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김자점에 대하여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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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09-29 23:03 조회2,202회 댓글0건본문
김자점에 대하여 ②
▣ 문화재청 (http://www.ocp.go.kr/) 홈페이지에 보면 인조1년(1623)에 인조반정에 참가하여 공훈이 있는 사람들에게 내린 공신교서 그림 중에 1등공신에 金自點, 3등공신에 김자점의 아들 金鍊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종 목 보물 1174호
명 칭 청흥군이중로정사공신교서 (靑興君李重老靖社功臣敎書)
분 류 교서
수 량 1축
지정일 1993.11.05
소재지 경기 포천군 창수면 추동리 433 (경기도박물관 보관)
소유자 이재충
관리자 경기도박물관
이 교서는 인조 3년(1625)에 이중로에게 추증한 것으로 그가 죽은 뒤에 내린 것이다. 이중로(1577∼1624)는 개국공신 이지란의 후손으로 이괄의 난 때 이성부와 함께 예성강 상류인 마탄에서 전사하였다. 16살 되던 해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선전관이 되었고, 광해군 13년(1621)에는 이천부사가 되었다. 인조 1년(1623)에 인조반정에 참가하여 정사공신 2등에 임명되어 청흥군으로 봉해졌다.
교서에는 이중로의 초상을 그려 후세에 길이 남기고 관직을 2계급 올려주었고, 또한 부모, 처자에게도 마찬가지로 2계급 올려주었으며, 큰아들에게는 이중로가 누리던 벼슬의 지위를 영원히 세습할 수 있다는 내용 등이 담겨있다. 그리고 관에서 일하는 노비와 공신에게 내리는 노비 등을 합쳐 19명의 노비, 밭 80결, 은 30량, 옷감 1단, 말 1필 등을 내리도록 지시하고 있다.
이 교서는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신에 대한 포상의 내역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문화재명 청흥군이중로정사공신교서(靑興君李重老靖社功臣敎書)
본(本) 분충찬모립기(奮忠贊謨立紀) 정사공신(靖社功臣) 교서(敎書)는 가의대부강화부윤증자헌대부병조판서(嘉義大夫江華府尹贈資憲大夫兵曹判書) 겸(兼) 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 청흥군(靑興君) 이중로(李重老)에게 책훈(策勳)된 교서(敎書)이다.
이중로(李重老)(선조(宣祖) 10, 1577∼인조(仁祖) 2, 1624)는 개국공신(開國功臣)인 청해백(靑海伯) 이지란(李之蘭)의 후손(後孫)으로 인조(仁祖) 이괄(李适)의 난(亂) 때에 경기(京畿) ·강원(江原) 양도(兩道)의 방어사(防禦사)가 되어 이성부(李聖符)와 함께 예성강(禮成江) 상류(上流)인 마탄(馬灘)에서 순사(殉死)하였다. 부인은 정언백(鄭彦伯)의 여식(女息)이다. 16세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이듬해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광해군(光海君)13년(1621) 이천부사(伊川府使)가 되었다.
인조(仁祖)1년(1623) 김유·이귀(李貴)등과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 정사공신이등(靖社功臣二等)에 녹훈(錄勳)되었으며 청흥군(靑興君)에 봉군(封君)되었다.
이 교서(敎書)는 천계(天啓)5년(인조(仁祖)3, 1625) 4월에 반정(反正)에 참여(參與)한 훈신(勳臣)에게 발급된 것으로 이중로(李重老)는 이등공신(二等功臣)에 책훈(策勳)되었다.
녹훈 당시 일등(一等)으로 김류(金류) ·이귀(李貴)등 9명(名)이 녹훈되었으나 이들 중 김자점(金自點) ·심기원(沈器遠) 2명(名)은 출출(黜出) 삭탈(削奪)되어 7명이 되고
이등(二等)에는 김경징(金慶徵) ·이중로(李重老)등 14명,
삼등(三等)은 박유명(朴維明) ·한교(韓嶠)등 27명으로 삭탈(削奪)된 2명을 제외(除外) 총 48명이 된다.
본(本) 교서(敎書)에는 출출(黜出)된 이들 두 사람 이름이 기재(記載)되어 있으며 이들 이름위에 묵서(墨)으로 원(圓)이 그려있어 삭제(削除)된 후에 표시(表示)한 것으로 본다.
이등(二等)인 이중로(李重老)에게는 포상(褒賞)으로 도상(圖像)을 그려 후세(後世)에 길이 남기고 관직(官職)은 이계급(二階級)을 올려주고 부모(父母) 처자(妻子)에게도 이계급(二階級)을 올려주고 장자(長子)에게는 작(爵)을 세습(世襲)토록 하여 길이 잃지 않게 하며 영세(永世)토록 죄(罪)를 용서하고 자식(子息)이 없을 경우에는 생질(甥姪)이나 여서(女壻)에게 초급(超級)하고
반당(반당 : 경성(京城) 관아사역노비(官衙使役奴婢)) 6인(人), 노비(奴婢) 9구(口), 구사(丘史)(구사 : 공신(功臣)에게 하사(下賜)하는 지방관아노비(地方官衙奴婢)) 4명 그리고 전(田) 80결(結), 은(銀) 30량(兩), 표리(表裡)(표리 : 은사(恩賜) 또는 진상(進上)하는 의복(衣服)의 표지(表地)와 이지(裡地)) 1단(段), 내구마(內廐馬) 1필(匹) 등을 하사(下賜)토록 교시(敎示)하고 있다.
▣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김자점 관련자료는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익원) 金自點 4권 861 중
→병자호란 9권 730 우,
→웅도 16권 658 우,
→인조반정 18권 544 좌,
→재령평야 19권 348 우,
→김자점의옥 4권 862 중
▣ [육관도사의 풍수,명당이야기 터 하권] (1993, 손석우 지음, 답게 출판)을 보면
김자점의 명당 찾는 이야기 및 역모에 걸려 구족이 멸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김자점은 광화문 부근의 당주동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대궐 못지 않은 큰 규모의 집을 가지고 있었고,
김자점의 아버지 김함의 묘를 충남 논산군 양촌면 양촌리 명당에 모심으로써 영의정에 까지 오르고,
할아버지 김억령의 묘를 강원 철원군 보계면 양촌리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 모셨다가 명당터를 잡아준 성지스님 이라는 분을 죽게 함으로써 왕의 자리에 오를수 있는 바로 전날 밤에 역모에 걸렸다는 내용과,
외조부인 기계유씨의 묘를 광주군 남한산성 가는 도중에 있는 명당터에 모시게 함으로써 그 자손들이 번창하였다는 내용입니다. 그 후손으로 유길준, 유억겸, 유진오, 유재흥, 유학성 등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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