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
페이지 정보
김태준 작성일03-02-22 00:53 조회1,597회 댓글0건본문
안녕하십니까?
지난해 12월초 한번 잠깐 찻아뵙고 인사올린 충렬공 26세손 익원공파 김태준 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종친 여러분 다들 무고 하셨는 지요? 특히 불철주야 우리 문중을 대표하여 애쓰시는 안사연 종친님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저는 매일 이곶을 찻고 있지만 도움주는것 하나 없이 매일 받고 얻기만 하는 부끄러운 종친 입니다.
거듭 부끄러운 마음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용기를 내어 태어나고 자란 저에 고향 문중 역사에 대하여 미약하나마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늘 수고하시는 우리 안사연 종친님들께 조그마한 보탬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 하면서 말 입니다.
저의 고향은 충북 청원군 북이면 부연리 隱仙(은선) 부락이며 고개사이(산넘어)에 있는 토성리 玉溪(옥계) 부락과 함께 약350여년 동안 면면히 세거해 오고있는 대표적인 안동김씨 집성촌 입니다.
참고로 저의 가게를 잠시 살펴보면 익원공 휘 사형(22세)/밀직사사공 휘 승(21세)/동추공 휘 종숙(20세)/목사공 휘 적(19세)/영안군 휘 수경(18세)/주부공 휘 기(17세)/현감공 휘 덕이(16세)로 이어져 왔습니다.
저의 고향에 안동김씨가 처음 뿌리를 내린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350 여년전 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기 1651년(효종2년) 우리 안동 김문의 익원공파 예하 불세출의 신동이며 대정치가요,외교관이며.탁월한 농업정책 수리전문 대가 이시기도 했던 落西(낙서) 자점 할아버님의 뜻하지 않은 역모사건 으로 인한 우리 안동김씨 문중의 멸문지경에 이르러 저의 15세손 진사공 휘 洛(낙) 할아버님이 이곶(당시:청주 북면 사동)으로 忠進(충진),玉剛(옥강) 두 형제분을 모시고 피난하여 사시게 된것이 오늘에 저의고향 문중 역사에 시작 입니다. 큰아들 忠進(충진) 할아버님은 2대를 사시다가 외지(불명)로 이주 하셨으며 둘째 玉剛(옥강) 할아버님은 國瑞(국서),麟瑞(인서).彦瑞(언서)등 3형제를 두셨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저의 고향 안동김씨 세거지가 시작돠었던 것입니다.
저는 武科(무과)에 급제하신 國瑞(국서)공 13세손으로 지금도 저의 고향은 세분 할아버님의 3파로 나누어져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초 삼일에 저의 고향 분파 시조격인 진사공 휘 낙(15세),옥강(14세)할아버님의 時祭(시제)를 전 후손이 성대히 봉행하고 있습니다.
제 어릴적 어른들이 말씀하시기를 당시 自點(자점) 할아버님과 저의 고향에 처음 피난 오신 진사공 휘 洛(낙) 할아버님과는 재종(6촌) 간 이라고 전해들었으나 이번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진사공 휘 洛(낙) 할아버님과 自點(자점) 할아버님의 부친이신 현감공 휘 琢(탁) 할아버님과 사종(10촌)간 으로 실제 自點(자점) 할아버님과는 사당숙(11촌) 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아마도 짐작하건데 당시 엄격한 신분제도 하에서 사종간 도 상당한 근친으로 지금 이 시대와는 거의 비교가 않될 정도로 한집안 처럼 가깝게 지내셨던 모양입니다.
저의 고향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양부락(玉溪,隱仙)이 고개를 사이에 두고 일명 "안적골" "밖앗적골" 하며 사이좋게 이루어져 있으며 지리적 으로는 저의 고향기점 청주가 50리,내수가 10리,증평이 20리 등 충북 청주 청원에서 과거 전기가 가장 늦게 들어온 대표적 오지 마을중 한곶 이었습니다.
