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선생 최근기사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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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3-04 00:13 조회1,712회 댓글0건본문
백범선생 최근기사 모음
(조선일보/사회)
[의거 71주년] 윤봉길의사 기념관 상해에 세워진다 (2003.02.28)
71년 전 중국의 상하이(上海)에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기념관이 의거 현장에 세워진다.
윤 의사 의거 현장인 루쉰(魯迅)공원(옛 훙커우<虹口>공원)을 관리하고 있는 중국 상하이시(市) 훙커우구(區) 인민정부는 오는 4월 29일 윤봉길 의사 의거 71주년을 맞아 루쉰공원 내 ‘매정(梅亭·윤 의사의 호 매헌을 따 지은 정자)’의 전시공간을 윤 의사의 인물기념관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구 정부 외사판공실 천젠(陳儉) 부주임은 28일 “한국과 중국민이 공동으로 윤 의사의 의거를 기리는 작업을 다각적으로 전개하고 있다”면서 “무엇보다도 윤 의사의 정신을 공원을 찾는 양국 방문객들에게 소상히 알릴 수 있도록 전시물을 대폭 늘려 인물기념관화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 의사(1908~32)는 18세 때 상하이로 건너와 ●김구(金九)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뒤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소위 천장절(일본왕의 생일) 및 승전기념 축하식장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 등 많은 요인을 숨지게 했다.
(上海=연합)
(조선일보/문화)
[책마을] 우리 풍토에 맞는 교육사상은… (2003.02.28)
한국의 교육사상가
(이문원 지음, 문음사, 2만원)
원효대사 정몽주 정약용 ●김구 한용운. 이 다섯 사람의 공통점은? 답은 ‘교육사상가’다. 한국교육사학회·한국교육철학회 회장을 지냈고 현 독립기념관장인 저자는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바탕으로 한 교육사상이 강조돼야 한다’는 신념 하에 이 책을 썼다. 자칫 서양 교육사상 일변도로 치우칠 우려가 있는 풍토에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 삼국시대에서 근·현대까지 모두 49명의 사상가들에게서 ‘교육사상’ 부분을 일목요연하게 뽑아냈다. 추사 김정희가 교육의 ‘기회 균등’을 주장했다는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이 흥미롭다.
(조선일보/사설칼럼)
[이규태 코너] 돌아온 홍어 (2003.02.23)
임금이나 정치가와 연관되어 역사에 기억되는 정치음식(政治飮食)이라는 게 있다. 강화도에서 어렵게 자랐던 철종(哲宗)이 궁에 들어와 받는 수라상 주식(酒食)이 입에 맞을리 없어 수라간에서는 임금님의 향수음식을 찾아 헤맨 끝에 이문안의 마부와 장꾼들이 찾는 탕국밥과 막걸리를 찾아냈다. 임금이 이 탕국밥과 막걸리만 찾아 먹자 백성이 임금 먹는 것을 같이할 수 없다는 법도로 그 잘되던 장사를 폐하고 대신 선혜청 선달이라는 벼슬을 얻고 있다. 반면에 이웃하고 있는 술국집은 안동김씨 세도의 핵심인 김병국 대감이 드나든다는 소문이 나 팔도에서 노부모 업고 이 술국집을 찾아들었기에 음식재벌이 되었다. 비로 정치 기류를 탄 정치음식의 명암이 아닐 수 없다.
2차대전 말 장개석 정부와 ●김구 선생의 임시정부가 피란가 있었던 중경(重慶)의 정치음식으로 훠궈쯔(火鍋子)와 둥징바오자(東京爆炸)라는 요리가 있었다. 뜨거운 기름에 온갖 잡초와 곤충을 끓여 제독시켜 허기를 메웠던 전시 식품이요 누룽지에 뜨거운 수프를 부어 폭파음을 냄으로써 적국 수도인 동경 폭격을 가상했던 눈물겨운 정치요리들이다. 장개석이 자주 들렀던 훠궈쯔 집이라느니 ●김구 선생이 자주 들렀던 둥징바오자 집이라느니 하여 유객을 하는 것을 보았다. 텍사스 출신의 존슨 대통령이 백악관에 들면서 백악관 식탁에 얼음을 올리라 하자 품위있는 프랑스 요리가 전통인 백악관인지라 주방장은 촌스럽다고 사표를 내고 물러갔었다. 그후 미국 상류사회에서 얼음을 먹지 않던 전통이 깨졌다 했으니 이 역시 정치음식이었다 할 수 있다. 존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양주 커티삭을 즐겨마셨던 것이 한국에 커티삭 붐을 일으켰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 해역에서 홍어가 잡히는 것은 목포 앞바다 흑산도 근해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전후해서 잡히지 않기 시작하던 홍어가 임기가 끝나는 작금 다시 잡히기 시작한다는 현지 보도가 있었다. 1997년 이래 어선 한 척이 하루 한 마리 잡기도 어려웠다던데 지금은 척당 50~100마리씩 잡히는 호황이라 하니 홍어는 정치음식이었던가ㅡ. 김 대통령은 막걸리에 삭힌 홍어를 즐겼다던데 대통령이 즐기는 음식이기에 호기심까지 가세하여 수요가 딸렸음직하다. 홍어는 정치생선으로 오래 기억되게 됐다.
