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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강화도답사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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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2-26 03:49 조회1,6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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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사적 306호

명 칭 ●갑곶돈 (甲串墩)

분 류 진,보,돈

면 적 45,339㎡

지정일 1984.08.13

소재지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20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 국유,사유

관리자 강화군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갑곶돈은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였다.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부른데서 갑곶이라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조선 1644년 강화의 요충지마다 군대 주둔지를 설치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1679년에 완성되었다.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0월에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게 패하여 달아났다.



1977년에 옛 터에 새로이 옛 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문화재명 갑곶돈(甲串墩)

육지와 강화도를 오가는 나루터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는 방어시설로, 맞은편의 육지에 있는 김포 문수산성(文殊山城)과 마주보며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새(要塞)이다.



강화의 삼국시대 이름이 갑비고차(甲比古次)인 것에서 유래하여 오늘날까지 이름을 전해오는 것으로 보여지나,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이 이곳으로 건너가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와 하면서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텐데"라 한탄하여 말했다고 함에서 유래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고려가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면서 강화로 천도하고 강화도 해안을 지키기 위해 외성을 쌓았을 때부터 육지로 가기 위한 요충이었고, 조선 인조(仁祖)때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피난할 때와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왕자와 비빈(妃嬪)들이 피난할때도 이곳을 통하였다.



효종 7년(1656)에 이르러 국방을 강화하고, 특히 서울을 중심한 국방시설을 확충하고 만약의 외침에 대비키 위해 강화도를 요새화하면서 요충지마다 진(鎭)을 설치하였는데, 이때에 이곳에 돈대(墩臺)를 설치하여 제물진(濟物鎭)에 소속되었다. 돈대는 진(鎭)보다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인데, 이곳에는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였다.



그 후 숙종 5년(1679)에 이르러 작은 성채모양의 돈대와 포를 장치한 포대가 축조되고, 이곳의 경영이 본격화 되었으니 관리책임자인 병마만호(兵馬萬戶) 아래에 군관(軍官) 36명, 군병 100명, 돈군 24명이 소속되고 군량미 157석과 배 8척이 있었다.



고종 3년(1866) 9월 프랑스의 해군 600여명이 로오즈제독의 지휘로 문수산성과 이곳에 침입하여 강화가 점령되었는데, 10월에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양헌수(梁憲洙)장군이 거느린 우리의 수비군에 패하여 달아나니 이를 병인양요(丙寅洋擾)라 한다.



이곳에는 성문의 문루인 진해루(鎭海樓)가 있었고, 고려시대 몽고와 외교관계를 맺던 이섭정(利涉亭)의 터가 있었는데, 그 후 성벽 포대가 폐허화 되었다. 1977년에 이르러 옛터에 새로이 옛모습을 되살려 보수복원이 이루어졌는데, 지금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바다를 향해 침입하는 외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종 목 사적 227호

명 칭 ●광성보 (廣城堡)

분 류 진,보,돈

면 적 6,102㎡

지정일 1971.12.28

소재지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 국유,사유

관리자 강화군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다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 졌다.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으며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문화재명 광성보(廣城堡)

1658년(효종(孝宗)9)에 강화유수(江華留守) 서원리(徐元履)가 새로 만든 것으로, 1679년(숙종(肅宗)5)에 축조된 오두돈대(鰲頭墩臺 : 둘레 80보(步),33첩(堞))·화도돈대(花島墩臺 : 둘레 92보(步), 42첩(堞)·광성돈대(廣城墩臺 : 88보(步), 38첩(堞))를 관할하였다.