특히 고개를 사이에 두고 고향 뒷산인 주산은 삼국시대 농성 (국가 재난시 도난과 화재를 피하기 위하여 곡식을 쌓아 두는성) 인 浪飛城(낭비성) 이 자리잡고 있는 유서깊은 곶 이기도 합니다.
해발 600-700m 정도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으며 성둘레는 약2km정도로 성의 형체는 거의 허물어져 있고 간간히 2-3m정도 높이의 성벽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특히 이곶은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의 치열한 국경 접경 지역이었으며 지금도 충북 청원의 북쪽끝 으로 괴산군 증평읍 과 浪飛城(낭비성) 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곶입니다.
이러한 지리적 역사적의 오지 에다 열악한 접근성 때문에 피난처로는 최대의 적지 였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건데 약350 여년전 한치앞을 내다볼수 없는,미래와 희망 이라고는 전혀 없는.오직 목숨만을 부지하기 위한,먼길을 떠나 낯설고 물설고 생면 부지의 척박하고 험한 이곶으로 어린 식솔들과 함께 숨어 들어온 진사공 휘 낙(15세) 할아버님에 절대 절명의 심정을 헤아려보니 한순간 가슴이 져려옵니다.
불과 이삼십년 전만 해도 양 부락에 약60호에 인구 300여명에 이를 정도로 우리 안동김씨 말그대로 모자리판 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급변하는 세월에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외지로 객지로 다 떠나고 이제는 20여호에 불과합니다.
꿈에도 잊지몾할 내고향 !!
어릴적 浪飛城(낭비성) 에 올라가 야-후하며 메아리 울리면 북쪽으로 두타산 남쪽으로 내수,오창,팔결다리.미호천이 한눈에 잡힐듯 다가오고 동쪽에 있는 삼보산과 구녀성은 왜그리도 초록빛이 진했든지.....
지금도 한걸음 달려가 보고 또 보고 싶습니다.또한 그때 그 모습이 진정 그립습니다.
안사연 종친 여러분 !
너무나 많은 지식과 방대한 자료,회원 종친님 개개인의 끊임없는 노력과 깊은 열정에 우리 문중 모든 종친의 존경과 감명을 한몸에 받기에 충분하다 생각됩니다.
저 또한 이자리가 있기에 부족하나마 저에 고향 문중 역사를 세상에 알릴수 있는 계기가 된것에 감사드립니다. 누가 아니 어느곳에서 보잘것없는 이런 이야기를 흔쾌히 받아주시겠습니까? 바로 안사연이 있기에 가능한 일 입니다.
오늘도 우리 안동 김문 후손들은 이곶 안사연이 있기에 하루가 즐겁습니다.
안사연이 있고 안사연이 존재 하는한 우리 김문은 크나큰 자부와 긍지를 가지고 영원히 번창할 것이라 확신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동시대 종친들과 함께 이 즐거움과 자부심을 오래 오래 간직하고픈 작은 소망을 또한 가져 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충렬공 26세손 金 泰 俊 [E-mail :ki3370 @yhoo.co.kr]
.
▣ 김윤만 - 충북 청원군 북이면 부연리(은선부락)이 바로 눈에 잡힐 듯 소개하셨습니다. 참으로 감사드리며 태준 족하님과 함께 꼭 기억하겠습니다. 자주 들리시고 시간나시면 오는 일요일 강화도 답사에 함께 하실 것을 권해 드립니다.
▣ 김항용 -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반갑습니다. 고향의 이야기를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어 북이면 부연리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안사연과 본 홈에 대한 과찬에 안사연의 일원으로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번 일요일(2. 23) 행사(본 홈 초기화 공지사항 참조)에 참석하시길 바랍니다.
▣ 김은회 - 반갑습니다. 천천히 잘 읽었습니다.
▣ 김정중 - 새로운 사실을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한번 다녀오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청원 북이 은선마을 신선이 숨은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은선마을이 고향이신 태준씨의 참여를 환영합니다.
▣ 김태서 - 반갑습니다.자점할아버지 이야기도 잘 읽었습니다.우리 익원공파가 참여도가 낮은 것 같읍니다.태준씨의 참여를 환영합니다.