(조선일보/사설칼럼)
[만물상] 김대중 대통령 (2003.02.23)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있던 1986년 어느 날이었다. 그의 말과 행동이 언론에 보도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 동교동 자택에는 찾아오는 기자가 많지 않았다. 신참 기자가 찾아가도 그와 식탁에 마주앉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한 젊은 기자가 당돌하게 물어보았다. “이제 정치 그만하시죠. 대통령병에 걸렸다는 소리까지 듣지 않습니까. 이쯤서 물러나면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을 텐데요.”
그러나 김대중씨의 대답은 단호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나도 알아요. 현실정치 그만두면 역사적으로 훌륭한 인물로 남을 겁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을 보세요. 해방 후 현실정치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역사적으로는 깨끗하고 훌륭한 분으로 기록됐지만 나라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현실에 때묻지 않고 고고하게 남겠다는 것은 백로(白鷺)의 유혹 같은 것입니다.” 젊은 기자는 “이 사람이 끝까지 대통령이 되려고 하겠구나”하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 후 략 ---
(조선일보/사람들)
[사람들] 재야운동가 백기완씨 가족사 털어놓아 (2003.02.18)
“우리 가족의 비극은 한 가정의 비극을 넘어서 민족적·역사적 비극으로 이해되어야 해.”
재야 운동가로 이름난 백기완(白基玩·71)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은 17일 새벽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난 큰 형 기성(基成·78)씨의 빈소에서 “내가 19살 때부터 통일운동에 나선 이유는 우리 가정의 비극을 가족적 입장에서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파란만장했던 그의 가족사를 떠올렸다.
백 소장은 1932년 황해도 은율군 장연면에서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3·1 운동 당시 마을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보급한 죄로 일본 경찰에게 고초를 당해 숨진 할아버지와, 조선일보·동아일보 기자를 지냈으며 백범 ●김구와도 친분이 있었던 아버지(백홍렬·白弘烈·84년 작고)의 가르침 덕에 어릴 때부터 민족의식을 가슴에 새기며 자랐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백 소장은 지난 67년 고(故) 장준하 선생 등과 함께 ‘백범사상연구소’를 출범시켰고, 현재 그 맥을 이은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 연구소는 ‘백범어록’등 각종 서적을 편찬했으며, 70년대 유신반대 운동, 80년대 통일·민주화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과정에서 5차례나 강제폐쇄되는 시련을 겼었다.
--- 후 략 ---
(소년조선)
[알림] 게시판 (2003.02.17)
▲모임 청년백범에서는 24일부터 27일까지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어린이 백범 학교’를 연다. 초등학교 4~6학년을 대상으로 백범 ●김구 선생의 생애를 배우고 연극을 만들어 발표회를 가질 예정. 회비는 1만 원(☎ 02-719-1311).
(조선일보/문화)
[책마을] 미군정의 X파일을 본다 (2003.02.14)
◆미 군정 자료 연구
(정용욱 지음/도서출판 선인/2만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가 “●김구(金九)는 내가 끓일 스튜의 소금이 될 것”이라고 했다는 말은 몇 편의 논문보다 더 미(美) 군정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1945년에서 1948년까지 남한을 다스렸던 미 군정의 1차사료들은 대부분 미국에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한국 현대사를 전공하는 저자는 미국 국립문서관(National Archives)의 자료들을 뒤져 연구하고, 사료비판을 시도한다. 때로는 엄청나게 왜곡·윤색되고, 작성자의 관점과 의도가 강하게 스며든 자료들 속에서 임시정부, 노동, 4·3사태 등에 관한 귀중한 사실(fact)들을 건져내고 정리한다.