이곳에는 군선 5척과 별장 아래에 군관 29인·군병 100명·돈군 18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1874년에 만든 오두정 포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 최대의 격전지였다. 이해에 통상을 요구하며 침입한 미국 함대가 강화 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광성(廣城)·초지(草芝)·덕진(德津)·덕포(德浦)등의 포대에서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물리쳤으나, 4월 23일에 450명의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여 진을 점령하였다. 이튿날 미군이 북상하여 덕진진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미국 극동 함대는 9인치 포와 8인치 포 등 약 80문(門)의 함포로 지원사격을 하였으며, 광성보를 지키던 중군장(中軍將) 어재연(魚在淵)을 위시하여 그의 아우 어재순(魚在淳)·군관 이현학(李玄學)·어영초관(御營硝官) 유풍로(柳豊魯)·천총(千摠) 김현경(金玄暻)·광성별장(廣城別將) 박치성(朴致誠) 이하 49인의 장사와 200여명의 군사가 전사하고, 20여명이 부상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중상으로 기동이 어려운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다. 이 싸움에서 미군은 맥키 중위를 위시하여 3명이 전사하고 10여명이 부상하였다. 이때 성첩과 문루가 파괴된것을 1976년에 복원하는 동시에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쌍충비각(雙忠碑閣)을 보수, 정비하였다. 이곳에는 어재연장군의 전적비가 남아 있다.







종 목 사적 130호

명 칭 ●삼랑성 (三郞城)

분 류 성지(성곽)

면 적 245,997㎡

지정일 1964.06.10

소재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

시 대 삼국시대

소유자 국유,사유

관리자 강화군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며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랑성이라 부른다.



이 성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가 1259년 삼랑성 안에 궁궐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이 쌓여져 있는 모습을 보면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처럼 삼국시대 성의 구조를 찾을 수 있으므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된다.



고려 때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조 15년(1739)에 성을 다시 쌓으면서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 ‘종해루’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 1년(1660) 마니산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성 안에 있는 정족산사고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둘 다 없어지고 전등사만 남아있다.



이곳은 고종 3년(1866)의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을 해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도 유명하다.



문화재명 삼랑성(三郞城)

고려사(高麗史)의 지리지에 의하면 전등산(傳燈山)을 삼랑성(三郞城)이라고 부르며, 단군(檀君)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았다고 전해 온다고 하였다. 산의 이름은 길상산(吉祥山)이라고 하며 성의 이름은 정족산성(鼎足山城)으로 기록되기도 하였으나, 항상 이 지역에서는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는 구전(口傳)이 이어져 왔다.



성곽의 축조는 거친 할석(割石)으로 되어 있으며, 성의 안쪽 벽면도 할석으로 채워 안팎을 겹축(夾築)한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할석 사이마다 할석 부스러기로 쐐기 돌을 많이 사용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석축 이전에는 토축된 것이었다고 여겨지며, 해발 222.3m인 산의 정상에서 동향한 계곡을 포용하고, 동남향한 계곡에 수구과 남문이 있다. 북문은 북벽의 서쪽에 치우쳐 산봉우리 사이의 안부(鞍部)에 있고, 서문도 서남쪽 안부에 있으며, 동문은 남문의 북쪽으로 해발 107.2m의 봉우리 북쪽 안부에 있다. 성벽이 회절(回折)하는 곳마다 10여개의 곡성을 이루며, 치성(雉城)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성벽은 서측의 산정에서 북벽을 이루는 두 개의 봉우리와 동쪽 봉우리 및 서문 남동쪽의 봉우리 등이 있어서 마치 솥과 같은 고로봉형(고로峰形)을 이루었다. 조선왕조의 말기까지 존속하여 여장(女墻)과 총안(銃眼)·사혈(射穴)이 남은 곳도 있다.



1259년 (고려(高麗) 고종(高宗)46) 5월에 중랑장(中郞將) 백승현(白勝賢)의 풍수설에 따라 이 성내에다 가궐(假闕)을 지었다. 1606년(선조(宣祖)39) 마니산(摩尼山)에 사고(史庫)를 설치하여 실록(實錄)을 보존해 오다가 1660년(현종(顯宗)1) 삼랑성내의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로 옮겼다. 이때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譜閣)이 같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모두 없어지고 전등사(傳燈寺)만 남아 있다. 이 산성은 고려(高麗)때에 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739년(영조(英祖)15) 중수를 하면서,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고 종해루(宗海樓)라 하였고, 1764년 다시 성을 중수하였다. 성안에는 훈련도감과 금위영·어영청 소속의 창고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 산성은 1866(고종(高宗)3)의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하려던 160명의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첩지로 유명하다. 현재 성내에는 당시 프랑스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순무천총(巡撫千摠) 양헌수(梁憲洙)의 승전비가 있고, 1976년 남문을 다시 복원하고 문루를 세워서 예전대로 종해루라는 현판을 달았다.