▣ 김영윤 - 반갑습니다
지난해 12월초 한번 잠깐 찻아뵙고 인사올린 충렬공 26세손 익원공파 김태준 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종친 여러분 다들 무고 하셨는 지요? 특히 불철주야 우리 문중을 대표하여 애쓰시는 안사연 종친님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저는 매일 이곶을 찻고 있지만 도움주는것 하나 없이 매일 받고 얻기만 하는 부끄러운 종친 입니다.
거듭 부끄러운 마음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용기를 내어 태어나고 자란 저에 고향 문중 역사에 대하여 미약하나마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늘 수고하시는 우리 안사연 종친님들께 조그마한 보탬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 하면서 말 입니다.
저의 고향은 충북 청원군 북이면 부연리 隱仙(은선) 부락이며 고개사이(산넘어)에 있는 토성리 玉溪(옥계) 부락과 함께 약350여년 동안 면면히 세거해 오고있는 대표적인 안동김씨 집성촌 입니다.
참고로 저의 가게를 잠시 살펴보면 익원공 휘 사형(22세)/밀직사사공 휘 승(21세)/동추공 휘 종숙(20세)/목사공 휘 적(19세)/영안군 휘 수경(18세)/주부공 휘 기(17세)/현감공 휘 덕이(16세)로 이어져 왔습니다.
저의 고향에 안동김씨가 처음 뿌리를 내린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350 여년전 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기 1651년(효종2년) 우리 안동 김문의 익원공파 예하 불세출의 신동이며 대정치가요,외교관이며.탁월한 농업정책 수리전문 대가 이시기도 했던 落西(낙서) 자점 할아버님의 뜻하지 않은 역모사건 으로 인한 우리 안동김씨 문중의 멸문지경에 이르러 저의 15세손 진사공 휘 洛(낙) 할아버님이 이곶(당시:청주 북면 사동)으로 忠進(충진),玉剛(옥강) 두 형제분을 모시고 피난하여 사시게 된것이 오늘에 저의고향 문중 역사에 시작 입니다. 큰아들 忠進(충진) 할아버님은 2대를 사시다가 외지(불명)로 이주 하셨으며 둘째 玉剛(옥강) 할아버님은 國瑞(국서),麟瑞(인서).彦瑞(언서)등 3형제를 두셨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저의 고향 안동김씨 세거지가 시작돠었던 것입니다.
저는 武科(무과)에 급제하신 國瑞(국서)공 13세손으로 지금도 저의 고향은 세분 할아버님의 3파로 나누어져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초 삼일에 저의 고향 분파 시조격인 진사공 휘 낙(15세),옥강(14세)할아버님의 時祭(시제)를 전 후손이 성대히 봉행하고 있습니다.
제 어릴적 어른들이 말씀하시기를 당시 自點(자점) 할아버님과 저의 고향에 처음 피난 오신 진사공 휘 洛(낙) 할아버님과는 재종(6촌) 간 이라고 전해들었으나 이번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진사공 휘 洛(낙) 할아버님과 自點(자점) 할아버님의 부친이신 현감공 휘 琢(탁) 할아버님과 사종(10촌)간 으로 실제 自點(자점) 할아버님과는 사당숙(11촌) 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아마도 짐작하건데 당시 엄격한 신분제도 하에서 사종간 도 상당한 근친으로 지금 이 시대와는 거의 비교가 않될 정도로 한집안 처럼 가깝게 지내셨던 모양입니다.
저의 고향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양부락(玉溪,隱仙)이 고개를 사이에 두고 일명 "안적골" "밖앗적골" 하며 사이좋게 이루어져 있으며 지리적 으로는 저의 고향기점 청주가 50리,내수가 10리,증평이 20리 등 충북 청주 청원에서 과거 전기가 가장 늦게 들어온 대표적 오지 마을중 한곶 이었습니다.
특히 고개를 사이에 두고 고향 뒷산인 주산은 삼국시대 농성 (국가 재난시 도난과 화재를 피하기 위하여 곡식을 쌓아 두는성) 인 浪飛城(낭비성) 이 자리잡고 있는 유서깊은 곶 이기도 합니다.