▣ 김창우 -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 김항용 -
▣ 김윤만 -
(조선일보/사회)
[의거 71주년] 윤봉길의사 기념관 상해에 세워진다 (2003.02.28)
71년 전 중국의 상하이(上海)에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기념관이 의거 현장에 세워진다.
윤 의사 의거 현장인 루쉰(魯迅)공원(옛 훙커우<虹口>공원)을 관리하고 있는 중국 상하이시(市) 훙커우구(區) 인민정부는 오는 4월 29일 윤봉길 의사 의거 71주년을 맞아 루쉰공원 내 ‘매정(梅亭·윤 의사의 호 매헌을 따 지은 정자)’의 전시공간을 윤 의사의 인물기념관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구 정부 외사판공실 천젠(陳儉) 부주임은 28일 “한국과 중국민이 공동으로 윤 의사의 의거를 기리는 작업을 다각적으로 전개하고 있다”면서 “무엇보다도 윤 의사의 정신을 공원을 찾는 양국 방문객들에게 소상히 알릴 수 있도록 전시물을 대폭 늘려 인물기념관화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 의사(1908~32)는 18세 때 상하이로 건너와 ●김구(金九)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뒤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소위 천장절(일본왕의 생일) 및 승전기념 축하식장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 등 많은 요인을 숨지게 했다.
(上海=연합)
(조선일보/문화)
[책마을] 우리 풍토에 맞는 교육사상은… (2003.02.28)
한국의 교육사상가
(이문원 지음, 문음사, 2만원)
원효대사 정몽주 정약용 ●김구 한용운. 이 다섯 사람의 공통점은? 답은 ‘교육사상가’다. 한국교육사학회·한국교육철학회 회장을 지냈고 현 독립기념관장인 저자는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바탕으로 한 교육사상이 강조돼야 한다’는 신념 하에 이 책을 썼다. 자칫 서양 교육사상 일변도로 치우칠 우려가 있는 풍토에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 삼국시대에서 근·현대까지 모두 49명의 사상가들에게서 ‘교육사상’ 부분을 일목요연하게 뽑아냈다. 추사 김정희가 교육의 ‘기회 균등’을 주장했다는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이 흥미롭다.
(조선일보/사설칼럼)
[이규태 코너] 돌아온 홍어 (2003.02.23)
임금이나 정치가와 연관되어 역사에 기억되는 정치음식(政治飮食)이라는 게 있다. 강화도에서 어렵게 자랐던 철종(哲宗)이 궁에 들어와 받는 수라상 주식(酒食)이 입에 맞을리 없어 수라간에서는 임금님의 향수음식을 찾아 헤맨 끝에 이문안의 마부와 장꾼들이 찾는 탕국밥과 막걸리를 찾아냈다. 임금이 이 탕국밥과 막걸리만 찾아 먹자 백성이 임금 먹는 것을 같이할 수 없다는 법도로 그 잘되던 장사를 폐하고 대신 선혜청 선달이라는 벼슬을 얻고 있다. 반면에 이웃하고 있는 술국집은 안동김씨 세도의 핵심인 김병국 대감이 드나든다는 소문이 나 팔도에서 노부모 업고 이 술국집을 찾아들었기에 음식재벌이 되었다. 비로 정치 기류를 탄 정치음식의 명암이 아닐 수 없다.
2차대전 말 장개석 정부와 ●김구 선생의 임시정부가 피란가 있었던 중경(重慶)의 정치음식으로 훠궈쯔(火鍋子)와 둥징바오자(東京爆炸)라는 요리가 있었다. 뜨거운 기름에 온갖 잡초와 곤충을 끓여 제독시켜 허기를 메웠던 전시 식품이요 누룽지에 뜨거운 수프를 부어 폭파음을 냄으로써 적국 수도인 동경 폭격을 가상했던 눈물겨운 정치요리들이다. 장개석이 자주 들렀던 훠궈쯔 집이라느니 ●김구 선생이 자주 들렀던 둥징바오자 집이라느니 하여 유객을 하는 것을 보았다. 텍사스 출신의 존슨 대통령이 백악관에 들면서 백악관 식탁에 얼음을 올리라 하자 품위있는 프랑스 요리가 전통인 백악관인지라 주방장은 촌스럽다고 사표를 내고 물러갔었다. 그후 미국 상류사회에서 얼음을 먹지 않던 전통이 깨졌다 했으니 이 역시 정치음식이었다 할 수 있다. 존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양주 커티삭을 즐겨마셨던 것이 한국에 커티삭 붐을 일으켰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 해역에서 홍어가 잡히는 것은 목포 앞바다 흑산도 근해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전후해서 잡히지 않기 시작하던 홍어가 임기가 끝나는 작금 다시 잡히기 시작한다는 현지 보도가 있었다. 1997년 이래 어선 한 척이 하루 한 마리 잡기도 어려웠다던데 지금은 척당 50~100마리씩 잡히는 호황이라 하니 홍어는 정치음식이었던가ㅡ. 김 대통령은 막걸리에 삭힌 홍어를 즐겼다던데 대통령이 즐기는 음식이기에 호기심까지 가세하여 수요가 딸렸음직하다. 홍어는 정치생선으로 오래 기억되게 됐다.
