. 마루는 우물 마루를 깔았으며 정자의 각 기둥에는 수침을 막는 돌기 등을 사용해 안전을 도모했고, 정자 주변은 수령 300년의 고목 등이 정자를 에워싸고 있으며 정자의 아래는 화강암이 지반으로 받들고 있으며 그 아래에 있는 도영암삭성대에는 송우암선생의 친필이 각명되었다.
노은정
노은정은 1689년( ) 노은(老隱) 김상기(金相器)공이 지으신 도원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명소이다.
공의 자는 ( ) 본관은 안동으로 1639년( )에 충북 청원에서 아버지 휘 자 ( )와 어머니 행주기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여 숙부이신 휘 자 ( )에게 입양하셨다. 공의 집안은 대대로 명문거족으로 고려명장 시호 충렬공 휘方慶의 대손이고 이태조가 조선을 세우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고려의 충절을 끝까지 지킨 안렴사 오은(梧隱) 휘士廉의 대손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하시어 신동이라 불렸고 숙종때는 대학자로 명성을 떨치시니 세상 사람들은 공을 시 장군이라 불렀다. 공의 이같은 학식과 인품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조정에서는 정오품의 통덕랑을 내렸으나 공은 이를 사양하고 오직 시 문학에만 전념하시니 선비들로부터 더욱 추앙을 받으셨다. 특히 영조대왕의 스승이신 곽시징 선생, 목천군수 김광수 선생과는 친교가 두터우셨다.
공은 생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시며 후진양성에 힘을 아끼지 않으셨다. 50세 되던 해 정자를 짓고 현판과 바위 위에 노은정이란 이름을 친필로 쓰시고 스스로 노은거사라 하였다. 1708년(숙종34년) 9월 18일에 7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으며 배위는 공인 남양홍씨로 헌납 우민의 따님이며 슬하에 4남 5녀를 두셨다.
공의 높은 학문과 선비로서의 고결한 인품을 사모하여 정조때의 명문장가로 이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을 지낸 외현손 남공철(南公轍)은 노은정 현판에 공의 행적을 기린 글을 남기셨고 공의 손자 휘 석범(錫範)은 노은정기를 지으셨다.
노은정은 북쪽으로 우뚝 솟은 적성산의 푸른 정기와 동성산맥의 줄기찬 기상을 이어받고 앞으로 유유히 흐르는 광기천의 맑은 물이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이 뛰어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철마다 학생들의 자연학습 도장 되고 있다.
공과 노은정에 대한 이야기는 300년 전에 발행된 [대록지]와 근세에 발행한 [팔도유람기] [지명총람] [이것이 한국이다] [천원군지] 등에 소개되고 있다.
이에 후손들은 공의 얼이 담긴 자랑스런 유산을 잊을 길이 없어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고 자손 만대에 전하여 가문의 영광과 긍지로 삼으려 한다.
1990년 3월
9대손 성회(聖會) 글을 짓고 씀
후손일동 세움
뜻을 모아 주신 분
홍식 완회 영식 용훈 수회 성회
원묵 인회 용갑 성묵 태용 재호
주회 종식 용선 정묵 명식 재홍
외 19명
老隱亭(노은정) 문화재 지정 경축식
<대종회보 제58호, 1997. 10>
지난 9월 28일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도원리 노은정 현지에서 안렴사공 11대손 휘相器 선조가 건립한 老隱亭이 1997년 8월 5일자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55호로 지정을 받아 천안시 병천지역 기관장과 안동김씨 종친회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날 경축식은 정자를 건립한 휘상기 할아버님의 9대손 聖會 (대종회 이사) 종친의 사회로 경과보고와 감사패 전달, 문화재 지정서 전달, 문화재관리인 위촉, 경축사, 내빈 축사 순으로 진행되었다.
경축사는 김상기 할아버님 11대손 김홍식, 내빈 축사는 대종회 상훈 회장을 대리하여 두회 부회장이 했으며, 감사패는 목천의 향토사학자 李元杓(이원표) 선생, 병천의 입향조 참봉공파의 군자감정공 종중 金永植 종손이, 노은정 문화재 지정에 지대한 공로로 감사패를 받았고, 문화재 지정서는 병천면 金天應 면장이 김홍식 종친에게, 문화재관리 책임자로 金容勳씨에게 각각 수여했다.
특히 이날 노은정 문화재 지정 경축식에는 천안시의원 황규민 의원, 한국고서협회 김재갑 회장, 성환동성중학교 金南應 교장, 천안시 향토사학자이며 성환동성중학교 교사인 황석유 선생, 군사공파 재석 회장, 안렴사공파 章會회장, 익원공파 영준 부회장 등 경향각지에서 불원천리하고 축하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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