해발 600-700m 정도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으며 성둘레는 약2km정도로 성의 형체는 거의 허물어져 있고 간간히 2-3m정도 높이의 성벽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특히 이곶은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의 치열한 국경 접경 지역이었으며 지금도 충북 청원의 북쪽끝 으로 괴산군 증평읍 과 浪飛城(낭비성) 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곶입니다.
이러한 지리적 역사적의 오지 에다 열악한 접근성 때문에 피난처로는 최대의 적지 였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건데 약350 여년전 한치앞을 내다볼수 없는,미래와 희망 이라고는 전혀 없는.오직 목숨만을 부지하기 위한,먼길을 떠나 낯설고 물설고 생면 부지의 척박하고 험한 이곶으로 어린 식솔들과 함께 숨어 들어온 진사공 휘 낙(15세) 할아버님에 절대 절명의 심정을 헤아려보니 한순간 가슴이 져려옵니다.
불과 이삼십년 전만 해도 양 부락에 약60호에 인구 300여명에 이를 정도로 우리 안동김씨 말그대로 모자리판 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급변하는 세월에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외지로 객지로 다 떠나고 이제는 20여호에 불과합니다.
꿈에도 잊지몾할 내고향 !!
어릴적 浪飛城(낭비성) 에 올라가 야-후하며 메아리 울리면 북쪽으로 두타산 남쪽으로 내수,오창,팔결다리.미호천이 한눈에 잡힐듯 다가오고 동쪽에 있는 삼보산과 구녀성은 왜그리도 초록빛이 진했든지.....
지금도 한걸음 달려가 보고 또 보고 싶습니다.또한 그때 그 모습이 진정 그립습니다.
안사연 종친 여러분 !
너무나 많은 지식과 방대한 자료,회원 종친님 개개인의 끊임없는 노력과 깊은 열정에 우리 문중 모든 종친의 존경과 감명을 한몸에 받기에 충분하다 생각됩니다.
저 또한 이자리가 있기에 부족하나마 저에 고향 문중 역사를 세상에 알릴수 있는 계기가 된것에 감사드립니다. 누가 아니 어느곳에서 보잘것없는 이런 이야기를 흔쾌히 받아주시겠습니까? 바로 안사연이 있기에 가능한 일 입니다.
오늘도 우리 안동 김문 후손들은 이곶 안사연이 있기에 하루가 즐겁습니다.
안사연이 있고 안사연이 존재 하는한 우리 김문은 크나큰 자부와 긍지를 가지고 영원히 번창할 것이라 확신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동시대 종친들과 함께 이 즐거움과 자부심을 오래 오래 간직하고픈 작은 소망을 또한 가져 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충렬공 26세손 金 泰 俊 [E-mail :ki3370 @yhoo.co.kr]
.
▣ 김윤만 - 충북 청원군 북이면 부연리(은선부락)이 바로 눈에 잡힐 듯 소개하셨습니다. 참으로 감사드리며 태준 족하님과 함께 꼭 기억하겠습니다. 자주 들리시고 시간나시면 오는 일요일 강화도 답사에 함께 하실 것을 권해 드립니다.
▣ 김항용 -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반갑습니다. 고향의 이야기를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어 북이면 부연리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안사연과 본 홈에 대한 과찬에 안사연의 일원으로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번 일요일(2. 23) 행사(본 홈 초기화 공지사항 참조)에 참석하시길 바랍니다.
▣ 김은회 - 반갑습니다. 천천히 잘 읽었습니다.
▣ 김정중 - 새로운 사실을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한번 다녀오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청원 북이 은선마을 신선이 숨은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은선마을이 고향이신 태준씨의 참여를 환영합니다.
▣ 김태서 - 반갑습니다.자점할아버지 이야기도 잘 읽었습니다.우리 익원공파가 참여도가 낮은 것 같읍니다.태준씨의 참여를 환영합니다.
▣ 김영윤 - 반갑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