종 목 보물 178호

명 칭 ●전등사대웅전 (傳燈寺大雄殿)

분 류 사찰건축

수 량 1동

지정일 1963.01.21

소재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 전등사

시 대 조선 광해군

소유자 전등사

관리자 전등사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조선 선조 38년(1605)과 광해군 6년(1614)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그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13년(1621)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광해군 13년(1621)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네 모서리기둥 윗부분에는 사람 모습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것은 공사를 맡았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모의 모습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데, 재물을 잃은 목수가 주모의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3곳의 처마 밑에서는 두손으로 처마를 받치며 벌을 받고 있는 모양새인데 비해, 한 귀퉁이의 것은 한 손으로만 처마를 받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벌을 받으면서도 꾀를 부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 선조들의 재치와 익살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의 능숙한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고,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문화재명 전등사대웅전(傳燈寺大雄殿)

이 대웅전은 1916년 수리시 발견된 양간록(樑間錄)에 의하면 선조(宣祖) 38년(1605) 일부 불탔으며, 다시 광해군(光海君) 6년(1614)에 불이나 모두 타버림으로써, 다음해(1615) 공사를 시작하여 광해군 13년(1621)에 거의 완공을 본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에는 철종(哲宗) 6년(1855) 규영화주(奎塋化主)에 의해 중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팔작집으로 막돌 허튼층쌓기한 높은 기단(基壇)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민흘림 두리 기둥을 세워,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짜올린 다포식(多包式) 건축이다.



공포의 짜임은 외2출목(外二出目) 내4출목(內四出目)으로 되었고, 쇠서(牛舌)의 모양은 섬약하며, 귀공포에는 나무로 깎은 인물상(人物像)을 얹어 놓은 것이 특이하다.



내공포의 공간포(空間包)는 첨차(첨遮)가 교두형(翹頭形)이나 주상(柱上)에서는 초각(草刻)된 판형(板形)으로 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종 목 사적 137호

명 칭 ●강화지석묘 (江華支石墓)

분 류 지석묘(사적)

면 적 598㎡

지정일 1964.07.11

소재지 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317

시 대 청동시대

소유자 국유, 공유, 사유

관리자 강화군



지석묘란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만든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하는데,지상에 책상처럼 세운 탁자식(북방식)과 큰 돌을 조그만 받침돌로 고이거나 판석만을 놓은 바둑판식(남방식)이 있다.



강화군 하점면 부근에는 40여 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이 중 부근리 고인돌이라 부르는 규모가 큰 탁자식 고인돌을 말한다. 전체높이는 2.6m이며, 덮개돌은 길이 6.5m, 너비 5.2m, 두께 1.2m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이 고인돌에 대한 발굴조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인근 삼거리에 있는 고인돌에서 무문토기조각과 간돌검(마제석검), 돌가락바퀴(방추차)를 비롯한 유물들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삼거리 유적과 비슷한 유물들이 들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문화재명 강화지석묘(江華支石墓)

강화 고인돌 무덤은 강화읍 서쪽에 있는 고려산(高麗山)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린 시루메산이 평야와 만나는 지점에 수십기가 분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점면 삼거리, 부근리 양사면 교산리 일대에는 고인돌 무덤이 40여기쯤 있는 것으로 최근에 조사되었다. 그 가운데 흔히 부근리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가장 규모가 큰 무덤 1기를 1964년에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고인돌 생김새는 덮개돌을 두매의 굄돌이 양쪽에서 받치고 있는 탁자식(북방식)이고 놓인 방향은 긴 축이 북동쪽을 향하고 있다. 덮개돌은 길이 650㎝, 너비 520㎝, 두께 120㎝ 정도이며 화강암 계통의 돌을 이용하였고 무게는 상당한 정도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남부지역에 있는 탁자식 고인돌 가운데 매우 큰 편에 속한다. 굄돌은 서쪽에 있는 것이 길이 450㎝, 너비 140㎝, 두께 60㎝이고, 동쪽에 있는 것은 길이 460㎝, 너비 140㎝, 두께 80㎝가 된다. 굄돌은 덮개돌과 같은 암질의 돌을 사용하였으며 바로 서있지 않고 동쪽으로 조금 기울어 있는 상태이다. 고인돌의 전체 높이는 260㎝이다. 무덤 형식으로 보면 동서로 놓인 굄돌 사이에 막음돌이 남북에 각각 한 매씩 서있어야 하는데 현재는 남아 있지 않아 고인돌의 원래 모습을 추정하기는 어렵게 되어 있다.