(조선일보/사설칼럼)
[만물상] 김대중 대통령 (2003.02.23)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있던 1986년 어느 날이었다. 그의 말과 행동이 언론에 보도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 동교동 자택에는 찾아오는 기자가 많지 않았다. 신참 기자가 찾아가도 그와 식탁에 마주앉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한 젊은 기자가 당돌하게 물어보았다. “이제 정치 그만하시죠. 대통령병에 걸렸다는 소리까지 듣지 않습니까. 이쯤서 물러나면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을 텐데요.”
그러나 김대중씨의 대답은 단호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나도 알아요. 현실정치 그만두면 역사적으로 훌륭한 인물로 남을 겁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을 보세요. 해방 후 현실정치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역사적으로는 깨끗하고 훌륭한 분으로 기록됐지만 나라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현실에 때묻지 않고 고고하게 남겠다는 것은 백로(白鷺)의 유혹 같은 것입니다.” 젊은 기자는 “이 사람이 끝까지 대통령이 되려고 하겠구나”하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 후 략 ---
(조선일보/사람들)
[사람들] 재야운동가 백기완씨 가족사 털어놓아 (2003.02.18)
“우리 가족의 비극은 한 가정의 비극을 넘어서 민족적·역사적 비극으로 이해되어야 해.”
재야 운동가로 이름난 백기완(白基玩·71)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은 17일 새벽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난 큰 형 기성(基成·78)씨의 빈소에서 “내가 19살 때부터 통일운동에 나선 이유는 우리 가정의 비극을 가족적 입장에서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파란만장했던 그의 가족사를 떠올렸다.
백 소장은 1932년 황해도 은율군 장연면에서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3·1 운동 당시 마을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보급한 죄로 일본 경찰에게 고초를 당해 숨진 할아버지와, 조선일보·동아일보 기자를 지냈으며 백범 ●김구와도 친분이 있었던 아버지(백홍렬·白弘烈·84년 작고)의 가르침 덕에 어릴 때부터 민족의식을 가슴에 새기며 자랐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백 소장은 지난 67년 고(故) 장준하 선생 등과 함께 ‘백범사상연구소’를 출범시켰고, 현재 그 맥을 이은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 연구소는 ‘백범어록’등 각종 서적을 편찬했으며, 70년대 유신반대 운동, 80년대 통일·민주화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과정에서 5차례나 강제폐쇄되는 시련을 겼었다.
--- 후 략 ---
(소년조선)
[알림] 게시판 (2003.02.17)
▲모임 청년백범에서는 24일부터 27일까지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어린이 백범 학교’를 연다. 초등학교 4~6학년을 대상으로 백범 ●김구 선생의 생애를 배우고 연극을 만들어 발표회를 가질 예정. 회비는 1만 원(☎ 02-719-1311).
(조선일보/문화)
[책마을] 미군정의 X파일을 본다 (2003.02.14)
◆미 군정 자료 연구
(정용욱 지음/도서출판 선인/2만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가 “●김구(金九)는 내가 끓일 스튜의 소금이 될 것”이라고 했다는 말은 몇 편의 논문보다 더 미(美) 군정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1945년에서 1948년까지 남한을 다스렸던 미 군정의 1차사료들은 대부분 미국에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한국 현대사를 전공하는 저자는 미국 국립문서관(National Archives)의 자료들을 뒤져 연구하고, 사료비판을 시도한다. 때로는 엄청나게 왜곡·윤색되고, 작성자의 관점과 의도가 강하게 스며든 자료들 속에서 임시정부, 노동, 4·3사태 등에 관한 귀중한 사실(fact)들을 건져내고 정리한다.
▣ 김창우 -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 김항용 -
▣ 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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