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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108)마지막 혼신-15-민족의 위대한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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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2-22 19:42 조회1,5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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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마지막 혼신을 기우려 통일정부를 수립하는데 노력하시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이는 성공하지 못하고 남한에서는 5월 10일 단독선거가 치루어지고,



이어서 제헌국회가 열려 헌법이 제정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8월 15일 탄생하게 됩니다.



일제에서 떡 고물을 차지하던 앞잡이들이 떡 시루째 차지하는 형상이고, 이후 극우주의와



반공주의가 진정한 보수의 탄생을 억눌러서 반세기동안 이어왔다고 어느 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위대한 양심이라고 표현한 송건호씨의 글을 옮겨 봅니다.







위대한 민족의 양심



아침 9시에 출발 예정이던 김구는 하오 3시 30분경에야 경교장 뒷문을 겨우 빠져나와 개성으로



향해 떠났다. 1948년 봄 전후부터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학생은 사실상 남로당원이나 거의 다름없는



박해를 받았다.



이승만계 학생은 경찰과 일체가 되어 협상파 학생들을 무섭게 탄압하고 있었다. 그 때 단정파에게는



협상파가 무서운 위협적 존재였다. 이승만, 한민당 등 단정파는 오히려 소수파로 보이기조차 하였었다.



그래서 이승만계는 단결을 주장했다. 이승만 노선 밑에 단결하라는 명령이었다. 이에 김구는 참된



단결의 길이란 무엇인가를 이렇게 말했다.



단결의 원칙을 세워야 한다. 원칙이 없는 단결은 제대로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백성의 생활을 위협하고



백성을 무리하게 압박하는 탐관오리가 그 백성을 보고서 단결만 하면 잘 살수 있다고 하면 그 백성이



믿고 따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보고 믿을 수 있는 단결의 원칙과 아울러 그것을



행동으로서 실천할 성의까지 보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조국의 통일을 성공하려



하면 통일을 성공시킬 수 있는 원칙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서만 모든 사람이 따를 수 있는 것이다.



배부른 사람과 배고픈 사람, 괴로운 사람과 무섭게 구는 사람은 한데 뭉쳐 살 수 없는 것이니



전 국민이 한 덩어리가 되려면 먼저 민심을 안정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



김구는 1948년 4월 하순부터 5월 상순까지 평양을 다녀왔다. 그의 평양 방문에 대해서는 이승만,



한민당 계열에서 맹렬히 비난을 퍼부었다. 남북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는 비난도 들렸다.



이에 대해 김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회고컨대 나는 작년 4월 19일,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만난을 무릅쓰고 38선을 넘어서 북행했었다.



그 뒤에 조국의 현실은 마침내 분립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오직 국제적 제약성에 기인한데



불과한 것이며 3천만 동포의 마음 속에는 다만 하나의 조국이 있을 뿐으로 남북동포의 통일을



갈망하는 열렬한 의욕도 시간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



제 1차 협상을 실패라고 규정짓는 것은 조급한 생각이다. 국제적 압력으로 첨예하게 대립된 상극의



세력을 정치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하여는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시킴에 필요한 오랜 시간과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1차 협상은 복잡한 정치적 교섭의 도정을 계시하는 한갓 서곡에 불과하고 종국은



아니다. 협상에서 세워진 통일의 원칙은 국제적으로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남북의 통일을 위한



협상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이 분단된 현실에 대하여 누구나 만족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다. 미.소 양군의 철수는 우리의



주장이 부분적으로 실현돼 가는 것이다. 역사는 언제나 전진하며 정의에서 우러나오는 정당한 주장한



반드시 실현될 것을 확신한다.(1949년 4월 20일)



남북 협상 1주년을 맞아 김구가 피력한 소감이었다.



1948년 5월 10일 김구와 김규식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로



국회가 구성되고 정부수립이 준비되자 이 반쪽 정부에 참여하기 위해 술렁이는 정계에서



이범석.신익희.조소앙 등 지난날의 임정 각료들도 하나 둘 이승만 노선에 참여했다. 김구가 설 자리는



점점 없어지는 듯이 보였다.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된 7월20일 밤 실의에 빠진 한독당 당무위원들이



하나 둘 경교장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당무위원들은 하나같이 침통한 표정이었고 누구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으로



남한에 이승만의 단정이 서는 경우 지금까지의 한국독립당의 주장은 사실상 그 결실의 희망이



희미해질 수밖에 없었고 뿐만 아니라 한독당의 당책 역시 허공에 떠버릴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때 김구는 엄숙한 얼굴로 당무위원들에게 입을 열었다. 그로서는 침통해 있는 당무위원들에게



앞으로의 한독당의 정책방향에 대해 무엇이라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동지들, 오늘 남한 국회는 드디어 단정 수립을 위한 정.부통령을 선출했오. 나는 오늘 남한



국회가 정부통령을 선출한데 대해 이미 소감을 말했지만 오늘 저녁 당동지들에게 다시 다짐해 두겠오.



우리 당의 최고 목표는 국토 통일이오. 하나에도 통일, 둘에도 통일을 위해 투쟁해 왔소. 그러나



우리의 이같은 노력을 외면한 남한 국회도 드디어 동포의 염원인 통일을 멀리 하고 말았오. 앞으로



남한단정이 통일 방안을 여하히 구상하는 우리는 우리의 통일 방안을 조금도 후퇴시켜서는 안 될 것이오.



우리의 통일 방안이 남한 단정의 통일 방안과 상반될 때 우리에게 엄청난 박해와 탄압이 있을 것이오.



그러나 우리 한독당이 통일을 위해 투쟁하다 쓰러졌다면 후세의 사가는 누구도 우리를 잘못이라 하지



않을 것이오. 우리 한국독립당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오직 민족의 양식 위에 서서 오직



통일의 길로 매진할 뿐이오.



그러므로 나는 우리 동지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앞으로 동지들 가운데 우리가 희구하는



통일정부가 아닌 단정에 참여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그 단정이 남이든 북이든 간 나는 추호의 응답도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해 두겠오....



김구의 선언은 엄숙하고도 단호했다. 한국독립당의 지표는 오직 국토통일이니 누구도 이 대열에서



한눈을 팔 땐 미련없이 당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김구는 스스로 외롭고 험한 길을 택했고



그 스스로가 당무위원들에게 말한 이승만 단정의 <엄청난 박해와 탄압>을 누구보다도 먼저 받고



비극적인 그러나 영광의 찬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백범 김구의 최후는 실로 민족 분단의 수난 속에 아직도 신음하는 이 겨레에게 냉전에 물들지 않는



참된 민족의 양심이란 그 무엇인가를 피로써 가르쳐 준 위대하고도 숭고한 교훈이라 할 것이다.







김구의 민족사상과 통일운동

(송건호『김구』, 한길사 1980 ) 에서 인용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 김윤만 - 선생님께서 나의 소원은 첫째도 독립(통일), 둘째도 독립(통일), 세째도 독립(통일)이요. 하시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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