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유적답사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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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3-03-04 08:05 조회1,505회 댓글0건본문
방선문에서 나와 차를 몰고 삼성혈로 갔다. 제주의 3성씨(고, 부, 양)가 처음 땅 속에서 나왔다고 전하는 곳이다. 이상하게도 3개의 구멍이 있었다. 허기에 지친 아이들은 배고픔을 못 참았다. 익수씨는 우리를 근처의 제주 전통음식점으로 안내했다. 한치물회와 옥돔구이, 갈치구이를 시켰다. 시장하기도 했지만 생선 맛이 이렇게 맛있을 수도 있는지 처음 알았다. 그리고 풍성한 음식에 또 놀랬다. 평소 생선은 별로 좋아하지 않던 아이들이 체면을 못 차리고 먹어댄다. 맛있는 식사 뒤에 음식값을 내려는 나의 행동을 막아서는 익수씨를 뿌리치려니 익수씨와 익히 잘 아는 사이인 음식점 주인은 은근한 눈빛으로 날보고 돈을 거두란다.
이어 인근에 있는 제주도 민속자연사박물관으로 갔다. 입구에 들어서자 익수씨는 한 안내원에게 연구원 한 분의 면회를 요청한다. 2개의 박사학위를 갖고 있다는 50대 초반의 한 분이 뛰다시피 나와 익수씨께 공손한 인사를 올린다. 목요강좌에서 공부하고 있단다. 입구에는 남봉공의 <유한라산기>를 명필가인 소암 현중화씨가 쓴 목각판이 무려 20m 길이의 웅장한 모습으로 걸려 있다. 옆에는 <사진촬영 금지>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으나 내게는 비디오든 사진이든 얼마든지 찍으란다. 익수씨 덕분에 귀빈 대접을 받았다.
다시 차를 몰아 동쪽 방향으로 20분 쯤 달려 함덕포에 이른다. 해수욕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제주의 해수욕장 중 대표적인 곳으로 이름난 이곳에 여름이면 발 디딜 틈이 없단다. 텅 빈 겨울바다는 다소 을씨년스러웠으나 눈앞의 정경은 푸른 바다와 원형의 해안, 파도를 잘 막아주도록 잘록하게 들어 온 포구, 곱게 깔린 모래톱으로 본래의 아름다움은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제주의 삼별초를 공격하기 위해 충렬공과 관군이 1차로 상륙한 곳이다. 1273년 4월 9일 여몽 연합군(고려군6천, 몽고군2천, 한군2천) 1만명이 추자도에 이르렀다가 4월 28일 충렬공은 30척으로 비양도 바로 앞의 명월포를 진격하는 척 하는 유인책을 쓰고 나머지 주력부대 120척을 이끌고 이곳으로 진격하여 상륙한 곳이라는 익수씨의 자세한 설명이 뒤따른다.
당시 삼별초 이시화(李時和)등이 끝까지 저항을 하였으나 연합군의 대정(隊正) 고세화(高世和)가 돌진하고 장군 나유(羅裕)가 선봉대를 거느리고 맹공격을 하니 삼별초의 함덕 방어선은 무너지고 말았다 한다. 함덕 상륙에 성공한 충렬공은 서쪽으로 진군하여 파군봉(破軍峰. 약1200고지)에서 삼별초의 전초를 격파하였고, 명월포 앞에 있던 선단(30척)도 귀일포로 상륙하여 충렬공군에 합세하였으며 여몽연합군은 화공으로 항파두성을 공격하여 삼별초의 유성장 김원윤(金元允), 김윤서(金允敍)등의 필사적인 방어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을 함락시켰던 것이다.
이곳 함덕에서 부터는 해변가로 도로가 잘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 해변가로 돌담이 연이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삼별초가 1270년 이곳에 와서 제주인들을 총동원하여 갖은 무력을 행하며 쌓은 환해장성이라 한다. 장관이었다. 이곳에서부터 항파두리 앞 옹포 넘어 까지 제주도 북단 해안 전체를 돌로 성을 쌓았던 것이다. 이때 수많은 제주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갔다고 한다. 식량공급이 안되어 자신의 대변을 받아먹을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짐작이 간다. 불과 2년만에 이 많은 공사를 해 냈던 당시 삼별초의 무력과 제주민들의 고초를 생각해 보았다.
1시간 여를 달려 애월리의 애월포에 닿았다. 이곳이 삼별초의 수군 사령부가 있던 곳이란다. 뒤쪽에 자리잡은 주성인 항파두리를 방어하는 곳이다. 멀리로는 파군봉과 항파두리성이 보인다. 충렬공은 섬의 중서부에 있는 이곳을 피해 함덕으로 양동작전을 벌이며 상륙작전을 폈던 것이다. 역시 이곳의 포구 주변에도 옛 부터 있어온 환해 장성의 성이 아직도 남아 있다. 포구 안쪽으로 들어가니 규모가 엄청난 애월진이 나온다. 해변임에도 갑자기 위치가 높아져 멀리 바다를 경계하기에 좋았다. 그 자리는 성곽만 옛날 그대로 돌로 쌓여 있고 성 안은 애월초등학교로 변했다. 정문 입구에는 안내 표석이 서 있다. "1271년(원종 12)삼별초의 난 때 목성이 축조되었으며 1581년(선조 14) 김대정 목사때 포구로 옮겨 돌로 쌓았다. 둘레 549척, 높이 8척이었으며 남과 서에 성문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을 지나 해안가로 달려 한림을 지나 명월포로 간다. 그런데 명월포는 새로운 간척공사로 많이 좁아졌다. 이곳으로 2차 상륙을 했다고도 하고 조금 더 서쪽으로 가서 있는 옹포에 상륙했다고도 한다. 명월포에는 배가 없었고 옹포는 지금도 포구로 쓰고 있었다. 바로 눈 앞에 비양도가 있었다. 서녘 노을에 눈부신 저 섬, 당시 충렬공은 비양도를 은폐 엄폐물로 삼아 양동작전으로 삼별초군을 유인했고, 제주도를 관찰했으며 관군을 잠시 쉬게도 하며 전초기지로 사용했던 섬이다. 당시 긴요하게 섬을 활용했던 충렬공의 눈빛과 작전을 생각해 본다. 김통정이 이 유인책에 속아 함덕에서 온 충렬공 주력부대가 뒤에 있는 항파두리 성을 칠 때까지 바보처럼 비양도만을 바라보며 지키고 있던 포구다.
다시 차를 몰아 내륙으로 들어간다. 이제 항파두리로 간다. 마치 충렬공께서 공격해 가던 모습으로 말이다. ---계속----
▣ 김주회 - 제주도 답사가 흥미진진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충렬공 할아버지와 함께 가는 느낌이 듭니다.
▣ 솔내영환 - 역사스페셜을 보는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 김은회 - 잘 읽었습니다. 눈이좀 침침해 집니다.
▣ 김정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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