부근리 일대에는 이밖에도 탁자식 고인돌과 바둑판식 고인돌이 여러기 남아 있다. 부근리에 있는 고인돌은 아직 발굴조사를 하지 않아 고인돌과 관련된 유물은 어떤 것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인근에 있는 삼거리 유적에서 탁자식 고인돌 무덤 5기를 발굴하여 돌방(석실(石室))안에서 무문토기 조각, 간돌검(마제석검(磨製石劍)), 돌가락바퀴(방추차(紡錘車)), 달도끼(환상석부(環狀石斧))조각 등이 나온 적이 있고 고인돌 언저리에서 빗살무늬토기들이 여러점 나온 것이 있다. 부근리 고인돌에도 삼거리 유적과 비슷한 유물들이 들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종 목 사적 133호

명 칭 ●강화고려궁지 (江華高麗宮址)

분 류 궁지

면 적 7,534㎡

지정일 1964.06.10

소재지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743-1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 국유,사유

관리자 강화군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건물이다.



정궁 이외에도 행궁·이궁·가궐을 비롯하여 많은 궁궐이 있었다. 정문은 승평문이었고 양쪽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이 있었다. 39년동안 사용되었고 1270년 강화조약이 맺어져 다시 수도를 옮기면서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전쟁이 일어나면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했다. 조선 인조 9년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었다. 그후 다시 강화유수부의 건물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져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만이 남아있다.



이 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 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





문화재명 강화고려궁지(江華高麗宮址)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고군의 침략에 항전(抗戰)하기 위하여 고려의 도읍을 송도(松都)에서 강화도(江華島)로 옮겨 원종 11년(1270) 개성으로 다시 환도하기까지 39년간 있었던 고려의 왕궁 터이다.



고려왕궁은 최우(崔瑀)가 이령군(二領軍)을 동원하여 급속히 건립하였다. 왕궁의 규모는 작았으나 송도의 궁궐과 비슷하였으며 뒷산 이름도 송악(松岳)이라 하였다. 고려가 강화에 있는 항몽(抗蒙) 39년 간에 도성을 위시하여 여러 왕궁과 사찰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고려 왕궁의 정문은 승평문(昇平門)이었다. 이 궁은 고려가 몽고와 화의(和議)가 성립되어 환도할 때 강화의 도성과 함께 궁궐도 허물어졌다. 몽고와의 화의를 반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던 군사들은 반란을 일으켜 삼별초(三別抄)의 난(亂)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강화도는 전란에 대비하는 행궁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인조 9년(1631) 고려 궁궐터에 조선의 행궁이 건립되었다. 전각(殿閣)과 강화유수부, 외규장각 등을 세웠던 것이나 병자호란, 병인양요 등 외침속에 소실되기도 하였다.



1976년 고려궁지의 발굴조사가 있었으나 많이 교란되어 고려왕궁의 건물터를 정확하게 규명하지 못하였다. 현재 강화유수부의 관아 건물인 명위현(明威軒)과 이방청(吏房廳)이 남아 있다. 1997년에는 조선의 행궁지(行宮址)와 외규장각지를 발굴조사하였다.





























▣ 김윤만 - 후일 전등사를 찾으시는 분들은 대웅전 처마 밑에 있는 나녀상을 반드시 비교 감상해 보십시요. ㅋㅋㅋ

▣ 김은회 - 나녀상마다 대웅보전을 처밭치는 손위치가 다름니다.

▣ 솔내영환 -

▣ 김영윤 - 그날 나녀상의 관하여 재광님의 설명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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